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대구뿌리를 찾는 한학자 구본욱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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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17   |  발행일 2017-11-17 제35면   |  수정 2017-11-17
“두사충은 계산동이 아니라 초정산 아래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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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지향적이고 실리적인 세상과 잠시 거리를 두고 한국 정신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사서삼경의 유학 정신을 토대로 대구유학의 형성과정을 각종 저작물을 통해 알려주고 있는 한학자 구본욱씨. 요즘 매주 수요일 대구향교에서 논어를 가르치면서 대구정신문화 선양에 힘을 쏟고 있다. 이현덕기자 lhd@yeo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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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향교에서 경전 수업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 북구 서변동 서계서원을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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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구 용학도서관에서 주최한 ‘길 위의 인문학’ 강좌를 마치고 대구향교를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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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서원 중건추진위원회 위원들이 정사철 선생 유적지인 금암서당을 방문하였다. <구본욱씨 제공>


한자가 한문으로 건너가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한문이 한학으로 건너가려면 엄청난 시간과 안목과 절대적인 공부의 양이 필요하다. 한학은 글과 글 사이에 숨겨진 광대무변한 의미를 풀어낸다. 예전 양반은 글자 하나를 두고 목숨을 걸었다. 한자는 한글보다 더 복잡다단한 뉘앙스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한글세상. 다들 한학을 운운하지만 대다수 한자 수준에서 멈춘다. 대학교 한문학과 학생은 한문 정도의 실력이라고 보면 된다.

궁극의 깨달음 얻고자 서른에 한학 入門
15년간 사서삼경·주역 등 동양철학 탐구
이후 서양철학까지 아우르려 대학 진학
영남 유학 대표하는 ‘퇴계’로 박사학위

유학이 ‘대구정신’에 미친 영향 연구 매진
‘유림의 임란 창의’ 등 논문 30편·책 7권
구향회 만들어 24개 문중 각종 고서정리
유학의 충절과 맞닿은 대구 정체성 찾아

“대구유학 태동기 인물 조명 부족 애석
의병장 서사원 표지석이라도 세웠으면…
역사 왜곡·오해·편견 바로잡기 위해
앞으로도 대구 관련 사료 찾기에 온힘”

구본욱씨(58). 그는 한학자와 향토사학자의 풍모를 겸비하고 있다. 다들 ‘소장파 한학자’로 불러준다. 그는 공자와 주자를 딛고 현대로 유입된 유학이 ‘대구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연구한다. ‘연경서원과 대구유현 통강록’ ‘대구유림의 임진란 창의와 팔공산 회맹’ 등 그동안 대구 관련 논문 30편과 7권의 책을 펴냈다. 내년에는 그동안의 연구 논문을 묶어 ‘대구유학연구’란 책도 출간할 예정이다.

본관은 능성(綾城), 그의 13대조(구회신)는 임진왜란 때 팔공산 의병으로 참전했고 전쟁이 끝난 후 북구 무태에 정착했다. 고조부(구연우)는 홍문관 학자로 오래 한양에 있다가 갑오경장 후 낙향해 동구 신평동 신덕서당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증조부도 고조부와 같은 길을 걸었다.

서른에 한학에 입문한다. 사서삼경을 익히기 위해 외산 윤한오·낙언 유용우·동계 이진제를 사사한다. 인산 이진수 문하에서는 주역을 배웠다. 운세(점)가 아니라 이치발견을 위한 수단이었다. 이후 45세가 될 때까지 글만 팠다. 동양철학에서 시작된 그의 세상탐구는 잠시 서양철학으로 건너온다. 계명대 철학과에서 서양철학을 팠다. 하지만 1%가 부족했다. 영남대 철학과 이완재 교수의 지도를 받아 ‘퇴계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수기(修己) 이후가 더 문제였다. 세상과의 관계정립이 절실했다. 지금은 유학이 근본이던 조선조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그 영향권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도 없다.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 지적해야 될 것과 선양해야 될 일들이 뭔가를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첫 과제는 ‘대구뿌리(정신)찾기’. 그는 그 대구정신이 유학의 충의·절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봤다. 그 충절은 임진왜란과 국채보상운동 등을 통해 웅건하게 발현됐다.

