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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명의 터닝 포인트 상주에서 분신 같은 소설 ‘북비’향해 시위 당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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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춘호기자
  • 201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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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소설가 하용준

맘이 흔들릴 때마다 그는 경책용 목검을 잡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2017년 폐암 투병 중 입문한 국궁. 지난해 경북궁도대회에서 장년부 우승을 차지하는 바람에 상주시 대표선수로도 뽑혔다. 낙동강변에 조성된 충의정 국궁장에서 긴호흡으로 시위를 당기고 있는 하용준 작가.
2001년 집필을 시작해 아직도 출간을 이어가고 있는 대하역사소설 ‘북비’. 하용준 작가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이 소설에는 모두 930여명의 군상이 등장한다.

끝이 늘 궁금했다. 생명의 끝과 길의 끝. 우연히 찾아간 부산 다대포 백사장에서 정말 멋진 모랫바람을 친견한다. 킹 크림슨의 노래 ‘에피탑’을 야전전축으로 들으면서 며칠 텐트생활을 했다. 난 길 위에선 퍽 사교적이다. 어느 집에서 하룻밤을 유하고 나올 때 감사의 손편지를 적어놓았다. 그 주인이 편지에 감동했던지 날 찾으러 부산역에까지 왔다. 그때 나는 내 글에 신비한 파워가 있다고 믿었다.

진로가 극도로 불투명해졌다. 일단 시인부터 되기로 한다. 그런데 한 문예반 여학생이 한 유명 시인을 위해 기생처럼 술시중 드는 광경에 눈이 확 뒤집혔다. 그 시인을 향해 술잔을 던지고 상을 뒤엎은 뒤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졸지에‘불한당 문학청년’으로 찍힌다.

젊은날 세기말 허무주의 심취·싸움질
안하무인 성깔·광기, 출가 해프닝도
실익없이 끝난 사업…쓸모없는 신세
가장 끝자락 하고 싶었던 작가의 길

생애 첫 장편소설 ‘유기’상당한 반향
‘섬호정’‘대왕의 꿈’등 모두 9종 발간

‘북비’집필중
성주 월항면 성산이씨 세거 북비고택
영조 때 사도세자의 호위무사 이석문
조선 무예정신 ‘조선武’원형에 접근
1만여개 새 조선어휘 사전류만 24권
삼국지보다 많은 930여명 군상 등장

집필·출판 과정, 제작 ‘형극의 나날’
병마, 사망·도산…마치 저주 걸린 듯
그래도 소설덕 방치된 북비공비각 단장
완치판정 1년 앞, 2부 하용준으로 개화


맘이 흔들릴 때마다 그는 경책용 목검을 잡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대구대 경영학과에 들어갔지만 통음의 나날이었다. 문학의 가능성은 바닥이었다. 서울로 가서 한 중견업체의 기획실에 들어갔다. 시간이 남아 불교철학을 배울 요량으로 동국대 불교학과에 진학한다. 그런데 강단의 불교철학은 짜고치는 고스톱 같았다. 갈수록 스님의 법력도 교수의 지식도 모두 시시해 보였다.

자아 탐구를 위해 불교 관련 서적을 얼추 1천여권 독파한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나를 더 오만하고 도도하게 만들었다. 맘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불교에서 조금씩 멀어져갔다. 서울에서의 직장생활도 결국 패배로 마감된다. 1995년 즈음이었다.

그때 아내에게 이런 공언을 했다. “대구 가서 5년간 죽어라 글 공부해서 자리 잡으면 그때 당신을 부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내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공부해야 할 때는 공 부 안 하고 공부 안 해도 될 시점에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니 당신 참 철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좌우간 나는 수성구 황금동에 정착했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주>대교에서 국어, 한문, 영어 등을 가르쳤다. 청운산업이란 업체를 통해 종이 사업도 겸했다. 또 마(魔)가 끼어들기 시작한다. 정계와 끈이 닿아 있는 한 관계자와 친해졌다. 그 인연으로 난 정계로 한 발 성큼 다가설 수 있었다. 허주 김윤환, 포항제철의 신화를 만든 박태준을 놓고 저울질을 했다. 난 고인이 된 허주를 선택했다. 하지만 실익이 없었다. 내 사업까지 망해버린다. 이젠 정말 고립무원이었다.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천하에 쓸모없는 ‘놈팡이’ 신세였다. 내게 또 질문했다. ‘용준아, 정말 하고 싶은 게 뭐지?’ 욕망의 리스트를 적어봤다. 비교하면서 가능성이 없는 건 지웠다. 마지막에 남은 게 ‘작가’였다.

