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선 가족의 런던 생활연극기] 제4막-언어는 몸짓보다 정확하다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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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수정 2014-03-07  |  발행일 2014-03-07 제면
“아빠! 영국선 ‘박스(BOX)’를 ‘복스’라고 하네”
우리가족 랭귀지 대표선수 소영이 본토 영어 정복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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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영어학원인 ‘English Studio’ 학생증을 받아들고 즐거워하는 소영이(위). 소영이가 영어 수업 중 함께 배우는 친구들과 영어공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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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이 많이 몰려있는 홀본역 네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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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한 번은 무료로 해준다는 ‘English Studio’학원의 광고판.

#1

런던 동부 쇼디치 지역 브릭레인에서는 일요일마다 장이 선다. 초콜릿, 베이글을 파는 곳도 있고 DVD 대여점도 있다. 재선과 정희, 검은색 바탕에 빨간 글씨로 ‘블리츠(BLITZ)’라 쓰인 옷가게에 들어선다. 더벅머리 남자 점원이 인사를 한다.

점원 (정희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Hello, Love.

정희 (살짝 얼굴을 붉히며) Hi.

재선 뭐? 방금 자가 머라 캤노? 러브?

정희 (못 들은 척 옷을 구경하며) 12.99파운드? 티셔츠 한 장에 2만원이 넘는다는 말인데 좀 비싸다.

재선 분명히 러브라 캤는데 저 자슥이….

점원 (정희에게 다가오며) What size are you looking for, Darling? 옷 사이즈는 어떤 걸로 찾으세요?

재선 뭐? 다, 달링? 니 분명히 들었재? 달링이라 카는 거!

정희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글쎄. 오빠가 잘못 들었겠지.

재선 내가 분명히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달링! 뭐? 러브? 달링? 임마 이거 선수구만 선수.

점원 (여전히 웃음을 지으며 재선과 정희를 쳐다본다.)

재선 나가자, 재수 없다.


재선, 정희의 손을 홱 낚아채며 밖으로 나온다. 신호등이 있는 곳까지 걸어오는데 두 사람 다 말이 없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신호등이 바뀌지 않는다.


재선 좋겠네? 영국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아서?

정희 신호등이 왜 안 바뀌지? 한참 기다렸는데.

재선 나는 참 잘 들리는데 왜 자기 귀에는 안 들릴까?

정희 여기 신호등에 뭐라고 쓰였는데 한번 읽어봐.

재선 러브? 달링? 언제 봤다고 러브 달링이야.

정희 히어링 잘 되는 이재선씨, 이거 좀 리딩 해보라니까.



신호등 앞 표지판에 적힌 영어, 재선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읽는다. Pedestrians. Push Button and Wait for Signal Opposite. 보행자는 버튼을 누르고 건너편 신호를 기다리세요.



재선 웨이트! 기다리라 카잖아. 신호등은 기다리는 거지!

정희 왜 화를 내고 그래? 영국 사람이 봐도 내가 매력적인 걸 어떡하라고?



재선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뚱뚱한 흑인 아줌마가 표지판 앞에 있다. 버튼을 누르고 재선과 정희 사이에 멈춰 선다. 잠시 후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뀐다. 정희가 째려보자 재선 입이 더 튀어나온다.


옷가게 점원이 정희씨에게
“러블리, 달링 달링” 연발
황당해하는 남편 재선씨
“영국남자들은 바람둥이?”
알고보니 이 나라 사람들
낯선 사람들한테도
인사처럼 그런다네요

#2


서 사장이 거실에 앉아 BBC 뉴스를 보고 있다. 저녁식사를 마친 재선 가족도 거실로 와서 자리를 잡는다. 재선이 낮에 있었던 일을 서 사장에게 이야기하자 서 사장이 웃는다.



재선 웃지 마. 영국남자들 신사라더니 죄다 바람둥인가 봐.

정희 아이고, 참. 이 미모는 한국, 콜롬비아, 영국 국적을 가리지 않고 통하는구나. 하긴 이재선 아내로 썩기는 아깝지.

서 사장 하하, 아이라예. 영국 사람들은 그냥 낯선 사람한테도 인사처럼 러브, 달링을 붙여서 얘기해요. 말끝마다 ‘Lovely’ 하는데요. 설마 영국남자들이 형수님 얼굴 보고 러브 달링 하겠….

정희 (서 사장을 잡아먹을 듯 째려본다.)

서사장 (TV채널을 돌리며) 저, 정호야 만화 틀어주까? 32번!

정호 우와, 디즈니 만화 한다.

소영 근데 아빠, 여기 와서 느낀 건데 영어발음이 좀 달라. 박스(Box)를 복스라 그러고 물도 워우터(Water)래.

재선 소영아, 사투리겠지. 영어도 사투리가 있잖아? 정통영어는 굴려야 돼. 웨이러 미닛(Wait a Minute)이지!

정희 여기가 영어의 본고장 영국하고도 수도 런던인데 사투리라고?

