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필리핀, ‘등뼈’없는 경제와 재벌

  • 박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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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8-26  |  수정 2013-08-26  |  발행일 2013-08-26 제면
"15개 재벌이 國富 50% 150개 명문가 정치 독점 국가성장 이끌지 못한 필리핀의 어두운 그림자 우리가 반면교사 삼을 만"
[월요칼럼] 필리핀, ‘등뼈’없는 경제와 재벌

필리핀 경제자유구역인 수빅 부근의 안바야 코브는 근래 필리핀 최고의 휴양지로 떠올랐다. 항아리 모양의 작은 만을 둘러싼 100만여평(330만여㎡)의 산림과 평지에 수영장과 헬스장, 음식점, 골프장, 콘도형 호텔, 고급 주택이 들어서 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까닭에 대중적으로 이용하기 어렵지만, 수려한 풍광과 편의시설로 인해 필리핀 부호들이 선호하는 휴양지로 꼽힌다. 골프 회원권은 우리 돈 3천500만원으로 필리핀에서는 매우 비싼 편이다. 고급 주택의 분양가는 3억원을 넘는다.

안바야 코브를 개발한 아얄라 그룹은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재벌기업으로, 부동산 개발로 성장했다. 마닐라의 강남으로 불리는 마가티 주거지역을 개발했으며 수돗물 산업과 은행, 통신업에도 진출했다. 오거스트 조벨 아얄라 회장은 순자산 22억달러로 필리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다. 아얄라를 비롯한 필리핀 재벌들은 주로 부동산과 유통, 은행업으로 부를 늘렸다.

필리핀 최고 재벌로 꼽히는 시(Sy) 가문은 필리핀 최대 백화점 체인인 SM의 소유주이고, 에두아르도 코주앙코는 필리핀 맥주시장의 90%를 점유한 산미겔 맥주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토니 탕 칵티옹은 필리핀 최대의 패스트푸드점 졸리비를 운영하고 있으며, 필리핀 에어라인의 소유주 루시오 탕 역시 맥주와 담배, 부동산 개발이 주된 수입원이다. 이러니 필리핀의 빈부 격차는 상상 이상이다. 3~5%만 상류생활을 유지하며, 인구의 25%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빈곤층이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겪은 이후 필리핀 경제는 최근 3년간 연평균 GDP 성장률 7%를 넘을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런 성장의 과실이 상류층에 집중된 탓에 대부분 국민은 성장을 체감하지 못한다. 부를 축적한 재벌가문들이 여전히 부동산과 유통, 은행업 등에 몰두하고 있으니 제조업이 성장할 토양이 없다. 제조업 종사사가 10% 미만인 반면, 호텔·요식·관광 등 서비스 산업 종사자는 54%를 넘는다. 필리핀 재벌가는 요즘 카지노 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해외 취업에 나서는 필리핀인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필리핀 인구의 10%에 이르는 1천만명이 미국과 중동, 영국, 일본 등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고 성실한 국민성이 해외취업의 좋은 조건이다. 이들이 지난해 필리핀으로 송금한 금액이 필리핀 총생산액의 14%에 이르는 211억달러에 달했으며, 올해는 매달 20억달러 이상이 들어오고 있다. 이들이 필리핀 경제의 활력소가 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필리핀의 성장을 이끄는 ‘등뼈’가 될 수는 없다.

필리핀은 6·25전쟁 때 우리나라에 파병하고 1960년대 초반까지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가장 잘나가는 국가로 꼽혔다. 우리와 비교하면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 후반까지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구가했다. 이런 필리핀의 쇠락은 국가적 리더십 상실에서 기인했다. 마르코스 이래 정·재계의 단단한 부패 고리가 국가적 방향을 상실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15대 재벌 가문이 국부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친족·혈연으로 얽힌 150개의 명문가가 정치권력을 독과점하고 있다.

산업구조의 불균형, 기업설립을 방해하는 각종 규제와 공적 부패, 재벌가문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과 갈수록 커지는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 등이 필리핀에 드리운 그림자다. 필리핀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지난 대선 과정에서 우리도 경제민주화를 최대의 화두로 떠올렸다. 대기업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서인지 당시보다 논의가 상당히 후퇴했다는 느낌이다. 필리핀 재벌가의 무한확장에 따른 폐해를 보면서, 우리 대기업들의 문어발식 확장과 어떻게 다른지 생각하게 만든다.

박경조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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