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운동가에서 돌고돌아 조리사의 길…‘밥’위해 ‘법’이 있는 것이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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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09   |  발행일 2018-11-09 제34면   |  수정 2018-11-09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신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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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서면 신창일은 불덩이 같은 웍을 종일 놀려야 하는 중식당 오너셰프. 온몸이 화상투성이지만 그는 그걸 가족과 사회를 향한 ‘희망의 꽃’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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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이념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지상요청이다. 신창일이 운동권에서 정치인으로 건너가지 못하게 하고 중식당 조리사의 삶을 살도록 한 것도 어쩜 가족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책상 앞에는 그런 가족사진이 늘 부적처럼 앉아 그를 수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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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전문서점인 신우서적을 운영했던 시절의 추억을 상기시켜 주는 탐독서들.

강원도 화천군에서 태어났다. 초등 3학년 때 고물수집상인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와서 비산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난 부모와 그렇게 잘 지내지 못했다. 툭하면 또래와 패싸움이었다. 부모도 서로 다퉜다. 집에는 온기가 바닥난 상태였다. 그래서 난 계속 불량스러워졌다. 어느 날 60명 중 59등을 했다. 나도 한 공부 한다고 믿었는데…. 스스로에게 충격이었고 실망했다. 유신학원에 들어가 벼락공부를 해서 겨우 특설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경북대 국문학과에 들어갔다. 그게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당시 경대학보사는 나름 저항의 정점에 있었다. 당국에서 이런 학보사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적잖은 해직기자가 생겼다. 그들이 만든 ‘예목’이란 서클이 있었다. 통계학과 김동국과 내가 공모해 광주학살을 일으킨 전두환을 처벌하자는 벽서를 적으려다가 예비검속됐다. 예목이 와해되고 그걸 후배들이 부활시킨 게 ‘광장’이다. 당시 경북대 서클 중 가장 강성은 ‘여명’이었다.

벽서사건 때문에 학교는 발칵 뒤집어진다. 동아백화점 맞은편 지하 대공분실로 끌려가 1주일 정도 고강도 고문을 받았다. 계엄령 치하라서 난 군사재판을 받았다. 1년6월 징역에 집행유예 2년 선고를 받는다. 물론 학교에서는 제적된다. 훗날 학생기록부를 뒤져봤는데 소견란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품행불량, 개전의 정이 전혀 없음.’

당장 북부·남부경찰서 형사가 내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매일 그림자처럼 감시하기 시작한다. 난 8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에 들어갔다. 아버지의 배려였다. 당신은 내가 훗날 무슨 장관이나 법관이 될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제적이라니. 아버지에겐 그게 날벼락이었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나와 의절했다. 인사를 해도 외면했다.


고물수집상 부친따라 대구 정착
경북대 학보사 시절 인생터닝 포인트
전두환 처벌 벽서 고강도 고문
계엄령 치하 군사재판 1년6월 징역
내게 기대 컸던 아버지와는 의절

美 문화원 폭파사건, 운동권 검거령
공장서 일하다 손가락 절단 사고
산재 보상도 못받고 감옥행
새로운 세계관 선배들의 사상 토론
감옥은 이념 재정비한 공부방

대통령후보 경선 이해찬라인 참여
문재인 대구선거캠프 선대위원장
박은수 의원 보좌관 국회 입성
능력 한계 느끼고 다시 대구로…

생계로 시작한 가구사업 결국 빚잔치
일순간 일용직 노동자로 추락

새로운 노동현장 중식당과 인연
단골 대다수가 청년백수
세상 향해 뿜어내는 그들의 불만
독재타도 분노와 다르지 않을수도



난감한 나날이었다. 갈 데가 없었다. 당시 운동권의 사랑방 같았던 동아쇼핑 옆 곡주사에 막내로 출근하다시피했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대명동 아버지 집 2층에 있었다. 갑갑해 죽을 것 같아 주무시는 아버지 머리맡에 부모님전상서를 놓고 그대로 가출해 버렸다. 곡주사로 오면 천국이었다. 내 단짝은 인혁당 사건으로 사망한 송상진의 아들 송철환이었다. 영남대 공대 출신인 그는 나와 죽이 정말 잘 맞았다.

