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섬유와 흥망성쇠 같이한‘미싱 산증인’…160년 역사 美 싱거미싱은 家寶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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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07   |  발행일 2018-12-07 제34면   |  수정 2018-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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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미싱의 역사를 새로 적어나간, 160여년 역사를 가진 골동품 같은 미국산 싱거미싱은 곽병문 사장의 가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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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묵은 미싱을 들고 가게 문 앞에서 포즈를 취한 사장의 표정에서 ‘은퇴불가’란 말이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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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이상 미싱을 옮기고 고치고 조립하느라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사장의 갈라진 손. 새삼 외길인생의 숭고함 같은 울림이 전해진다.

내 미싱은 물 만난 고기격이었다. 과거의 옷이 새로운 옷으로 변하는 그 분기점에 대구섬유산업의 전성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바야흐로 산업시대. 인구가 폭증되고 서양복식문화가 도래했다. 미싱 없이 그 엄청난 의복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맨처음 미싱집에 왔을 때 삼성그룹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제일모직이 1954년 9월15일 태어난다. ‘부자=섬유공장 사장’이란 등식이 성립되기 시작한다. 그 공장에서 나온 각종 천은 양장점, 양복점, 일반 의류공장 등으로 흘러들어가 옷이 되어나왔다. 모르는 사람들은 미싱은 모두 같은 줄로만 안다. 아니다. 내가 60년 이상 미싱을 접해왔지만 아직도 보지 못한 미싱이 많다. 돌아서면 새로운 미싱이 나온다. 일반 의복용, 우산용, 니트용, 지퍼용, 단추구멍용, 오버록(오바로꾸)용, 스카프용, 청바지용, 구두용, 침구류용, 천막용, 자수용, 텐트용, 매트용, 소파용, 신발용, 쌀포대용, 장갑용…. 특수용까지 합치면 무려 3천종이 넘는다. 지금도 미싱의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미싱이 많이 유통되자 영진·모모·멍텅구리 등 지역의 유명 양복점과 오스카 등 유명 양장점이 판을 넓혀나간다. 골목마다 들어찬 편물점과 수예점 등에서도 미싱소리가 들렸다. 어느 날부터 미싱소리로 하루가 밝아왔다. 한밤에도 미싱은 돌아갔다. 하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기술로 만든 국산 미싱은 만날 수가 없었다. 거의 미국·영국·일본산이었다.


서양복식문화도래 미싱 수요 폭발적
50년대 美·英·日 장악, 국산은 전무
대구 최고 미싱기술자 꿈 이루려 상경
하루하루 배고픔 견뎌가며 기술 배워
3년만에 고향 돌아와 대성미싱 취업

삼성 모태 제일모직 창립…섬유 호황
양복점·양장점 밤낮없이 미싱 소리
65년 출시 국산 ‘부라더 미싱’대중화

남다른 마케팅 감각 더해 현금 넘쳐나
밥 먹을 시간도 없이 10여년 호시절
2000년 중국산 밀려오며 시장 초토화
대구경제와 미싱의 봄도 재현되길 바라


◆미싱 기술 배우러 상경

미싱의 역사, 미싱의 구조, 미싱의 종류 등이 항상 궁금했다. 하지만 이 바닥 친구들은 미싱을 팔아 돈만 벌면 된다는 주의였다. 나와는 체질이 달랐다. 미싱이 좋아질수록 미싱 기본기를 더 배워 전문기술을 가져야 미래가 밝다고 생각했다. 나와 비슷한 맘을 가진 친구와 함께 서울로 갔다. 서울 용산역 근처에 있는 한 미싱공장에 취직했다. 직접 미싱을 만드는 곳이었다. 각종 부품을 조립해 완성시켰다. 난 각 부품의 생김새와 일본어로 된 그 명칭을 노트에 적고 외웠다. 바지밑단을 지그재그로 휘감아 박음질하는 일본용어 오바로꾸, 난 그게 영어로 ‘오버록(Over Lock)’이란 것도 나중에 알게 됐다.

