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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 바위 앉은 옥계계곡 언덕 古松 군락지, 1㎞ 힐링탐방로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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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춘호기자
  • 2018-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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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옥계 솟대공원 조성 송산 이광웅

1968년 꿈속에서 만난 두꺼비바위를 기적적으로 만났고 그걸 기념하기 위해 영덕 옥계계곡 한 언덕에 천년송과 두꺼비바위를 위한 마암루를 지은 송산 이광웅. 그는 경북고 출신으로 2·28민주운동 주역 중 한 명이고 훗날 약국을 경영하며 교육사업가로 변신했다. 고송이 군락진 솟대공원에서 말년을 유유자적 보내는 옥계계곡 지킴이로 살고 있다.
온갖 병을 갖고 말년에 입주한 솟대공원 송산재 앞에서 포즈를 취한 송산.
2·28민주운동 당시 경북고 2학년이었던 송산은 데모대 중 유일하게 2박3일 경찰 내 유치장에 있다가 풀려났다. 당시 일간지에 게재된 송산이 경찰차에 압송되는 장면.
65그루의 아름드리 고송 천년송바위, 마암루, 66계단, 99계단, 잔디광장, 암벽구름다리, 옥계장 등 1㎞ 탐방로를 가진 솟대공원. 자연보호구역에 있어 시설 보호 차원에서 아직 일반인에겐 제한적으로 공개된다.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다. 지금 내 심장과 폐는 정상인의 15% 정도만 가동한다. 휠체어 도움을 받아야 한다. 디스크수술도 받았고 중중 당뇨병까지 품었다. 벌써 6차례 119 긴급출동을 받았다. 내 잠자리를 지켜주는 두 가지 모순적인 수호천사가 있다. 하나는 산소호흡기, 그리고 또 하나는 담배다. 아내가 알면 기겁할 것이다. 허, 허, 허~. 산소와 담배, 약과 독, 난 그 모순을 동시에 사랑한다.

한때는 폭주기관차였는데 이젠 ‘폐선’이 된 것 같다. 늙음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글로 형언하기 힘든 ‘울분’ 같은 게 고여 있다. 그 울분 역시 삶의 엔진 아닌가. 내게는 그 울분이 뜨겁지 않고 늘 차가웠다.

내 이름은 이광웅(李光雄·77). 생각해 보니 너무나 허세 가득한 성명이다. ‘빛 같은 사내’로 폼나게 떵떵거리며 살아보란 말인데…. 조선조 양반사회의 잔재일 수도 있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라는 부모의 염원도 묻어 있다. 사내스러움과 빛남, 그 이면에 숨겨진 숱한 위선과 그 허장성세를 향해 난 자주 회초리를 든다. ‘떵떵거린다’는 것. 얼마나 혹세무민하는 짓인가. 그런데 한국의 그 잘난 사내들의 유전자 속엔 지금도 여전히 떵떵거림과 군림하려는 욕망이 들끓고 있다.

불끈 움켜쥔 내 주먹을 본다. 주먹 크기는 고교 2학년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 178㎝. 75㎏. 학창시절, 난 나름대로 거구였다. 1960년 2월28일. 그날 난 경북고 2학년5반 학생이면서 시위대의 일원이었다.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각. 총학생회장 격이었던 이대우 주도로 우린 주먹으로 하늘을 두드리면서 800여명의 학우와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우르르 몰려 나갔다. 별로 무서운 것도 없었다. 우리가 잃을 건 청춘의 뜨거움 정도랄까. 이대우는 내게 1학년의 인솔을 부탁했다. 난 대오 이탈 방지 임무를 맡았다. 대열은 현재 경상감영공원에 있었던 경북도청 앞에 도착한다. 하지만 처음에 두꺼웠던 대열은 고작 수십 명으로 홀쭉해졌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당시 도지사가 ‘어린 놈들이 감히 데모를’이란 표정으로 마구 때리며 윽박질렀다. 하지만 학생의 결기는 때론 무모할 정도로 협상불가. 유달리 다부지게 생긴 내가 표적이 된다. 한 경찰이 ‘내가 주동자’라며 제압했다.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본 당숙(이원식).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집으로 곧장 달려가 대짜 청주 한 병 반을 그대로 마셔댔다.

