루이스는 단 10분도 아내에게 테니스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결국 한 시간 내내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라켓을 들고 있던 이사벨이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나가버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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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꼭대기에 있는 스피커를 수리하는 루이스. 남들에게 한없이 친절한 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우리의 ‘경상도 남편’ 같은 기질이다. 가족, 특히 아내에게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참 무심하다. 콜롬비아로 오기 전 한국에서 필자의 태도와 너무 흡사해 한 번씩 찔리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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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의 방. 루이스는 집에 들어오는 순간 저 작은 노트북으로 사진작업과 포토샵, 그리고 음악 작업까지 한다. 오른쪽에 녹음실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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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음실 내부 모습이다. 나름 벽에 방음시설을 해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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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광장에서 열리는 에어로빅 무료강좌 모습. 일주일에 두 번 진행되는데 새로 선출된 시장의 공약사업의 하나다. |
마을 광장에 에어로빅 음악이 울려 퍼졌다. 무대 위에서 흰색 반팔셔츠에 빨간색 트레이닝바지를 입고 모자를 쓴 강사 두 사람이 율동을 이끌었다. 하이로 부부다. 하이로는 방과 후에 인라인스케이트 수업도 맡고 있고 이웃마을 카이세도니아에 제법 큰 헬스클럽도 운영하고 있는 알부자다.
에어로빅 무료강좌는 일주일에 두 번 진행되는데, 한 달에 한 번씩은 전문 댄서와 함께 살사나 메렝게와 같은 라틴댄스도 배울 수 있어서 마을 사람에게 인기가 높다. 놀랍게도 이건 새로 선출된 루벤 다리오 시장의 공약사항이었다.
아내는 늘 맨 앞에 서서 열성적으로 동작을 따라하곤 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집안 살림하랴 아이 키우랴 시어머니 모시랴 도무지 여가시간을 낼 수 없었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리. 수업이 있는 날이면 소영이와 함께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와서 스트레스가 다 풀린다면서 아주 좋아했다.
더러 남자들도 에어로빅 수업에 참여하는데 여기에 루이스가 빠질 리 없다. 빼어난 연주자에다 타고난 춤꾼 루이스. 특히나 지난 시장 선거에서 루벤 다리오 당선자의 선거포스터와 여러 가지 홍보물을 제작한지라 시장이 벌이는 사업에는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사실 루이스는 마을의 궂은 일이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에는 몸을 사리지 않는 편이다.
얼마 전 마을체육대회에서는 배구공이 실내체육관 천장 프레임에 낀 적이 있었다. 아무도 꺼낼 엄두를 못 내고 있는데 어느새 루이스가 원숭이처럼 날래게 벽을 타고 기둥을 올라 쇠 난간을 건너더니 끼인 공을 떨어뜨려 주었다.
그러나 이토록 친절한 루이스에게도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족에게는 무심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루이스가 에어로빅 수업에 아내인 이사벨을 데려왔다. 이사벨은 춤을 잘 못춘다. 보통 남미사람이라면 모두가 춤에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한국인이 모두 태권도 유단자는 아니지 않은가?
루이스는 맨 앞줄에서 신나게 에어로빅을 즐겼고 잘 따라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강사 대신 원 포인트 레슨까지 해주었다. 그런데 정작 아내 이사벨에게는 수업 시간 중 단 한 번도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이것은 부부 간에 불화가 있거나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타인에게는 친절하고 가족에게는 무심한 성격을 가진 남자일 뿐이었다. 재미있을 리가 없는 이사벨은 맨 뒤에서 몇 번 어설프게 따라하다가 도중에 집으로 가곤 했다.
“똑같다, 똑같아. 오빠랑 판박이다!”
“내가 뭘?”
“콜롬비아 오기 전까지만 해도 루이스나 오빠나 거기서 거기야!”
사실이었다. 나 또한 남들에겐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늘 배려하는 노력을 했지만 집에선 말도 별로 없이 내 할 일만 하는 이기적인 남편이었다. 시립극단 단원이었을 때는 매일 이어지는 연습을 핑계 삼아 아내와 함께 한 것이라곤 일주일에 두세 번 아침을 먹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땐 행복유보라고 생각했다. 오늘의 고생과 어려움은 내일의 행복을 위해 견디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급한 일 때문에 정작 중요한 일을 놓치는 현대인의 표본이었다.
지금은 일이 급하니까 나중에 아이들이랑 놀아주면 된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아빠를 필요로 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뒤늦게 아빠가 철(?)이 들어 아이를 찾으면 그땐 아이들이 낯설어 한다. 몇 반인지도 모르고 친한 친구이름도 모르고 아이가 어떤 연예인을 좋아하는 지도 모르는데 대화가 되겠는가? 불편한 아빠 대신 편한 친구가 백 배 나은 것이다. 나 또한 한국을 떠나기 전까진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아내는 이사벨에게 동질감을 느꼈는지 그 다음부터는 늘 이사벨 곁에서 카혼(스텝박스)을 챙겨주면서 동작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다.