방황하던 젊은 시절에 비하면 더욱 초롱해졌고 유려해졌다. 요즘 그의 동선의 축은 대구향교에 있다. 매주 수요일 오후 7시부터 논어를 강의한다. 대구교육박물관 전문위원으로 입고되는 전통자료에 대한 감수를 하고 있다. 수시로 특강이 이어진다. 현재 남산동 서재에는 일반 철학서적, 유학 경전 등 6천여권의 장서가 꽂혀 있다.

대구향교 대성전 앞 만추에 다다른 은행나무 아래에서 그를 만났다.

▶지금은 아주 편안해 보이는데 젊은 시절 참 많은 알음앓이를 한 것 같다.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웠지만 그때는 문의를 정확하게 몰랐습니다. 젊은 시절 뭔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고 싶었는데 사면초가였어요. 돌파를 위해 철학의 동양과 서양을 동시에 거머쥐려 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도 불경도 만족이 안 됐습니다. 저한테는 주역이 약인 것 같았어요. 그걸 배우고 난 뒤 제 방황도 종지부를 찍습니다.”

▶사서삼경에서 특히 감명받은 구절은.

“논어 태백(泰伯) 편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증자가 말하기를, 선비는 포용력이 있고 강인해야 할 것이니 책임이 중하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후에야 그칠 것이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인데 그 말을 가슴에 품자 비로소 제 문리가 점차 밝아옴을 느꼈습니다. 동구 신암동 강남약국 근처에 ‘중정서당’이 있었는데 거기에 제 사부인 이진수 선생이 계셨습니다. 당시 젊은이는 나밖에 없었어요. 대여섯 명 주역을 배웠는데 다들 어르신이었습니다.”

▶결혼도 하고 돈도 벌어야 하는데…, 한학 독행이 어떻게 가능한지.

“현실을 완전히 무시한 건 아니었습니다. 46세에 ‘고려 두문동 72현’에 대한 논문을 냅니다. 계명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대학원으로 바로 가지 않고 잠시 영신고 윤리선생으로 일했습니다. 꼭 해야 될 일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한학이었죠. 10여년 동창회 등 사회적 친목활동을 일절 중단했죠.”

▶제일 먼저 한 사회적 활동은 뭔가.

“대구를 대표할 만한 지역 24문중의 젊은 사람들을 규합해서 뭔가 일을 해보고 싶었죠. 그 결실이 바로 ‘구향회(邱鄕會)’입니다. 대구의 대표적 문중이라 함은 조선 중기부터 대구 향안에 기재된 문중을 의미합니다. 가장 역점을 둔 건 방만하게 관리되고 있던 문중의 각종 고서정리였습니다. ”

▶유학 정신은 크게 정자와 서원 등을 통해 발현되는데 대구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 메이저급 정자를 정리해 달라.

“팔공산과 금호강을 왕래하며 강학한 송담 채응린이 1561년 대구 양대 정자랄 수 있는 ‘압로정’과 ‘소유정’을 북구 검단동 왕옥산 자락에 짓습니다. 두 정자는 현재 경상고교 북동쪽 금호강변에 앉아 있는데 둘은 30m 떨어져 마주 보고 있었어요. 관찰사 12명, 대구부사 12명, 암행어사 등이 이 정자 관련 시문을 남겼고 송담이 그걸 ‘소유정제영록(小有亭題詠錄)’으로 묶을 정도였으니 대구 대표 정자랄 수 있죠. 제가 곧 이 책에 대한 해제본을 펴낼 계획입니다. 아쉽게도 두 정자는 모두 임진왜란 때 화실됩니다. 지금 남아 있는 건 정조 때 중건된 압로정뿐입니다. 이 밖에 달성군 하빈면 ‘화목정’, 동구 서변동 ‘환성정’, 달성군 다사읍 낙동강변에 있는 ‘아금정’ 등도 대구 사람이라면 알아야 되는 정자입니다.”

▶대구유학 학맥도를 알려달라.

“대구유학은 남명 조식과 함께 영남유학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을 축으로 매암 이숙량, 계동 전경창, 한강 정구, 송담 채응린, 임하 정사철, 그 아래로는 모당 손처눌, 태암 이주, 괴헌 곽재겸, 연정 류요신, 낙재 서사원, 낙애 정광천 등입니다. 제1기 유학자는 계동, 송담, 임하, 제2기는 낙재와 모당 등 6명, 제3기는 무려 137명으로 폭증합니다. 제1기 유학자의 흐름은 제가 각종 논문으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대구유학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파고든 연구자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은데.