◆그동안 모두 9종의 장편소설 펴내

1997년 6월30일 오후.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가슴 안으로 뜨거운 열기가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노트북을 열어 빗줄기처럼 자판을 난타하기 시작한다. 전설의 고구려 역사서인 ‘유기(留記)’에 대한 장편소설이었다. 3개월간 200자 원고지 2천500매를 풀어냈다. 우연한 인연으로 중앙일보 자회사 출판법인 중앙M&B 측에 내 원고가 흘러들어가 편집부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99년에 생애 첫 장편소설 ‘유기’는 상당한 반향을 얻었다. 그래서 난 백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상고사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인 단국대 윤내현 교수가 내 작품을 위해 추천서를 써주었고 내 작품을 대학원 추천도서로 사용했다. 유기는 10만여부 팔렸다. 하지만 난 내가 알려지는 게 싫었다. 신문 인터뷰도 모두 거절했다.

그다음 작품은 인류의 기원을 추적한‘신생대 아침’, 뒤이어 ‘쿠쿨칸의 신전’이란 소설을 낸다. 쿠쿨칸은 ‘마야문명의 왕’을 의미하는데 이 작품은 중남미 고대문명의 실체를 해부한 것이다. 그밖에 하동 만석꾼 여참봉 이야기를 다룬 ‘섬호정’, 태종무열왕 관련 ‘대왕의 꿈’ 등 모두 9종의 장편소설을 엮어냈다.

그중 내 분신은 2001년 3월1일 빙의가 돼 지금까지 집필 중인 ‘북비(北扉)’다.

◆역시 내 분신은 북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성산이씨 세거지인 한개마을에 가면 ‘북비고택’이 있다. 영조 때 무신이자 병조참판에 증직된 이석문(李碩文), 일명 ‘북비공’으로도 불리는 사도세자 호위무사였다. 세자를 가둔 뒤주 위에 돌덩이를 올리라는 왕명에 반항했다가 곤장 50대를 맞고 관직을 박탈당했다. 처참하게 낙향한 이석문은 사립문(扉)을 뜯어서 북쪽 담벼락에 내고 평생 바깥출입을 삼갔다. 그 문이 바로 북비다. 북쪽 한양에 있는 사도세자에 대한 충절의 상징이었다.

이석문이 무덤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성리학의 나라, 문관의 나라였던 조선을 관통하는 무예정신을 소설로 그려내고 싶었다. 일단 전통검술 관련 자료부터 찾아나섰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문예도보통지, 본국검법, 조선세법, 쌍수도, 왜검도전 등을 통해 조선무(朝鮮武)의 원형에 접근했다. 검도용 목검, 우슈용 목도, 쌍절곤, 버드나무로 된 길다란 봉인 백낙곤 등을 내 곁에 두고 틈나는 대로 다양한 무술 기본자세를 취해봤다. 기를 돌리기 위해 툭하면 벽 앞에서 물구나무도 섰다.

북비는 하나의 ‘대장정’이었다. 준비해야 될 자료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종6품 벼슬에 불과했던 이석문의 존재는 당시만 해도 여타 쟁쟁한 무인의 그늘에 가려있던 때였다. 그에 대한 관련 연구도 전무한 상태. 후손 이원조씨 등을 만나 여러 증언을 갈무리했다. 굵직한 도서관을 찾아 관련 도서도 체계화했다. 급기야 당파, 노론, 소론, 군사, 무관, 활, 검술, 국궁, 축지법, 장풍, 무당 등 대분류한 자료항목까지 만들었다. 도서관 사서, 아니 어원학자가 된 것 같았다. 복사한 파일만 100개가 넘었다. 필요한 대목은 복사하고 1회 4권씩 대여받은 책은 집으로 갖고 와 밤새 독파해버렸다. 어느새 3천여권의 책을 품게 됐다.

