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麵의 변신은 무죄!”…부산 물국수, 피란민 냉면과 만나 밀면이 되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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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5-20   |  발행일 2016-05-20 제34면   |  수정 2016-05-20
■ 푸드로드 부산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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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 대신 밀가루를 베이스로 하고 거기에 전분을 섞어 만든 부산밀면의 원조인 내호냉면의 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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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국수의 자존심인 ‘구포국수’.

예로부터 낙동강 하구와 맞물린 구포
강 하류서 바닷바람에 말린 국수 유명
할매회국수·내호냉면으로 입맛 자극

부산 밀면 탄생지로 꼽히는 내호냉면
북한식과 달리 메밀 대신 밀가루 사용
한 젓가락 입에 넣으면 “이게 부산 맛”

◆부산의 국수 열전

돼지국밥, 그다음 부산 음식은? 국수다.

부산에는 좀 특별한 면류가 수두룩하다. 대구와 국수 문화도 확연히 다르다. 대구는 칼국수인데 부산은 칼국수 마니아가 너무 적다. ‘부산에서 칼국수집 오픈하면 몇 달 안돼 망하고, 대구에서 고만고만한 잔치국수 전문집 내면 망한다.’ 사실이다.

부산과 대구는 대한민국 양대 국수도시. 물론 북한의 냉면, 강원도 막국수, 안동의 건진국수, 거창의 어탕, 전남의 팥칼국수, 의령 메밀소바의 전통이 있지만 부산과 대구의 국수 이야기가 나오면 다른 도시는 다들 입을 다물어야 된다. 현재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국수 공장을 갖고 있는 곳도 부산과 대구다. 부산은 구포국수, 대구는 풍국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한국 건면(소면)의 메카로 불리는 부산의 구포국수와 거제와 통영의 멸치가 만나 ‘잔치국수’를 만들었다는 사실.

부산의 면요리 리스트를 적어본다. 구포국수, 밀면, 비빔당면, 회국수, 그 연장선상에 있는 완당이 있다. 이제 그 속살을 파고들어가보자.

▶구포국수

부산의 국수는 구포국수에서 비롯된다.

낙동강 하구와 맞물린 구포 일대는 낙동강 하류의 염분 섞인 바닷바람이 연신 불어 국수를 자연 건조시키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구포장을 끼고 원료 구입의 용이함과 자연 조건 등을 두루 갖춘 이곳은 국수공장이 들어서기에 안성맞춤. 음식어원 연구가 박정배씨가 구포국수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알려준다.

“1905년 경부선 구포역이 생긴다. 당시 한반도에서 밀 생산이 가장 많았던 곳은 황해도 일대. 황해도의 밀은 기차에 실려 구포까지 운반된다. 구포역 주변에는 ‘남선곡산’ 같은 밀가루 가공공장이 생겨나고 국수공장들이 들어섰다. 일제강점기부터 유명했던 구포국수는 전쟁 이후 밀려든 피란민들에게는 구원의 식량이었다. 구포의 아낙네들은 기차를 타고 부산 시내 전역을 돌며 구포국수를 팔았다. 소면을 만들기에 좋은 적합한 기후도 구포국수가 부산을 대표하는 소면으로 자리 잡게 된 원인이었다.”

광복 어름, 이가네 구포국수도 창업한다. 구포에서 국수공장이 가장 많았을 때는 1960~70년대로 30곳 이상이었다. 구포국수는 90년대부터 고임금과 대기업의 진출로 사양길로 접어든다. 현재 부산 북구 구포 일대의 구포국수공장은 구포연합식품 단 하나뿐. 하지만 구포국수라는 이름으로 국수를 만드는 공장은 경남 김해 등 부산 외곽에 몇 곳 더 있다. 88년 모 국수공장이 구포국수로 상표등록을 해 다른 업자들이 명칭 사용을 못하게 되자 소송을 걸었다. 결국 재판부는 ‘구포국수는 구포의 명물로 역사성이 있는 명칭이므로 단독 소유할 수 없다’고 판시해 구포국수는 만인의 상표가 된다.

이 구포국수가 만들어낸 명물 국수가 많은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건 남포동 ‘할매회국수’와 우암동 ‘내호냉면’이다.

▶할매회국수

현재 남포동 ‘할매회국수’ 자리는 1903년 부산 첫 영화관인 행좌(幸座)가 있던 곳이다. 90년 작고한 김봉금 할매는 영도에서 회국수를 팔다가 60년대 현재 자리로 옮겨온다. 원래 그 자리에는 정종 잔술집인 ‘한잔집’이 있었다. 식당 중앙에 스탠드바 바텐 같은 말굽형 식탁이 있었다. 많으면 30명도 앉았다.