“대구학의 파트는 여러 갈래일 겁니다. 그런데 대구정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로 관통해서 연구하는 분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구를 대표할 만한 서원과 서당은 어떤 게 있는가.

“서원으로는 단연 1563년 건립된 동구 지묘동(추정) 연경서원, 서당은 강창교 근처 산중턱에 있는 ‘이락서당’을 거론할 수 있죠. 현재 중건 계획을 수립 중인 연경서원은 대구유학정신의 집합소입니다. 대구유학 르네상스를 개창한 이숙량과 전경창이 설립을 주도합니다. 이 서원은 몇 가지 특징이 있어요. 관이 주도한 게 아니고 민이 주도한 겁니다. 이 서원에는 사당이 없습니다. 선현을 추숭하는 제향보다 강학에 중점을 뒀기 때문입니다. 이 서원은 아쉽게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문에 1871년 훼철됩니다. 저는 2012년 ‘연경서원 통강록’을 발굴해 발표했습니다. 이 통강록은 대구 옻골 경주최씨 백불암 최흥원 종가가 400년간 소장한 자료로 1605년부터 8년간 대구지역의 선비 125명의 행적과 관련 강의 내용의 전모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락서당은 어떤 곳인가.

“한 개인이 지은 게 아니라서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순천박씨, 밀양박씨, 광주(光州)이씨, 전의이씨, 성주도씨, 달성서씨, 광주(廣州)이씨, 일직손씨, 함안조씨 등 지역을 대표한 아홉 문중의 합심작입니다. 이 서당은 조선 정조 22년, 당시 향토의 문풍진작을 주도했던 한강 정구와 낙재 서사원이 학문과 도의를 가르치기 위해 건립한 강학소(講學所)이기도 했죠. 다음달에 금호강의 선유 및 누정문학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5인 공저인데 고산서당, 아양루, 압로·소유정, 세심정, 화수정, 환성정, 이강서원, 용호서원, 이락서당, 부강정, 아금정과 금암서당, 화목정 등 정자당 10~20수를 선정해서 번역수록할 겁니다. 금호강이 배제된 대구풍류문학은 존재할 수가 없어요.”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대구의 정체성은 뭔가.

“교육도시답게 남다른 ‘교육정신’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나라를 사랑하는 ‘충의 정신’입니다. 임란 때 연경서원에서 공부한 유생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의병으로 출군합니다. 후학들은 그런 사실을 세세하게 모릅니다. 그래서 임진왜란에 대한 세미나를 2014~2016년 3번 개최했고 그걸 단행본으로 묶었습니다. 이를 통해 초기 팔공산 부인사가 대구 의병 결성지란 점, 그리고 1597년 3월3일 정사철과 서사원이 의병대장으로 팔공산에서 회맹했다는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서사원이 그 과정을 일기로 기록해놓았기 때문에 상세하게 알 수 있는 겁니다. 그 기록 때문에 대구에 왜군이 처음 등장한 날도 1592년 4월21일이란 걸 알게 됐죠.”

▶덧붙일 말씀은.

“앞으로도 대구 관련 사료 찾기에 힘을 쏟겠습니다. 그런 사료가 역사에 대한 왜곡, 오해, 편견, 와전 등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게 제 본분이란 생각을 합니다. 임란 때 조선에 귀화한 이여송 장군의 참모인 두사충 정보도 잘못된 게 많아요. 관련 문헌을 거의 봤는데 그가 계산동 뽕나무 골목에 살았다든가, 경상감영자리에 먼저 자릴 잡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가 초정산 아래 정착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초정산은 앞산의 한 갈래죠. 중구청 주도의 근대골목사업도 꽤 성공적이더군요. 그런데 너무 근대에만 치중하는 것 같습니다. 대구에 근대만 있는 게 아닙니다. 대구유학의 태동기 인물도 조명했으면 좋겠습니다. 동산병원 근처 구암서원 부근에 팔공산 의병장이었던 서사원의 표지석부터라도 세웠으면…. 또한 요즘 인성이 말이 아닌데 향교유치원도 개원했으면 싶습니다. 연경서원도 더 문화적으로 복원됐으면 합니다. 고택음악회도 있듯 우리 유학이 힙합문화까지 수용할 수 있어야겠죠. 선비의 최대 미덕이 포용력 아닌가요. 모든 가치와 통섭하는 유학, 그게 22세기 유학의 화두일 겁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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