서사장 행님 발음은 미국영어지예. 영국발음은 T를 확실하게 소리 내고 생긴 대로 읽으면 됩니다. Hot은 핫이 아니라 홋. And는 앤드가 아니라 안드에 가깝게 발음하면 됩니다.

재선 (못 미더운 듯이) 그럼 강남엄마들이 아들 R, L 발음 구분시킨다고 혀 수술 시키네 어쩌네 하는 건 뭐꼬?

서사장 물론 R, L 구분해서 발음 잘하면 좋겠지예. 근데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님 발음 갖고 뭐라카는 사람 있습니까? 영어가 유창하다는 것은 발음보다도 어휘력과 표현력이지예.

정희 (탁자를 쾅 치며) 그래. 기왕 우리 가족이 영국에 발을 디뎠는데 그냥 놀다갈 순 없다. 영어 학원에 등록해서 영어를 배우자!

가족 우와아!

정희 (다들 기대에 찬 목소리로 떠들자 찬물을 끼얹는다.) 단 한사람! 영어를 배우는 사람은 단 한사람이다. 우리 형편상 학원에서 배우는 사람은 딱 한사람으로 정한다. 영어 배울 사람?

가족 (모두 손을 들며) 저요, 저요!

재선 어허. 전부 다 손 내리라! 이 집의 가장은 내다!

서 사장 행님, 이 집의 가장은 전데요?

정희 (서 사장을 잡아먹을 듯 째려본다.)

재선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무려 6년간 영어공부를 했다. 국제화 시대에 진정한 역관은 내다 내.

정희 6년이나 공부해서 신호등 버튼 하나 못 누르는 사람은 탈락!

정호 저요, 저요!

정희 정호는 왜 영어를 배우고 싶은데?

정호 영어학원 가면 친구들하고 축구하고 놀 수 있잖아요.

정희 니가 그럼 그렇지. 탈락!

소영 난 런던 다리이름도 다 외웠어. 웨스트민스터브리지, 주빌리브리지, 워털루브리지, 런던브리지, 타워브리지….

정희 합격!

재선 오, 노! (혀를 빼물면서 ‘th’ 발음을 한다.) 싱크 어겐!

정희 셧 업! 서 사장님, 학원비는 요즘 얼마 정도 해요?

서사장 학원마다 차이가 좀 있는데예, 보통 주당 30만원 정도 생각하시면 됩니더. 홀본역 네거리에 학원이 많이 모여있는데 런던1존이라서 교통도 편합니더. 내일 한번 가서 알아보이소.


#3


런던 홀본(Holborn)역 네거리. 재선 가족이 한 영어학원 문을 밀고 막 나온다.



재선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정희 6년 공부 큰소리치더니, 에구. (전단을 훑어보면서) 두 달에 600파운드면 100만원이니까 다른 데보다는 싸네.

소영 근데 엄마, 선생님들이 다 인도나 중국 사람이던데 영국까지 와서 괜찮을까?

재선 그건 좀 그렇다. 영국 왔는데 영국 선생님에게 배우는 게 낫지.

정희 또 다른 데 가보자고? 하루 버스비가 장난이 아니다.

소영 엄마, 저 빨간 간판 학원 앞에 프리(Free)라고 적혀 있는데?

정호 프리? 자유다, 자유!

정희 퍼스트 레슨 프리(1st Lesson Free)! 여기는 영어도 쉽게 써놨네. 맘에 든다. 게다가 한 번은 공짜네. 저기 가보자.



재선 가족, English Studio라고 쓰인 학원으로 들어간다. 선생님들은 거의 영국 사람이고 학원생도 동양인이 거의 없다. 재선과 정희, 서로 미소를 짓는다.



정희 여기 괜찮다. 일단 공짜니까 한번 들어보자. 근데 가격이나 수업시간 교재, 뭐 그런 거 물어봐야 되는데?

재선 걱정 마라. 스페인어 한마디 못해도 부에나비스타에 집 마련한 사람이 내다. ‘몸짓은 언어보다 강하다’라는 말 못 들어봤나?



재선, 짧은 영어 단어 몇 개와 온갖 몸짓으로 대화를 시도한다. 다행히 직원이 잘 알아듣는다. 하지만 대답으로 쏟아지는 영어의 홍수는 감당할 수 없다.



정희 몸짓은 언어보다 강하다며?

재선 (시무룩한 표정으로) 선진국에서는 안 통하네.

소영 (직원에게 다가가서 묻는다.) Can You Speak Spanish? 스페인어 할 줄 아세요?

직원 Si, Si! 네.

소영 (생긋 웃으며) Hola, Mucho Gusto!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소영과 직원, 유창한 스페인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재선과 정희, 흐뭇한 표정으로 소영을 바라본다.

정희 역시 대표선수를 잘 뽑았네.

재선 역시 언어가 몸짓보다 정확하네!

문화점조직 이공컬처 대표 20cultur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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