남부럽지 않은 방랑·방황의 청춘
경북고 시절 2·28민주운동 광기·울분
경찰에 연행…당숙 이력문제 3일 감금
6·25 양민학살 유가족회 조직이 화근

약대 간신히 입학, 포항에서 약국 오픈
6년간 세화여고 이사장 경력…몸 피폐
산소호흡기·담배, 내 모순적 수호천사

옥계계곡 이상향으로 가다
전국에서 모은 맷돌 3천개 탐방로 깔아
지원 한푼 받지않고 모두 사비로 조성
두꺼비바위 때문에 천금도 아깝지 않아
마음 많이 다친 부모들 위한 힐링공간



◆ 감금된 천재였던 당숙

‘광기’와 ‘울분’. 그건 때로 무차별적이다.

특히 학생의 의기로움도 사후 과장되기 일쑤다. 난 2·28민주운동도 다소 그렇다고 본다. 누구의 2·28이 아니라 모두의 2·28이 아닌가.

해프닝인 양 연행됐던 학생 모두 당일로 훈방 조치됐다. 하지만 나만 2박3일 감금된다. 정신을 차렸다. 비로소 ‘이성’이 작동됐다. 극도의 공포감이 날 집어삼키고 있었다. 설상가상 신원조회 결과 당숙의 이력이 문제가 된다.

그분은 당시 한국적 인식으로는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천재적 멀티플레이어였다. 양의사, 한의사, 서지학자, 수학자, 사회비평가, 어학자, 정치만화가, 조각가, 그리고 문인까지 겸했으니. 마치 8가지 재능을 고루 가져 ‘팔능거사’로 불렸던 일제강점기 영남서화계의 거봉이었던 석재 서병오의 다재다능함을 연상시켰다. 당숙은 천재화가 이인성의 유작전, 추사 100년제도 추진했다. 1957년에는 한국 에스페란토어학회 조직선전국장이 된다. 노동신문 주필로 ‘세계과학문화사연표’란 저서를 출간할 정도였다. 경계를 알 수 없는 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능력과 실력은 남북이 대치된 냉전체제 아래선 단칼에 묵살된다. 당숙모는 6·25전쟁 당시 양민학살사건으로 돌아가셨다. 1960년 당숙이 앞장서 ‘피학살유가족회’를 조직한 게 화근이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은 당숙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처음엔 사형선고였으나 무기징역 중 풀려났다가 1977년 돌아가셨다. 그 피가 그의 외아들인 이광달에게도 흘러들어간다. 유능한 조각가인 재종 동생은 이념공화국 밑에서 자기 예술혼을 제대로 피워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 2·28 이후 낭인시절 찾아와

내가 경찰차에 강제로 태워지는 광경은 우연찮게 지역 신문에 실리게 된다. 경찰은 내 신분을 재삼 확인한 뒤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나는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학생들이 나서야 자유당이 망하고 침묵하면 나라가 망한다’란 요지의 글을 적었다. 또 실신할 정도로 맞았다. ‘여기 있던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당부를 듣고 귀가했다.

상처 난 몸을 이끌고 대봉동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소식을 접한 아버지가 포항에서 부리나케 달려와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포항에서 삼성한의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우리 집안은 이래저래 한의원과 관련이 많았다. 조부는 고려예식장 근처에서 ‘영천한의원’을 여셨다.

이대우는 뒤숭숭한 정국을 뒤로하고 김천 청암사에서 피폐해진 심신을 먼저 달래고 있었다. 그가 날 불렀다. 청암사에서부터 내 낭인시절이 시작된다. 5·16이 터진 바로 그해, 우린 모두 대입고사에 올인해야 될 처지였다. 2·28과 대학입학시험. 재즈와 트로트처럼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의 착잡한 심사를 조용한 암자가 달래줬다.

하지만 난 어디가나 트러블메이커. 청암사는 나 때문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평행봉을 하는 스님에게 다가가 ‘스님이 왜 몸단련에 그렇게 집착하느냐’고 대들기도 했다. 나와 함께 온 두 친구는 사회로 나갈 준비를 차곡차곡 잘 하는데 나는 그 대열에서 자꾸 멀어졌다. 2·28학우들은 그 항거의 시간을 쉬 잊어버리고 출세의 대열로 달려갔다.