이에 앞서 난 북구 침산동 3산단에 위장취업해 노동운동을 전개한다. 경북대·영남대·계명대가 손을 잡고 노동야학을 공동으로 추진해 나간다. 당시 지역에는 3개 노동야학이 있었다. 원래 ‘메아리’라는 게 있었는데 이게 1979년말 해체되면서 3개로 분파된다. 종로 가톨릭노동자회관 지하에 ‘생활야학’, 내당동 내당교회 내 ‘다은야학’, 이현동 ‘만남야학’이다. 나는 생활야학과 손을 잡는다. 선배가 군대를 가면서 내게 전권을 위임했다. 난 졸지에 교장이 된다. 81~83년 거기서 치열하게 강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근로기준법, 노동쟁의조정법 등 노동법에 대한 운동권의 식견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나는 이런 저런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면서 안목을 키워나갔다. 막스의 자본론, 자본주의 관련 경제사상서 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창작과비평’, 함석헌이 간여한 ‘씨알의 소리’ 등 비판적 잡지도 곁에 두었다. 토론에 밀리지 않기 위해 돌아서면 새로운 책을 정독해야만 했다.


미문화원 폭파사건에 연루

82년 부산에서 큰 사건이 터진다. 문부식과 김현장이 미문화원에 불을 지른다. 83년 대구 미문화원도 폭파사건을 당하게 된다. 공안당국이 발끈했다. 전국 학원가에 운동권 총검거령을 내린다. 공안정국이 도래한다. 이근안 같은 고문전문가가 대구로 내려왔다. 나도 그들의 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굵직한 운동권 200여명이 연행된다. 나는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손가락이 절단되는 대형사고를 당한다. 산재 보상도 못 받고 공안이 짜놓은 시나리오에 엮여져 감옥으로 가게 된다. 나를 포함해 함종호, 안상학, 우성수, 손호민, 박종덕, 이영우 등이 구속된다. 난 거기서 1년 6개월을 보내면서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선배를 만날 수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 세상을 본 국면이었다. 30년 이상 미전향장기수, 남민전 관계자, 심지어 문부식까지 거기서 만나게 된다.

자본주의의 본질, 그리고 제국주의의 속성, 좌익과 우익, 보수와 진보의 갈등, 남북한의 갈등, 그리고 투쟁과 평화의 공존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사상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감옥에 있는 게 아니라 독서실로 공부하러 온 것 같았다. 실제 감방은 운동권에겐 이념을 재정비할 수 있는 일종의 ‘공부방’이었다. 내 시야와 안목이 얼마나 편협한가도 절감했다. 매일 선배들이 토론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비판했다. 하지만 험담과 비난은 없었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려면 일본어를 해야 되고 그 좋은 책이 ‘문예춘추’라 해서 그것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서점 주인이 되다

내 머리는 온통 이념으로 무장돼 있었다. 하지만 생계 항목은 ‘꽝’이었다. 이념으로 무장하면 저절로 살아지는 줄 착각했다. 이념만 부자였지 일상은 가난뱅이였다.

어느 날 시내 아카데미 극장 근처에 있었던 사회과학 전문 신우서적의 주인이 된다. 한때 신우는 하늘북서적, 마가서적 등과 함께 이념 서적 전문점으로 유명했다. 원래 신우는 일반 서점이었는데 83년 사회과학 전문서점이 된다. 내가 그 서점을 차지하게 된 건 아내 때문이다. 당시 아내는 그 서점 주인이었다. 내가 감옥에 간 걸 알고 내가 읽을 만한 책을 감옥에 넣어주었다. 그 인연으로 그녀는 내 아내가 된다. 하지만 서점은 페레스토로이카(개혁)를 주창한 러시아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등장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시들해져간다. 이념의 시대가 자본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서점은 호구지책이었다. 서점 옆에 북카페 ‘사림’도 열었다. 거기는 운동권의 쉼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참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장애를 앓는 딸 뒷수발이 우선이었다. 시위대한테 미안했다. 그래서 외상도 해주고 막걸리를 받아주기도 했다. 늘 운동과 생계 사이에서 방황했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로 했다.