당시 공장은 무늬만 공장이었다. 누가 누굴 챙겨줄 여유가 없던 시절. 그 어떤 양심과 직업윤리 의식도 부재하던 시절이었다. 돈 없고 기술 없고 빽 없으면 사람 취급을 받을 수가 없었다. 노조도 없었으니 직원의 복리후생은 처참했다. 월급도 언감생심. 가끔씩 선심쓰듯 회사에서 먹거리를 제공하지만 그것으로는 허기를 면할 수가 없었다. 당시 가장 영양가 없는 ‘지겟꾼빵’으로 버텨야 하는 날들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항상 꿈에 취해 있었다. ‘나만큼 미싱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이 없으니 장차 난 대구 최고의 미싱기술자가 될 것이다.’ 뭐, 대충 그런 종류의 야심이었다. 점차 서울생활에 길들여지면서 나도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나름 의협심이 강했던 나는 갑자기 기자가 그렇게 좋아보일 수가 없었다. 친구와 나는 함께 기자의 꿈을 품었다. 친구는 결국 경향신문 기자가 된다.

◆미싱 어원

미싱? 일본인들은 소잉머신(Sewing Machine)의 ‘머신’을 미싱이라 발음했다. 우리도 덩달아 미싱이라 했다. 베틀처럼 보여서 미싱은 ‘재봉틀’로도 명명된다.

1851년 설립된 싱거(SINGER)미싱. 160여년 역사를 가졌다. 라이트 형제도 비행기 날개를 만들 때 싱거미싱을 사용했다. 뉴욕주 피츠타운 출신의 기계공인 아이작 싱거는 개량된 미싱으로 특허를 받았다. 싱거의 모토는 ‘한 집에 한 대의 싱거 미싱!’이었다. 미싱 전시회와 미싱 빨리 돌리기 시합 등을 앞세워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아무튼 나는 3년 만에 청운의 꿈을 품고 대구로 내려온다. 대성미싱 주인 최봉호는 육군 대위 출신으로 서울에서 내려와 대구에서 택시운전사를 하다가 강도를 만나 그 길로 택시를 버리고 미싱가게 주인이 돼 큰 부를 거머쥔다.

가게에는 3종류(가정용 15K, 산업용 103K, 96K)의 미싱이 있었다. 한창 시절 가게에는 무려 13명의 직원이 있었다. 나는 기술 때문에 대표기사가 될 수 있었다. 당시 물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현금을 주고도 두 달 기다려야 원하는 미싱을 가져갈 수 있었다. 미싱은 곧 현금이었다.

◆국산 미싱 시대 도래

당시 미싱의 부품 중 50% 이상은 일본 부품이었다. 자연 일본과 손을 잡지 않고서는 독자적인 미싱을 만들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877년에 재봉틀이 처음 도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강원도 사람 김용원(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부친)이 일본에 갔다가 미싱을 구입했던 것이다. 아마도 싱거미싱이었을 것이다. 1896년에는 이화학당의 교과목 가운데에 재봉과 자수가 등장했다. 1905년에는 싱거미싱 한국 지점 광고까지 등장한다.

재봉틀은 오랫동안 가보처럼 사용되다가 1960년대 중반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한다. 그 효시는 1965년에 출시된 ‘부라더 미싱’이었다. <주>부산정기가 일본의 부라더 공업과 합작해 생산한 것이었다. ‘꽃님이 시집갈 때 부라더 미싱’은 1970년대에 유행했던 관련 광고 헤드카피였다. 1970년대만 해도 재봉틀은 혼수품 목록 1호였다. 서울역 앞에 회전 미싱 광고탑이 세워질 정도였다.

이 무렵 대신동 동양와이셔츠와 북성로 태양와이셔츠도 미싱 덕분에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미싱도 다양해져 독일산 파푸, 이탈리아산 유니온 스페시알, 일본산 라이온·스마트·야마다·미쓰비씨 등도 눈에 띈다. 부라더 미싱 옆에 드레스, 아이디알, 무궁화, 세한 등 국산미싱이 혈투를 벌인다. 뒤에는 대우가 일본과 기술제휴해 JUKI MO-352란 이름의 모델을 출시하게 된다. 지금 내 테이블 바로 앞에 초창기 대우가 만든 그 모델이 앉아 있다.

