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을 잘못 타고났다는 말 칭찬으로 듣습니다”

  • 노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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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29   |  발행일 2017-07-29 제5면   |  수정 2017-07-29
대구에서 활동하는 진보 정치인 3人

흔히 대구를 ‘보수의 심장’이라고 일컫는다. 이 수식어를 두고 설왕설래가 있지만, 대구에서 특정 정당이 오랫동안 일당독점 체제를 유지해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례로 대구의 8개 구·군 기초단체장들은 모두 보수정당 소속이다. 그렇다고 대구에서 아예 진보 정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은 아니다. 풀뿌리 정치의 최전선에 선 이들이 있다. 대구 기초의회 비(非)보수정당 소속 의원들을 만나 그들의 ‘정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정권 차원에서는 여당인 이들도 있지만 지역에서는 여전히 야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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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수 대구 서구의원(정의당)


진보정당 명패 달고 서구서 3선
아직 시민들 마음 제대로 못얻어
상처될 말 그것도 관심이라 생각


장태수 대구 서구의원(45·정의당 대구시당 위원장)은 3선 구의원이다. 대구, 그중에서도 서구가 어떤 곳인가. 진보정치를 하기엔 악조건이 많은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서구는 지난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후보가 대구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84.24%)을 보인 곳으로, 올해 대선에서도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대구에서 가장 높은 54.15%를 득표했다. 어쩌면 가장 변화가 필요한 곳이지만, 가장 변화가 느린 곳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서 정의당 명패를 달고 3선 구의원을 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성과다.

지난 26일 대구 서구의회에서 장태수 의원을 만났다. 정치 입문 계기부터 물었다.

“집이 많이 가난했습니다. 담장도 대문도 없는, 벽돌로 쌓은 벽체만 있던 집에서 살았어요. 부모님은 새벽부터 일하러 나가고, 누나들도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하러 갔죠. 가족들이 일만 하는데도 가난한 게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러다 대학에 갔고, 그곳에서 자연스레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대학 졸업 후 당시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권영길 후보 선거운동을 하면서 현장 정치에 뛰어들었다. 선거를 마치고는 진보정당을 만드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하게 됐습니다. 어린 시절 제 눈으로 봤던 가난이 제가 정치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고,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서구에서 정치를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10년이 넘는 의정활동 기간 동안 기억에 남는 일도 많았다. “사실 매일매일이 기억에 남지만 그중에서 하나만 꼽자면, 달성토성 북편에 공원을 조성했을 때 그곳 경사진 비탈면 무허가 건물에서 자포자기 상태로 살고 있던 할머니를 설득해 다른 전셋집으로 옮기도록 도와드렸어요. 이사 때 할머니가 모아둔 폐지까지 몽땅 옮겨 드렸는데, 그때 정치란 게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보수의 심장’이라 불리는 TK(대구·경북)에서 다른 색깔의 정치를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 상처가 될 만한 말도 많이 들었지만, 그는 그것도 ‘관심’이라며 고맙다고 했다.

“제 지역구 여기저기를 다니면 ‘저 사람 일 잘한다, 없는 사람들 편들어 준다, 젊은 사람이 바르다’ 이런 말씀들을 많이 하세요. 그러면서 한 마디 더 보태세요. ‘그런데 당을 잘못 타고났다.’ 물론 저에 대한 칭찬으로 듣습니다. 또 제가 속한 진보정당이 아직 시민들의 마음을 제대로 얻고 있지 못하구나 하는 반성도 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건, 장태수 개인이 가진 매력보다 정의당이 가진 매력이 훨씬 많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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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태 대구 북구의원(더불어민주당)


민주당 불모지서 정치 시작할때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받기도
구도심의 화려한 부활 일구고파


이헌태 대구 북구의원(53·더불어민주당)은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다. 대구 출신으로 1981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그는 그야말로 ‘뜨거운’ 대학시절을 보냈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하느라 걸핏하면 시위 현장에 있었고,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젊은 청년은 노동자의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사회를 갈망했다고 한다.

가난이 평생의 한(恨)인 옛 어르신들은 자식들이 그저 안정된 직장에서 한평생 근무하는 걸 최고로 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정치·사회적으로 격동기에 대학을 다닌 ‘대구 촌놈’은 스스로 제 인생을 꼬아버린 것일 수도 있다.

졸업 후 지역 한 일간지에서 기자생활을 한 그는 10년 넘는 언론사 생활을 정리하고, 이후 다양한 커리어를 쌓게 된다.