결국 나는 절에서 퇴출당했다. 자정 무렵이었다.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단돈 100원밖에 없었다. 집으로 가는 여비조차 없었다. 징병용 트럭, 열차 무임승차 등을 통해 포항으로 잠입했다. 우리 가문에선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난 세기말 퇴폐적인 정서에 함몰되어갔다. 시인 보들레르와 랭보 등이 좋았다. 20세기 대표적 탐미주의자였던 오스카 와일드, 염세철학가 쇼펜하워, ‘신은 죽었다’의 니체 등의 언설에 물들어간다. 허무주의는 실패자의 최대 위안이었다. 내 1970~80년대는 남부럽지 않은 방랑과 방황의 나날. 그땐 그게 유일한 돌파구였다. 출세의 길에서 가장 멀어졌다. 그래서 난 그 시절을 ‘파락호(破落戶)’ 시절이라 규정한다. 그런 내 어둠 속에도 얇다란 볕이 찾아들기 시작한다.

◆ 학원이사장 시절

나는 영남대 약대에 겨우 턱걸이 했다. 자격증을 딴 후 1968년 포항에서 두꺼비약국을 오픈한다. 솔직히 밥벌이 수단이었다. 1990년대 초. 내 허무도 점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바닥난 내 허무를 딛고 피운 꽃이 바로 포항 우현동 세화여고다. 최악의 학력을 자랑하는 여고를 스타덤에 올려주고 싶었다. 난 ‘학력우선’이라고 선언했다. 싹수가 없어 보이는 학생에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직업)에 목숨을 걸 수 있도록 교육시스템을 변혁시켜나갔다.

당시 내 욕망은 온통 ‘학생 만들기’에 집중된다. 일단 골치 아픈 내 자식부터 바꾸기 시작했다. 난 내 아들을 공교육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엄격하게 홈스쿨링했다. 내가 정신차린 건 장남 때문이다. 어느 날 내 방황을 장남이 흉내내며 무단가출까지 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아들을 위해 대한민국 초·중·고 교과서를 하나씩 독파해나갔다. 최하위권의 둘째도 자퇴시켜 1년간 집중지도했다. 난 한때 포항 지역에서는 족집게 가정교사로 더 유명했다. 그런 와중에 폐교 위기에 처한 경포여고를 인수, 세화여고로 개칭하고 명문고 만들기에 돌입한 것이다. 약국의 일부 약은 학생용이었다.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사용했다.

학교 한 귀퉁이에 거처를 마련했다. 집에 가지 않고 거기서 숙식을 해결했다. 사재 15억원을 들여 기숙사도 지었고 상당한 크기의 부동산도 재단에 헌납했다. 그리고 항상 문제가 됐던 친인척을 절대 교직원으로 채용하지도 않았다. 휴일 없는 나날이었다. 툭하면 실력 테스트였다. 교사들도 죽을 지경이었다. 대학 진학 자체가 어려운 학교에서 200여 명의 학생을 대학에 진학시킨 것이다. 하지만 전교조는 날 시대착오적 인물로 봤다. 소송까지 벌어졌다. 내 실험은 거기서 멈춘다.

◆별유천지비인간…옥계에 들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세화여고 시절은 그렇게 6년 만에 끝이 났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이상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기가 바로 솟대공원이다. 난 이제 영덕 옥계계곡에서 지친 이광웅을 복원 중이다. 맘을 많이 다친 세상의 모든 부모를 위한 힐링공간을 만든 것이다. 청송 얼음골 그리고 포항 죽장계곡과 맞물린 옥계계곡. 그 물은 오십천을 통해 강구 앞바다로 들어간다. 이 계곡에는 1607년 손성을이 기거한 침수정 등 37경이 있다. 난 그것의 인문학적 연대기를 편집했다. ‘영남 선비의 산수유람기(山水遊覽記)’란 글을 계곡한테 헌정했다. 서예를 유달리 좋아했던 난 내 나름대로 ‘귀거래사(歸去來辭)’ 의식을 단행한 셈이다. 귀거래사. 중국 진나라의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지은 글이 아닌가. 나는 그런 심정을 여기에 초석으로 잡았다. 그리고 북송의 시인인 소동파의 ‘적벽부(赤璧賦)’ 정신으로 삶을 마감할 것이다. 밤경치를 위해 절묘한 위치에 경관등을 설치했다. 낮과 밤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잘나가는 시절의 명함은 잘나갈 게 없는 시절엔 ‘낙엽’처럼 사라진다. 숱한 명함 다 사라지고 지금은 나란 명함 한 장뿐인 것 같다. 그게 훗날 내 ‘명정(銘旌)’이겠지. 그래도 미련이 있다. 가족에 대한 정이다. 이념보다 더 심원하고 무서운 가족. 늘 멀고 아픈 자리에만 뒀던 아내를 향한 사모의 정. 잔정 없는 남편에게도 그런 맘이 있다는 걸 고백해 보는 이슥한 옥계의 밤이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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