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영화, 음식을 캐스팅하다] ‘버닝’ 그곳에 있지 않았던 곱창전골

  •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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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15   |  발행일 2019-02-15 제40면   |  수정 2019-03-20
고독한 청춘들의 심리적 공복
그 현실속 배 채우는 곱창전골
20190215


여행후‘곱창전골 같은 것’찾는 혜미
가장 잘하는 곳 기세등등 화답하는 벤
최고의 곱창전골집에서 보낸 단 5분
끓이고 먹으며 대화하는 장면은 없어
주인공에게 드리우는 슬픔의 전주곡
소멸되고 싶은 처지에 대한 ‘메타포’

동대구역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범어동으로 달렸다. 무척 추운 날씨인 데다 배가 고팠고 따끈한 국물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강연을 마치고 대구로 내려오는 내내 혼자서라도 한 냄비 뚝딱 비울 수 있는 그 곳의 곱창전골을 떠올렸다. 후루룩 목 넘김이 그만인 탱탱한 우동면발과 야들야들 씹는 맛 일품인 곱창과 양이 머릿속에서 뒤엉키자 허기진 내 배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손님은 두 팀이었으나 늦은 시간이라 곱창전골밖에 되지 않는다는 주인장의 말. 곱창전골은 안 되는 게 아니라, 곱창전골만 된다지 않는가. 당연히 곱창전골을 주문했고 너무 깨끗해서 새것처럼 보이는 가스레인지에 냄비가 올려졌다. 빨리 끓어라.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버닝’은 세 명의 청춘을 통과하는 좌절과 무력감과 공허와 분노의 서사를 메타포의 감옥에 집어넣고 끝내 태워버린 묘한 영화다. 유령 같은 세 명의 청춘이 주변을 배회하며 동시대의 공기와 만날 때 다리가 풀리고 머리가 하얘지는 희귀한 경험을 맛보는 건 덤일 터.

아프리카 여행에서 막 돌아온 혜미는 나이로비 공항에서 사흘 밤낮을 같이 보낸 벤에게 한식이 먹고 싶다며 ‘곱창전골 같은 거’라고 특정한다. 곱창전골 같은 거는 곱창전골 외엔 없다. 곱창과 양과 각종 채소와 우동면발이 들어가고 곱창에서 흘러나온 곱으로 인해 끓일수록 걸쭉하고 기름지며 끈끈한 식감이 나는 음식. 일찌감치 신용불량의 멍에를 쓰고 집에서 나와 서울생활을 익혔던 혜미에게 무더운 아프리카의 사막과 한국의 뜨거운 곱창전골은 찰떡궁합이었는지 모른다. 곱창전골이 먹고 싶다는 혜미의 요구에 내가 서울에서 최고로 잘하는 곱창 집을 알고 있다고 화답하는 벤. 충만한 자신감으로 상대가 무엇을 요청하든 즉석에서 최적·최고의 조합을 엮어내는 전지적 존재자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네가 무엇을 말하든 어떤 것을 원하든 나는 최고로 좋은 걸 알고 있다는 기세등등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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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

곱창전골이 ‘버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그런데 이 시퀀스는 무척 기이하다. 대개의 영화에서 음식점 장면이 음식을 굽고 끓이거나 먹는 동안 벌어지는 대화와 사건에 치중한다면 ‘버닝’의 곱창전골은 맥거핀에 가깝다. 기껏해야 5분도 안 되는 시간이고 곱창전골 먹는 장면은 나오지도 않는다. 최고의 곱창전골은 어떤 것인지 기대했다고? 미안하지만, 그런 건 없다.