“언론사 퇴사하고 몇년 후에 정부 출연기관인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에 입사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의 아리랑요양원 초대 원장직을 맡았어요. 50만 재외동포 고려인을 위한 최초의 무료 양로원이었는데,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보람되고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정치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2012년 총선에서 야당이던 민주통합당 예비후보로 나섰으며, 이후 대구시당의 대변인을 거쳐 2014년 지방선거 때 출마해 천신만고 끝에 북구의원으로 당선됐다.

“그 시기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다 함께 모두 행복한 정의로운 사회’로 변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게 됐고, 그 변화에 이바지하는 길이 정치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험난한 길의 연속이었다. “2011년 정부기관에 사표를 내고 민주당 불모지인 대구에서 정치를 시작할 때 나름대로 고충이 많았어요. 각오를 단단히 했지만, 상상 이상의 모멸도 겪어야 했죠.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게 다반사였고, 지난 대선 때는 유세차 앞을 지나가며 욕설을 하거나 소금을 뿌리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가 꿈꾸는 미래의 북구는 어떤 모습일까.

“과거 북구는 대구역, 제일모직, 경북도청, 금호강이 어우러진 명실상부한 대구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제게 북구를 위해 일할 시간이 좀 더 주어진다면 ‘금호강 르네상스 시대’를 완성하고, 대구 구도심의 화려한 부활을 일궈내고 싶습니다. 금호강변 레저관광지와 검단 금호워터폴리스 음식거리를 연계해 영남지역 대표 관광명소로 만드는 것도 남은 과제입니다.”

이 의원은 불꽃처럼 살다 간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명언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늘 품고 산다고 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성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을 걷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건 개인적 승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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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구 대구 수성구의원(더불어민주당)


일당 독점탓에 집행부 견제 안돼
대구서만 앞서가는 수성구 말고
전국적으로 앞서는 지자체 목표


강민구 대구 수성구의원(53·더불어민주당) 사무실 문 앞에는 ‘지방분권’이라고 적힌 커다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강 의원은 기자를 보자마자 지방분권 이야기부터 꺼냈다. 지방에서 정치를 하면서 지방분권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고 했다.

‘대구의 강남’이라는 수성구에서 기초의원을 하고 있지만, 강 의원이 태어난 곳은 의성이다.

“초등학교 때 대구로 전학을 와 대학까지 대구에서 마쳤습니다. 제가 전학을 온 40년 전만 해도 대구는 전국 3대 도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대구가 많이 추락했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큰 원인으로 정치적 편향성을 들고 싶어요. 대구가 추락하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고, 돈 없고 백 없고 힘없는 사람을 위해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처음 정치에 입문하게 됐습니다.”

지역정치 입문 후에 우여곡절도 적지 않았다. 지난 대선 이후 더불어민주당이 여당이 됐다지만, 대구에선 여전히 수적으로 크게 약세다.

“2014년 지방선거 운동할 때는 민주당의 당시 당명인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란 말을 못 쓸 정도였습니다. 당에 대한 지역민들의 반감이 크다 보니 ‘2번당 강민구’ ‘김부겸당 강민구’라는 말로 선거운동을 해야 했어요. 어르신들이 ‘빨갱이’ ‘종북’이라고 몰아붙일 때는 ‘해병대 출신 빨갱이 봤심니까(봤습니까)’라며 반문하기도 했는데, 속으로는 많이 슬펐습니다. 또 의정활동을 할 때는 대구 정치가 거의 일당독점이다 보니 집행부 견제가 잘 되지 않는다는 점도 서글프게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풀뿌리 정치가 힘을 발휘하는 순간은 정말 짜릿하고도 보람차다고 했다.

“지역 경로당에 쌓였던 문제를 해결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한 경로당에서 어르신 한 분이 10년 가까이 회장을 하면서 문제가 좀 있었는데, 제가 할머니 한분 한분께 전화를 드려 그동안 쌓였던 부당한 일들을 밝혀냈습니다. 그 일로 수성구 전체 경로당에 변화가 생기게 됐습니다. 또 ‘강민구의 우리동네 뉴스’란 제목으로 주민들에게 문자서비스를 하고 있는데, 이런 소통의 장을 만드니 지난 3년간 묵묵부답이던 분들이 응답해주시기 시작했죠. 뿌듯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수성구를 앞서가는 지방자치의 표본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대구에서만 앞서가는 수성구가 아니라, 전국적으로 가장 앞서가는 지방자치단체를 만들고 싶습니다. 또 대구가 전국 17개 광역시 중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이 가장 많은데, 수성구라고 형편이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분이나 소외된 사람이 없는 ‘더불어 잘 사는 행복한 도시, 수성구’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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