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양복 장인 ‘천기봉 양복점’ 대표 고동수씨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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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4-11   |  발행일 2014-04-11 제37면   |  수정 2014-04-11
테일러는 단 한 명의 단골만 남아도 슈트를 만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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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동안 양복 외길을 걸어오고 있는 고동수 사장. 비록 양복점 퇴조시대이지만 예순이 넘은 현재도 재단, 봉재 등 전 파트를 모두 챙기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93년 스승인 천기봉으로부터 가게를 이어받았다.


남자에게 돈이 능력이라면 슈트(Suit·양복)는 남자의 ‘명예’이고 첫인상을 좌우한다. 1970년대만 해도 대다수 남성은 양복점, 여성은 양장점에서 옷을 맞췄다.

양복은 어떤 연유로 한국까지 흘러들어 왔을까.

1896년(고종 33) 4월7일 칙령 제78호로 육군복장규칙을 제정한 후 당시 사용하던 군복을 폐지하고 서양식 육군복장을 입도록 한다. 1900년(광무 4) 4월17일에는 칙령 제14호로 문관복장규칙을 정하였고, 제15호로 문관대례복제식(文官大禮服制式)을 정하여 조정 대신들의 관복을 서양식 관복으로 바꾼다.

멋쟁이 양복의 대명사를 흔히 ‘테일러드 재킷’이라고 한다. V형 칼라(노치 라펠), 뚜껑 달린 주머니(플랩포켓) 등이 필수조건.

영국 런던 최고급 양복점 거리인 ‘새빌 로(Savile row)’에 가면 그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 새빌 로는 현대 양복의 발상지. 1806년 제임스 폴이 설립한 양복점인 ‘헨리풀(Henry poole & co)’에 가면 정통파 양복의 모양새가 어떤지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60년대 대구 중앙로는 한국의 새빌 로였다. 영진, 멍텅구리, 만우, 미옥, 서울, 양치상, 형제, 이글, 워성턴, 태수…. 그 시절 안방 장롱 위에는 어김없이 유명 양복점 상자가 신줏단지처럼 놓여 있었다. 그런데 2000년 어름부터 그 많던 양복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보세옷 거리로 변해버렸다.

양복점 주인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스승의 이름을 상호로 올리다

양복 장인 고동수씨(64).

장인이란 말을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그냥 ‘기술자’로 불러달라고 했다.

대구시 남구 이천동 대봉네거리. 그 모퉁이에 고장 난 자동차처럼 앉아 있는 천기봉 양복점. 그는 그곳 대표이다. 그는 왜 자기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 걸까. 천기봉씨(74)는 그의 스승. 스승은 5년간 자기 밑에서 고난도의 양복기술을 배웠던 제자 고동수의 안목과 성실함을 인정하고 93년 가업을 물려준다. 스승은 당시 중앙로 1급지 양복점에 맞서 2급지 양복점의 자존심을 지켜나갔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평생 풀리지 않던 양복 기술의 한 수를 배우고 스승이 사용하던 물품과 간판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고 대표는 평범한 기능인이다.

양복학원에도 다니지 않았고 그냥 일하면서 기술을 터득했다. 상(賞)과도 인연이 없다. 도예 장인처럼 성실하게 40년 이상 한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재단용 자(尺)의 눈금처럼 살았다. 참 무표정하다. 하지만 그가 바늘과 가위를 잡고 양복천을 볼 때 그 눈빛에선 일견 ‘숭고함’까지 느껴졌다.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 때 대구로 온다. 먹고살기 어려워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이종사촌 형(이창훈)이 운영하던 동인동 삼창라사 점원이 된다. 이후 그는 반세기동안 대구 양복점 역사의 영광과 좌절을 몸소 겪었다.

- 그 시절엔 왜 그렇게 많은 양복점이 생겨났죠.

“60년대 대구 경기는 정말 대단했어요. 특히 섬유경기가 폭발적이었죠. 당시 결혼식 문화도 일조를 합니다. 신랑은 예복을 비롯해 평균 5벌의 양복을 마련합니다. 또 혼주, 형제, 사돈까지 결혼과 관련해 많게는 10여벌씩 맞췄습니다. 그때는 맞춤복 전성기였어요. 백화점엔 기성복 코너가 없었습니다.”

