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불신사회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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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14   |  발행일 2019-03-14 제31면   |  수정 2019-03-14
[영남타워] 불신사회
허석윤 기획취재부장

지난해 12월, 부산의 한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동네급 규모라고 믿기 힘든 대형 사기사건이 벌어졌던 것. 피해자 60여명에 피해액은 무려 37억원. 더욱 충격적인 것은 사기범의 정체였다. 동네에서 40년 가까이 살던 미용실 원장 할머니라니. 사기범은 그 오랜 세월 동안 성실하고 다정한 이웃의 모습을 연출했다. 한 치의 의심도 사지 않을 만큼 시커먼 속내를 완벽하게 숨겼다. 심지어 가족보다 사기범을 더 믿었다는 피해자가 있을 정도다. 귀신도 속일 듯한 ‘위장술’이 놀랍기만 하다.

할머니 사기범은 고금리 미끼를 쓰거나 곗돈을 가로채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전 재산을 빼돌리고 도망가기 직전, 마지막 한탕을 벌였다. 회심의 사기 카드는 ‘손자 목숨’이었다. ‘백혈병 손자가 병원비가 없어 죽게 생겼다’는 거짓말로 여러 사람의 돈을 탈탈 털어갔다. 사기범의 눈물연기에 속은 피해자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빚더미에 눌려 생계가 막막하거나 살던 집에서 쫓겨 나야 하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줄을 잇는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반평생을 가족처럼 지내던 이웃을 믿고 동정심을 발휘한 것뿐. 그럼에도 그 대가가 너무 혹독하다. 돈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까지 몽땅 잃었으니.

우리나라는 유독 사기범죄가 기승을 부린다. 세계 1위 수준이다. 국민 100명 중 한명 꼴로 사기를 당하고, 매년 사기 피해액이 대구시 예산과 맞먹는 8조원이라는 통계도 있다. 이처럼 사기업계가 번창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잔챙이’들의 사기질만으로 이만한 경쟁력을 쌓기는 불가능하다. 사기계 거목(巨木)들의 활약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수조원대 사기를 친 조희팔, 주수도 등은 가히 레전드급이다. 지금도 조희팔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신출귀몰이다. 주수도는 얼마전 감방 안에서까지 1천억원대의 원격사기를 쳤다. 이쯤되면 거의 신의 경지 아닌가. 이들 같은 월드클래스 사기꾼의 명맥이 면면히 이어지면서 한국은 세계가 알아주는 ‘사기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 언론들은 공공연히 한국을 ‘사기공화국’이라고 비아냥 거린다. 기분 나쁘지만 또다른 측면에서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금전을 갈취하는 사건만 많은 게 아니라 정권 자체가 사기로 탄생한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폭 넓게 보자면 사기행각은 우리 주변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법과 제도로 무장 또는 위장한 탐욕스러운 권력층의 집단사기도 적지 않다. 특히 과거 독재정권과 그 부역자들이 국민을 속인 사기는 너무나 폭력적이고 악랄했다. 알다시피 수법은 단순, 무식했다. 권력유지에 방해가 되면 누구라도 ‘빨갱이’로 낙인찍는 게 단골 레퍼토리였다. 인혁당 사건,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무고한 국민의 생명을 뺏고 인권을 유린한 희대의 사기극이었다. 그럼에도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 주범과 종범들은 어떤가.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기는커녕 비호세력을 규합해 또다시 혹세무민을 노린다. 뼛속까지 사기꾼이라야 가능한 뻔뻔함이다.

사기와 술수에 오염되지 않은 곳을 찾기 힘들다. 하다못해 판사마저 믿기 힘들게 됐다. 사법농단 사태란 게 뭔가. 판결로 사기친 게 아닌가. 이런 사회에서 신뢰가 싹틀 수 없다. OECD가 한국민을 대상으로 조사해 지난해 내놓은 신뢰 보고서란 게 있다. 이에 따르면 11점 만점인 신뢰도에서 정부는 5점, 국회는 3점대를 기록했다. 당연히 OECD 꼴찌 수준이다. 개인간 신뢰도 역시 낮기는 마찬가지다. 국민 10명 중 6명은 남이 내 지갑을 주우면 안 돌려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신이 만연한 사회에서 통합과 상생은 언감생심이다. 되레 분열과 반목, 혐오의 독버섯만 자랄 뿐이다. 그동안 우리는 성장신화에만 정신이 팔려 온갖 사회적 병폐를 외면하고 방치해왔다. 이런 탓에 자칫하다간 나라가 만신창이가 될 지경이다. 워낙 중증이어서 치유도 쉽지 않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는 법. 희망은 물론 신뢰회복에 있다. 우리사회를 배회하는 불신의 망령, 내쫓을 수 있을까.
허석윤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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