너무 바빠 밥을 먹을 시간도 없었다. 포항, 안동, 청송, 울진, 경남권까지 출장을 다녔다. 미싱이 워낙 귀하다 보니 늘 도둑의 표적이 됐다. 훔친 미싱을 팔러 온 도둑을 신고해 많이 잡았다. 그 공로가 인정돼 관할 경찰서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특별 검거령 시즌에는 형사들과 함께 도둑을 잡으러 다녔다. 실제로 강도와 몸싸움을 벌이다가 팔에 상처도 입었다.

◆미싱골목 태동기

19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가는 시절, 나는 대성에서 나와 태창미싱으로 독립하게 된다.

초창기 업체 이름을 지금도 외우고 있다. 남성, 부광, 하신, 일성, 대덕, 천일, 대흥, 대전, 신광, 동아, 부라더, 대성, 대우, 서울, 동원, 대구, 특수, 태극, 대진, 영재, 대보, 근우, 유창, 영광, 경남, 한성, 경동, 삼성. 한창 때는 60여 개, 지금은 45개 업소가 있다. 동원미싱의 김정진, 한성미싱의 이춘우, 부광미싱의 박군시 사장 정도가 나와 세월을 함께해온 토박이다. 전국 미싱가게 주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나이가 많을 것이다.

대구의 미싱골목 같은 데가 아직 전국에 여럿 산재해 있다. 서울 을지로, 영등포, 중부시장, 평화시장, 이문동, 창신동, 부산 범일동과 부산 국제시장, 대전 중앙시장, 인천 부평시장과 중앙시장, 광주 닭전골목 등인데 나와 거래하는 가게는 얼추 200개가 된다. 1985년에는 부라더미싱의 산증인인 홍순명 회장과 함께 일본 페가소스 미싱제조회사의 초청을 받아 일본으로 산업시찰을 다녀오기도 했다.

원래 미싱골목은 염색골목으로 불렸다. 미군 PX를 통해 불법 유통되는 군복을 물들여 파는 공장도 초입에 있었다. 근처 시민극장은 방앗간을 허물고 신축됐다. 시민극장도 미싱골목과 영광을 함께했다.

내가 남보다 돈을 더 많이 번 건 기술보다 마케팅 감각이었다. 당시 업자들은 미싱의 유통경로를 거의 모르고 있었다. 나는 시장조사를 철저히 했다. 물량이 확보되면 서울 가서 12t 화물차에 120여 대를 싣고 내려온다. 갖고 오면 금세 소진됐다. 하루에 많게는 170대도 팔았다. 수익률은 무려 50%. 외상은 거절, 오직 현금박치기였다. 돈이 흘러넘쳤다. 포대에 담아두면 근처 한일·조흥·상업은행 직원이 가져갔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돈 때문에 미래를 이성적으로 관리하는 지혜를 가질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부동산에 관심을 가졌다면 엄청난 부자가 됐을 것이다. 내게 넘치는 돈은 복이 아니라 되레 ‘독’이었다.

◆미싱 실종시대인가

내 독점시절은 10여 년이었다. 당시 내 주거래 회사는 동구 신암동에 공장을 갖고 있었던 협립양산, 그리고 북구 고성동 부산 점퍼 등이었다. 하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부터 점차 중국산 물건이 국내시장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국내의 인건비는 날로 치솟았다. 국내에서 의복류를 만드는 것보다 중국,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만드는 게 더 경제적이었다. 미싱이 필요한 업체 사장이 대거 탈한국을 시도한다. 가정에 있던 미싱조차 여성의 사회 진출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다. 미싱의 수요가 격감하게 된다. 난 그걸 예상하지 못했다. 그 여파가 이 골목에도 찾아들었다. 요즘 개발도상국 바이어가 가끔 헌 미싱을 구입하려고 여길 방문한다. 우리의 1950~60년대 수준의 나라라서 미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5년 전 평생을 함께한 아내가 타계했다. 미싱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아내의 빈자리를 지켜주고 있다. 미싱의 봄이 다시 올 것인가? 그럼 대구경제의 봄도 다시 재현될 것인가?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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