88년 총선 즈음에 한겨레민주당이 창당되고 이강철이 대구 중구에서 국회의원 선거를 할 때 그를 돕게 된다. 2002년 대구참여연대 예산감시운동본부실행위원, 2005년 대구참여연대 집행위원장, 2007년에는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후보 경선 때 이해찬 후보측에 섰다. 나는 이해찬라인이었다. 2017년에는 문재인 대구선거캠프 공동선대위원장도 맡았다. 이 과정에 인혁당재건위 명예회복 및 진상규명, 5·18민중항쟁대구경북연대 공동운영위원장 등을 맡게 된다. 하지만 직접 출마는 하지 않았다. 나는 킹메이커이지 킹은 아니라 여겼다. 난 ‘효모’다. 선배와 후배를 돕는 것에서 보람을 느낀다.

2008년 장애인 몫으로 18대 국회에 입성한 대구 출신 박은수 의원(대통합민주신당)의 보좌관으로 국회에 들어가게 된다. 국회의 입법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상과 현실이 법에 의해 어떻게 조정되는가를 지켜보면서 보좌관으로서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2009년 대구로 내려온다. 이에 앞서 91년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다. 2개월간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부끄러웠고 참담한 심경이었다.


가구회사를 운영한다

생계의 절벽 앞에서 더는 피할 데가 없었다. 처남이 운영하던 가구회사에 들어간다. 영업, 사무 등 가구와 관련된 여러 비즈니스를 배워나갔다. 서울 강남 유명 백화점을 찾아 자주 디자인을 벤치마킹하러 다녔다. 나름 안목이 생긴 2002년 대구 EXCO 지하에서 ‘전망좋은방’이란 가구점을 오픈하게 된다. 하지만 모 기업인 <주>데코가 망해버린다. 나도 덩달아 망할 수밖에 없었다. 적잖은 빚을 떠안게 되었다. 빚잔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일순간 일용직 노동자로 추락했다. 매일 아침 건설현장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서부정류장으로 나갔다. 고물상, 재활용품점 등에도 취직하고 법인택시도 몰아봤다. 생계에는 별로 보탬이 되지 않았다. 다시 한 식당의 전속 배달원이 된다. 오토바이를 타고 하루 40~50번 배달을 나간다. 월급은 130만원.

난 거기서 막장인생을 정말 많이 봤다. 아내한테는 트럭운전한다고 둘러댔다. 식당과 음식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2011년 식당을 하나 운영하게 된다. 난 그때까지 요리에는 꽝이었다. 열심히 한 덕분에 1년 만에 빚도 갚고 아파트로 이사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또 큰 사고를 당한다. 배달을 도와주다가 불법유턴하는 차량에 치여 허벅지가 박살난다. 내가 입원하니 수익이 날 수 없었다. 문 닫고 3개월 목발을 짚고 다녔다. 그런데 연이어 골수염까지 덤벼든다. 100일 이상 입원한다.

‘신창일, 야! 네 삶은 왜 이렇게 기구해?’ 뼈가 덜 붙은 상태에서 새로운 식당을 찾아나섰다. 아는 후배 중에 중식의 대가가 있다. 그로부터 중식을 전수했다. 고추잡채, 탕수육, 깐풍기 등에 집중했다. 3년 전 상인동에서 깐탕이란 중식당을 오픈했다. 단골 대다수가 청년백수들이다. 난 주방에서 그들이 세상을 향해 뿜어내는 불만을 듣는다. 내가 독재타도를 외치던 그 시절의 분노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난 단골이 자기 길을 제대로 갈 수 있게 정말 계절이 담긴 정직한 음식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러니 좋은 식재료에 승부를 걸 수밖에. 하지만 그럴수록 이윤은 박할 수밖에 없다.

지인들은 내가 이런 열악한 노동현장에 노출돼 있다는 걸 신기해 하면서도 안타깝게 여긴다. 그래도 신창일인데…. 하지만 난 ‘신창일이라서 지킬 수 있는 자리’라고 독백한다. 사회운동이란 것도 결국 밥을 제자리에 찾아주는 것 아닌가. 밥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다. 그래, 난 그 밥의 전위대인 셈이다.

난 운동가에서 조리사로 돌아왔다. 돌아보니 가족을 위해 놀러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깜짝 놀랐다. 서울에 있는 중증장애인 자립지원센터 팀장이 된 딸이 그걸 알고 아내와 나를 위해 호텔을 예약해 버렸다. 그래서 얼마 전 30년 만에 처음으로 제주도로 2박3일 가족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내가 제자리로 온 모양이다. 지고 있는 단풍이 보이니깐.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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