레시피는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항상 ‘가오리회’를 고명으로 올려준다. 이 집은 물국수가 아니고 비빔국수다. 특제 초고추장으로 인해 얼큰해진 입을 위해 양은냄비에 멸치육수를 ‘온육수’처럼 담아준다. 그 육수 맛에 다들 ‘뻑’갔다. 80년대 부산에 온 젊은이들은 묻지마 회국수를 먹고 갔다. 현재 일흔 둘의 맏며느리(김순분)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

▶내호냉면

부산시 남구 우암동에 한국 냉면사에 한 획을 그은 밀면 전문점이 있다. 부산 밀면의 탄생지 ‘내호냉면’이다.

부산의 국수가 북한·일본·부산식과 혼융된 끝에 오늘의 ‘밀면’이 태어나게 된다. 51년 이전 부산의 국수는 그냥 구포국수를 앞세운 물국수(잔치국수·소면) 스타일. 그 속에 북한 실향민이 중구 신창동 고려정, 자갈치 시장 옆 함흥냉면 등 냉면집을 연다.

우암동은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의 소를 검역하고 반출하던 곳. 전쟁 후에는 피란민 정착촌이 건설된다. 그 시장 안에서 내호냉면이 시작된다. 가게 입구에는 창업자 이영순, 2대 사장 정한금 할매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밀면의 정체는 뭘까. 우리가 북한식 비빔냉면의 대명사인 함흥냉면으로 잘못 알고 있는 함경도식 농마면(일명 회국수)과 평양식 냉면, 그리고 부산식 물국수가 결합되면서 파생된다. ‘내호’는 흥남 비료공장 옆 함경도 함흥의 내호(內湖)지역을 말한다. 창업자는 1919년부터 내호에서 ‘동춘면옥’을 운영했다.

함경도의 명물인 가자미식해를 얹은 것이 회국수인데 이게 남포동 할매회국수집에서 가오리버전의 회국수로 변형된다. 동해안권에도 회국수 전통이 남아 있다. 경주 감포항 회국수에는 참가자미회나 병어회, 강원도 속초나 고성의 회국수에는 명태회가 주종을 이룬다.

북한식 회국수용 사리는 감자 전분 100%를 사용하지만 부산 회국수는 밀가루를 사용한다. 그런데 내호밀면은 메밀 대신 밀가루를 사용하고 거기에 고구마 전분을 30% 섞는다.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는 메밀이 갈수록 품귀현상을 보였고 마침 미국으로부터 원조 밀가루가 풍족해서 돌파구 차원에서 밀면을 개발한 것이다.

이후 66년 개금동에서 문을 연 ‘개금밀면’과 70년대 초 가야동에서 영업을 시작한 ‘가야밀면’은 100% 밀가루로 만든 면을 닭고기와 한약재 등을 이용한 육수에 말아 낸 밀면을 만들어 낸다.

▶18번완당

완당은 중국에서 아침식사로 먹는 만둣국의 일종인 ‘훈뚠’(混沌·광둥이나 홍콩에서는 완탐)이 원형이다.

이게 일본으로 건너가 ‘완탕’으로 정착했단다. 얇은 밀가루피에 새끼손톱 크기 정도의 ‘소’를 넣은 작은 만두가 국물에 떠 있는 모습이 햐얀 구름을 닮았다 하여 ‘운당’(雲呑·운탄)으로도 불린 게 부산으로 건너와 ‘완당’이 된다. 서울 ‘명동 교자’와 비슷한데 명동이 완당의 만두가 훨씬 큰 게 차이점.

광복과 함께 귀국한 이은줄옹이 1947년 일본식당에서 배워온 완당을 보수동 포장마차에서 팔기 시작했다. 56년 서구 부용동의 당시 전차역 인근에 ‘18번완당’이라는 상호로 정식 완당집을 개업했다. 그래서 완당이라고 하면 ‘18번완당’이라고 하는 말이 따라붙는다. 72년 부용동 현재의 위치로 이사했다. 창업자는 81년 작고했지만 장남과 손자 이상준씨가 가업을 잇는다. 원조 18번완당 외에 부산에는 중구 남포동과 수영구 남천동, 해운대구 반송동 등에 완당집이 있는데 모두 합쳐도 10곳 미만.

부산사람 입맛에 맞춰 멸치와 다시마로 국물을 우려낸다. 두께 0.3㎜, 가로·세로 7.5㎝, 습자지처럼 얇은 피가 승부처. 글씨가 보일 정도로 얇게 빚는다. 속을 꽉 채운 중국식과는 달리 밀가루피만 보이듯 속도 적게 채운다. 채소는 거의 쓰지 않고 돼지고기나 닭고기 다진 것에 양념해서 사용한다.

아직은 타지에 덜 알려졌다. 완당 취급점이 많지 않은 탓이다. 만둣국 같지만 만둣국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만두피 두께는 1~2㎜, 자연히 속의 크기도 3~6㎝로 크다. 반면 완당은 두께 0.3㎜ 안팎의 아주 얇은 밀가루 피를 사용한다. 그래서 맛이 하늘하늘, 야들야들하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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