이창동 영화에서 음식점 시퀀스는 항상 두 차례 이상 등장한다. 그러나 음식을 앞에 둔 주인공이 음식을 먹는 법은 없다. 종종 술 몇 모금을 마실 따름이다. ‘박하사탕’에서 설경구는 불륜상대인 경리 여직원과 찾은 식당에서 다 구워진 삼겹살을 앞에 두고 담배 피우러 나간다. ‘밀양’에서 전도연과 송강호 일행이 찾은 표충사 백숙집에선 이미 식사가 끝난 후이고, 웅변학원 회식에서도 음식 한 점 집지 않고 자리를 떠난다. ‘시’의 윤정희는 합의금을 들고 찾은 부동산에 배달온 중국음식을 사양한다. 음식점 신은 다음에 벌어질 이야기를 연결하기 위한 매개며 주인공에게 드리우는 슬픔의 전주곡이다.

다시 ‘버닝’으로 돌아가자. 다 먹어서 이미 비워진 곱창전골 냄비는 여기에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된다는 팬터마임의 구조를 설명하던 혜미의 진술과 일치한다. 종수와 혜미와 벤이 곱창전골을 먹었건 소고기 전골을 먹었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서울에서 최고로 잘한다는 곱창전골 집의 빈 냄비에 아쉬움을 감추며 뭔가를 기대할 때, 혜미는 칼라하리 사막의 ‘선셋 투어’를 이야기하며 아프리카의 일몰을 묘사한다. 처음엔 주황색이었다가 피 같은 붉은색이 된 노을이 보라색이 되고 점점 더 어두워지면서 끝내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한 혜미가 느낀 감정은 세상의 끝에 와서 혼자인 고독감이었다. 나도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죽는 건 무섭고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고 싶다는 혜미의 말은, 차라리 소멸되고 싶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메타포였는지도 모른다. 먹고 싶었으나 먹지 못하고 그럼에도 먹은 것이 되어버린 심리적 공복상태가 불안했던 걸까. 서울 최고의 곱창전골 집에서 보낸 단 5분, 벤은 그 사이 배달된 자신의 포르쉐에 혜미를 태워 떠난다. 주인공 종수만 남았다.

홍상수의 ‘그 후’에도 곱창전골 집이 나온다. 권해효의 외도를 의심한 아내는 회사로 찾아와 김민희에게(그녀는 오늘 첫 출근이다.) 다짜고짜 따귀를 날린다. 소동극이 일단락되고 권해효와 김민희는 곱창전골 집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내일부터 안 나오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김민희를 극구 만류하던 권해효는 여행에서 돌아온 애인 김새벽을 만나고는 태도를 바꿔 회사를 나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설득한다. 그리하여 귀에 꽂이는 말, “뻔뻔한 거 같아요”. 이창동과는 달리 음식을 앞에 둔 홍상수의 인물은 언제나 뻔뻔하게 잘 먹는다. 먹고 마시면서 이전의 대화를 계속 이어간다. 홍상수 영화에서 음식은 일상의 소극(笑劇)을 위한 질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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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냄비에서 곱창전골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작은 그릇으로 거듭 옮겨 담았을 때 맛있는 칼칼함의 비법이 궁금했다. 흔쾌히 알려준 대답은 이랬다. 식사메뉴가 필요했던 주인 내외는 봉덕동에 위치한 어느 옛날포장마차에서 곱창전골을 먹게 되었고, 맛에 반해 전수를 부탁했는데(물론 처음 갔을 때 무례하게 부탁한 건 아니다) 선뜻 알려주었다는 것. 이전까지 많은 곱창전골 식당을 찾았으나 입에 맞는 곳을 발견하지 못하던 차에 뜻밖에도 포장마차의 곱창전골이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다.

대구는 소·돼지를 다루는 식당이 많다. 해물이 약한 대신 육고기가 강하다. 막창은 물론이고 곱창 집도 상당수다. 그런데 곱이 있는 한우곱창을 쓰는 곳은 흔치 않다. 곱창전골이 생각나면 찾는 이 곳의 한우곱창엔 곱이 그득하다. 첫 맛은 고소하면서 칼칼하고 끓일수록 걸쭉하고 시원한 국물이 일품이다. 곱창전골 한 냄비를 다 비우고 나왔다.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속이 든든한 덕분인지 하나도 춥지 않았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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