대화도 조선시대 언어로 풀려고 했다. 자연 훈민정음, 최세진의 훈몽자회, 심지어 이두 관련 사전까지. 주시경과 최현배의 한글사전 등 모두 24권의 우리말본도 입수했다. 이밖에 박용수의 우리말갈래사전, 북한의 표준어대사전, 한글학회가 편저한 국어대사전 등 모두 24권의 각종 어문 사전류도 챙겼다.

국어사전도 정독했다. 모르는 우리말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새로운 조선말이 1만여개. 몰입은 마비를 몰고 왔다. 어느 한겨울 이불 속에서 사전 공부를 하던 중 하체가 마비돼 엎드린 채 소변을 보기도 했다. 축지법 관련 대목도 소설에 나온다. 2~3년 전국을 뒤지다가 지쳐 거의 포기할 무렵 거짓말처럼 축지법 문헌이 나타나기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인 모양이다.

◆북비의 저주

덕분에 조선말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생겼다. 하룻강아지도 조선 때는 ‘하릅강아지’라 했다. ‘하릅’은 ‘한 살짜리 네발 짐승’을 일컫는다. ‘천냥 빚도 말 한 마디로 갚는다’는 의미도 지금과 사뭇 달랐다. 천냥은 ‘금전’을 뜻하지 않는다. 천은 옮길 ‘천(遷)’, 냥은 ‘양식(糧食)’이란 의미다. 다시 말해 천냥 빚은 ‘생존’과 관련된 말이다. 생존과 관련된 빚은 그냥 고맙다란 말만 전달해도 양해가 됐던 게 그 시절 통념이었다. 이건 곳간 초입에 ‘타인능해(他人能解)’란 쌀구멍을 내 배고픈 민초와 쌀을 공유했던 반가의 배려심과 무관하지 않았다.

만반의 준비가 끝난 2004년 음력섣달그믐밤. 나는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천지신명께 삼배를 올리고 첫 문장을 끄집어냈다. 삼국지보다 훨씬 많은 인물군상이 등장한다. 930여명이다. 역사소설은 확인이 필수. 당시 이석문의 후손 Y씨의 말만 믿고 이석문이 3년마다 열리는 정기적인 과거시험인 식년시 무과에 장원급제한 것으로 집필했다. 나중에 경과(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임금의 명으로 열리는 특별 임시 과거시험)에서 하위로 급제한 걸 확인했다. 원고지 400장 분량의 글을 다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모든 걸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집필과정은 물론 출판과정도 형극의 나날이었다. ‘북비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전 MBC라디오 구성작가 Y씨가 규정한 말이다. 북비를 대하사극으로 제작하려 했던 관계자 모두 사망하거나 도산한 것. 나까지 폐암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내 소설 덕분에 방치돼 있던 북비공의 비각도 새롭게 단장될 수 있었다.

전반부 책이 출판되자 “요즘 같은 시대에 북비 같은 책이 팔리겠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나는 “다들 앞 다투어 미래로 달려가라. 난 천천히 뒤따라가면서 그대들이 바빠서 미처 못 챙기고 남겨둔 것을 느긋하게 주워 담으면서 가겠다”고 독백했다.

참 천신만고의 나날이었다. 지금 나는 상주 시내의 한 조그마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바람이 신산스럽게 부는 야심한 밤이면 내 몸 같은 목검을 잡고 내 맘을 응시한다. 예전엔 ‘내 밖’에 답이 있다고 여겼는데 지금은 ‘내 안’에서 찾으려고 한다. 이제 폐암완치판정을 1년 앞두고 있다. 1부 하용준은 죽고 없다. 상주에서 2부 하용준을 개화시키고 있다. 내 생명의 터닝포인트인 상주. 적당한 집필처가 마련되면 상주의 새로운 문화를 위해 임진왜란 때 ‘육지의 이순신’으로 유명한 정기룡 장군 이야기를 2021년쯤 소설로 부활해낼 작정이다. 동시에 세월이 허락하는 날 북비 후속편도 출산될 것이다.

지금도 내 맘이 서성거리면 아직 사용 못한 그 유골함을 만지작거린다. 결국 생자필멸(生者必滅) 아닌가. 그 앞에서 영원한 게 무엇이겠는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게 ‘축복’ 아니겠는가.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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