- 당시는 천 종류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양복천은 순모 아니면 혼방, 이렇게 두 종류만 있었습니다. 혼방은 모와 폴리에스테르가 1대 1 비율로 섞인 것입니다. 잘 구겨지지 않아 많이들 해 입었죠. 당시 양복 한 벌을 ‘빼입으려면’ 2천~3천원 선이었습니다. 제일모직, 경남모직, 한국모방, 대한모방, 한일합섬 등 기라성 같은 브랜드가 등장합니다. ”

- 학원도 안 가고 기술을 배운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을 텐데요.

“보름 만에 옷 하나가 완성되는 걸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하지만 제가 덤벼들 상대로는 보이지 않더군요. 기술은 보이지 않고 그냥 재봉하는 모습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실도 끼워주고, 미싱 청소도 했습니다.”

(그의 작업대에는 참 많은 자가 보인다. 직각자, 굽은자, 줄자, 천을 대는 마자, 소매 곡선용 특수제작자 등 10가지는 족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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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때 대구로 와
라사 점원으로 출발
실 끼우고 미싱 청소…

기성복이 없던 시절
대구 양복산업 황금기
결혼 예복 맞추는 날도
철학관 물어 길일 택해

스승 천기봉씨에게
고난도 양복기술 배워
93년 가게 물려받아


◆ 그땐 왜 그렇게 원단 도둑이 많았는지

- 당시 양복점에만 있었던 풍경들을 소개해주세요.

“당시 원단은 쉽게 현금화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 도둑 표적 1순위가 되죠. 그래서 퇴근 직전 창고에 넣어두고 아침에 다시 진열해야 됩니다. 어떤 사장은 원단에 자기만 아는 표시도 해둡니다. 원단은 직접 사 갖고 오는데 잘못 선택하면 손해를 많이 보죠. 2000년까지 그런 문화가 있었는데 이젠 견본시대라 번거롭게 원단을 가게 안에 걸어놓지 않습니다.”

- 당시 서문시장은 전국 최고의 원단 유통 메카였죠.

“원단 거래는 주로 서문시장 4지구 1~2층 원단상회에서 이뤄집니다. 저는 서울라사, 대동라사 등과 통했어요.”

- 양복점은 만능이라고 하는데, 정말 모든 과정을 직접 처리할 수 있습니까.

“그 시절 양복 안주머니 밑엔 입는 사람의 이름을 새겨줍니다. 이건 일반 바느질로는 못 새깁니다. 마크사같이 오버로크(Overlock)용 특수재봉틀이 있는 곳에 가야죠.”

(인터넷을 통해 양복 봉제용어 정리집을 훑어봤다. 바지만 해도 ‘가부라’ 등 무려 34가지 테크닉이 필요했다. 상의와 와이셔츠 등을 다 포함할 경우 최소 150여 가지의 재단 및 봉재술이 필요했다. 교과서 이론을 모두 암기해도 옷은 절대 교과서대로 나오지 않는다. 사람의 체형은 사람 수만큼 다양하다. 엉덩이, 목, 다리, 허리, 어깨 등 신체 각 부위는 나이를 먹을수록 좌우 대칭이 안 된다. 조금 기울고 비뚤어지기 마련이다. 1㎜ 차이로 고급천이 저급옷으로 추락한다. 장애인, 뚱뚱보, 홀쭉이 등의 양복은 달랑 몇 년 경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 알면 알수록 복잡한 양복 기술

- 양복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요.

“바지용 천은 4토막, 상의는 10토막을 냅니다. 재단 종이로 본을 떠서 원단 위에 올려놓고 분필로 모양을 그려 가위로 자르는데, 자르기부터 초보자는 힘이 듭니다. 초보자는 여분으로 둬야 할 부분과 선을 구분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흰 줄만 따라 비뚤비뚤 자르죠. 그럼 절취골이 생겨 결국 옷이 울어버려 못 입습니다.”

(자르는 연습, 수십 가지의 바느질과 재봉틀 사용하는 연습, 각종 부자재 다루는 연습…. 산 넘고 산이 아닐 수 없다. 주머니도 직접 만들어야 된다. 상의는 곡선미학의 절정이다. 옷을 입었을 때 기와의 처마선처럼 매끈한 곡선이 안 나오면 절대 이 바닥에서 성공 못한다.)

-양복 기술의 최대 승부처는 어딥니까.

“하나하나의 기술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하나가 모인 전체가 아름다운 태(모양)를 만들지 못하면 도공이 그릇을 깨듯 찢어 버려야 합니다. 장인은 아무리 악조건의 체형도 정상인처럼 보이게 천의무봉으로 만들 줄 알아야 됩니다.”

- 양복 만든 사람도 이름을 양복에 새깁니까.