이곳 남미에서는 스포츠하면 그냥 축구다. 그런데 얼마 전 테니스실업팀 감독으로 있다가 정년퇴직한 이반이 테니스교실을 열면서 온 마을에 테니스 열풍이 불게 됐다. 역시나 장소는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실내체육관 ‘엘 콜리세오’.
“정희야, 우리도 테니스 함께 배우자.”
“나 완전 초보인데 괜찮을까?”
“내가 도와줄게. 걱정 마.”
엘 콜리세오는 테니스장이 아니다. 바닥상태는 둘째치고 네트조차 없다. 하지만 부에나비스타에서 못할 일이란 없다. 이반은 마을 소방서에서 쇠기둥에 돌돌 말려있던 배구네트를 가져와서 낮춰 매달았다.
첫 수업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모두가 함께 쓰라고 이반이 테니스라켓 5개를 준비해 왔는데 축구심판을 보는 넬슨은 조금 낡았지만 자신의 라켓 하나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수업에 참석했다.
그리고 내 친구 루이스. 새로 산 2개의 테니스라켓을 들고 이사벨과 함께 왔다. 이반은 라켓 잡는 법을 설명해주고 포핸드 스트로크 구분동작을 연습하게 했다. 나와 아내는 집에서 미리 연습을 하고 왔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잘 따라할 수 있었고 아내는 이반에게 테니스 소질이 있다는 칭찬을 들었다. 아내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더 열심히 자세 연습을 했다.
작전 성공.
칭찬을 들어야 즐겁고, 즐거워야 연습이 더 잘된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루이스는 하루 만에 포핸드 스트로크를 잘 받아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사벨은 수업 내내 혼자 서있거나 공을 주우러 이리저리 뛰어다닐 뿐이었다.
“리, 우리 테니스 공 좀 사자! 연습장엔 몇 개 없어서 너무 불편해.”
“그래, 20개짜리 한 통 사서 반씩 나누지 뭐.”
“그리고 있잖아 리. 어제 인터넷 봤는데 선수용 라켓이 끝내주더라. 그거 또 산다면 이사벨이 난리칠 거야. 내꺼 반값에 안 살래?”
나야 아내와 테니스라켓 하나로 연습을 했으니 싼값에 하나 더 살 수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몇 번의 수업이 진행되자 참가자들도 서서히 줄어들어서 진짜 테니스를 즐기는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나와 아내는 항상 수업 30분 전에 가서 몸을 풀고 벽치기 연습을 했다. 아내의 실력은 이반이 칭찬한 것만큼 쑥쑥 늘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테니스 선수가 되거나 그걸로 학점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즐기면 되니까. 수업이 끝나면 나는 늘 아내에게 공을 던져주었는데 루이스는 나와 함께 게임을 하길 원했다.
나도 루이스와 게임을 하는 게 훨씬 재미있다. 하지만 나만 재미있으면 부부가 함께 운동하는 것은 깨어지고 만다. 10분만 더 있다가 게임을 하자고 말하고는 아내의 포핸드 스트로크 연습을 도와주었다. 은근히 아내는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 짧은 10분도 이사벨에게 나눠주지 않았다. 오늘은 내게 꼭 이길 거라면서 백핸드 스트로크, 포핸드 스트로크, 발리 등 열심히 벽을 치며 연습했다.
이건 좀 위험하다 싶은 순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한 시간 내내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테니스라켓을 들고 있던 이사벨이 루이스에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눈물을 흘리면서 유모차를 끌고 엘 콜리세오를 나가는 이사벨. 바닥에 내팽개쳐진 라켓을 주워들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뒤를 따라가는 루이스. 그 뒷모습이 한국에 있던 이재선과 정확히 포개졌다.
루이스는 테니스 실력을 키우는 것보다 이사벨과 함께 공놀이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렇게 집에 들어가면 이사벨에게 어설픈 위로 한두 마디 하고는 곧 등을 돌려 컴퓨터 앞에 앉아 잘 때까지 붙어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답답해 할 것이다.
‘테니스는 열심히 연습해야 느는 거지. 그리고 남자가 사회생활로 일이 많고 바쁜 것도 모두가 가족을 위한 건데 왜 이해를 못하지?’라고 불평할 것이다.
“똑같네, 똑같아. 오빠랑 판박이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루이스에게 충고 좀 하라며 테니스 라켓을 챙기기 시작했다.
충고라….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되지? 이거 이야기가 길어지겠는데, 맥주 캔이라도 가져가야겠네. 근데 가만있자, 충고가 에스파뇰로 뭐더라.
前 대구시립예술단 극단 단원 mc8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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