“손님 이름은 주로 한자와 한글로 새깁니다. 양복점 상호는 양복 오른쪽 안주머니 밑에 새기지만 장인의 이름은 올리지 않습니다. 완성된 옷 그 자체가 이름인데 거기에 또 자기 이름을 적는다는 건 한마디로 사족이죠.”

◆ 양복 맞추는 날도 철학관에 물었다

- 결혼식을 앞두고 양가 식구가 몰려오면 양복점은 일순간 북새통이 될 것 같아요.

“요즘은 예비 신랑신부가 알아서 백화점 등에서 옷을 구입하기도 하는데 그땐 결혼식에선 절대 기성복을 입지 못했죠. 그게 당시 불문율이었어요. 양복 맞추는 날도 장 담그는 날처럼 중히 여겼습니다. 집안의 대사라서 철학관에 물어 길일을 받기도 하죠. 이르면 한 달 전부터 양가 식구가 몰려오는데, 손님이 워낙 많아 한 팀이 나가야 다음 팀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 세월 따라 양복 스타일도 많이 변한 것 같아요.

“60년대와 요즘 스타일을 비교해보면 상체는 몸에 딱 맞는 게 선호됐고, 바지는 지금은 좁은 형태이지만 그땐 나팔바지를 무척 선호했습니다. 바지통 넓이는 보통 10~11인치. 5년 전부터는 중년층도 7인치 반 정도로 좁게 해 입더군요. 코(뒤트임)도 많이 변했어요. 다들 원코, 투코, 무코를 놓고 고심을 많이 하죠. 앞 여밈도 대다수 싱글이지만 트렌치코트 같은 더블 스타일도 그땐 엄청 인기를 끌었는데 지금은 다들 촌스럽다고 하잖아요. 양복은 ‘유행의 시험대’인 것 같아요.”

- 대구 양복 스타일은 참 보수적이죠.

“색상의 경우 거의 검정·감색에 치중하죠. 그러다가 갈색·진밤색, 이어 회색도 유행합니다. 고방(체크)무늬의 경우 교사, 교수 등 점잖은 분은 절대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밝은 청색, 하늘색, 밝은 베이지색 등은 야한 색으로 분류됐습니다. 상당수 자기 주도적 디자인 감각이 없어 양복점 주인이 골라주는 걸 많이 선택했습니다. 참, 그땐 착복식도 꽤 유행했죠.”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머잖아 맞춤옷 전성시대가 부활하길 기원하며…
● 취재 후기

그는 여러 양복점을 거쳤다.

고향, 미영 등 10여 군데가 된다. 초창기엔 월급쟁이로 있다가 나중엔 프리랜서 기술자로 한 벌 해주고 얼마씩 받았다. 상의 한 벌 만들어주는 데 800~900원을 받았다. 전념할 경우 하루에 상의 한 개 정도를 만들었다. 돈을 많이 벌었다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손님 접대도 하고, 인건비도 주고, 세금도 내고, 거기에 생활비까지. 꽤 많은 기술자는 주색잡기에 빠져 아웃되기도 했다. 그는 성실해서 집 한 칸은 챙길 수 있었다.

양복 기술자는 빨리 은퇴한다. 고씨 나이에 현장에서 재봉 파트까지 직접 다루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다. 전투기 조종사 한 명 만들기 힘들 듯 그와 같은 기술자도 쉬 탄생하기 어렵다. 우리는 그런 장인을 더 오래 기억해야 한다.

2000년 어름, 기성복이 맞춤옷을 완전히 밀어냈다고 본다. 이젠 결혼식을 해도 양복점에 오지 않는다. 우주선 만드는 것만큼 복잡한데도 양복 한 벌에 달랑 30만~50만원. 유명 기성복의 반값도 안 된다. 양복산업이 절벽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는다. ‘삶이 곧 절벽’이라 믿기 때문이다. 힘들어 가게를 접을 생각도 했다. 그런데 ‘당신 없으면 난 어디서 옷을 해 입느냐’는 한 단골의 칭찬 어린 푸념에 용기를 얻었다.

종일 재봉틀 일에 능한 아내(홍말자씨)와 함께 일한다. 한 달 전에는 ‘복덩이’가 들어왔다. 한국폴리텍섬유패션대를 졸업하고 현재 모 자동차 부품회사에 다니는 이정호씨(27)가 제자가 된 것. 이씨는 먼후일 자기 이름을 건 양복점을 차리고 싶어 한다. 돌고 도는 인생. 머잖아 맞춤옷 전성시대가 올 것이다. 그래서 힘든 이 시점이 희망의 출발점. (053)473-2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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