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바다인문학] ‘제주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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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28   |  발행일 2019-06-28 제38면   |  수정 2019-06-28
돌밭서 산란·서식 ‘제주여름의 진미’…돌밭 일구며 살아온 제주사람과 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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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잡힌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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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목자리축제에서 시연한 자리 뜨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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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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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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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구이

◆여름이면 잊지 못하는 그 맛

가파도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이면 제주바다가 더욱 그립다. 베지근한 그 맛, 제주를 떠난 제주사람들이 여름이면 그 맛을 잊지 못해 고향을 찾는다는 맛이다. 이쯤이면 나도 반쯤은 제주사람이 된 것일까. 참을 수 없어 제주의 벗 양용진 셰프에게 전화를 했다. 자리물회가 그리워 7월에 갈 거라고. 벌써 설렌다. 제주바다가 보이는 허름한 그 집에서 맛보게 될 자리물회.

제주 바다 어장 ‘자리밧’…다 자라면 17㎝
좋은 어장 몇개만 봐도 먹고사는 걱정 덜어
바다로 흘러내린 용암지형, 뾰족 솟은 바닥
그물 내렸다가 들어올려 잡는 어망 ‘사둘’
온난화 따른 어획량 큰폭 감소 서식지 북상

뼈째 썰어 물붓고 찬밥 말면 꼬들한 식감 더해
열무김치와 찰떡, 보목동은 자리젓으로 유명
푸른콩으로 만든 막된장 간조절, 비릿함 제거


자리는 농어목 자리돔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로 제주에서는 제리, 자돔이라고도 한다. 다 자라면 17㎝ 남짓, 타원형으로 체고가 높으며 가슴지느러미 근처에 진한 청흑색 반점이 있다. 눈이 크고 콧구멍이 양쪽에 한 개씩 있으며 체장에 비해서 비늘이 크고 턱과 뺨을 제외하곤 비늘로 덮여있다.

제주에서는 ‘자리를 뜬다’고 한다. 왜 떠야 하는 걸까. 제주도 지질을 이해해야 한다. 물 속에서 폭발해 만들어진 한라산과 300여 크고 작은 오름이 제주를 만들었다. 바다로 흘러내린 용암 지형에선 그물을 끌기도 드리우기도 어렵다. 바위틈이나 작은 구멍에 낚시를 넣어 잡는 ‘고망낚시’나 그물을 조심스럽게 가라 앉혔다가 올리는 ‘들망’이 적정기술이다.

한국수산지(1910)에 따르면 제주에는 사용하는 자리밧(어장)이 282망이 조사된 것으로 나와 있다. 제주인들은 이를 아주 좋아해서 생선으로 먹고 염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산간벽지의 주민들도 이를 젓갈로 만들어 저장해놓고 빠뜨리지 않는 식품이다. 따라서 자리가 어획량의 적고 많음은 도민의 경제 및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당시 자리는 제주 남쪽에서는 4~10월, 북쪽에서는 6~8월이 제철이었다. 이는 ‘한국수산지’에 소개된 제주의 자리밧이다. ‘밧’은 ‘밭’의 제주어 이지만 바다의 어장도 밧이라 했다.

보목이나 모슬포에서는 지금도 자리밧 몇 개만 잘 보면 먹고사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말이 있다. 자리밧마다 이름이 붙어 있는 것도 그만큼 섬살이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적인 자리밧은 성산읍 신풍리와 신천리 경계에 있는 ‘식게여’라는 곳이다. 제주 사람들은 제사를 ‘식게’라고 한다. 제를 올리는 시간은 보통 늦은 밤이다. 마치고 나면 자정을 훌쩍 넘어선다. 좋은 자리밧을 차지하려면 새벽에 나가야 하는데 늦잠을 자면 큰 낭패다. 식게가 끝나자마자 자리밧으로 나가 배를 세우고 날이 밝기를 기다린다. 소문이 퍼지면서 그 자리밧은 식게여라 불린다. 바다 밑은 흘러내린 용암이 파도와 바람에 깎여 바다 속에 뾰족뾰족 솟아 있다. 후릿그물질을 할 수도 없고 저인망으로 긁어 잡을 수도 없다. 조심스럽게 그물을 내렸다가 들어 올려서 잡는다. 그래서 만들어진 특수 어망이 바로 ‘사둘’이다. 통나무배 테우를 타고 나가 사둘로 자리를 떴던 것이다. 요즘에는 보목동, 서귀포, 모슬포 등에서 축제나 체험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모슬포에는 지금처럼 주어선과 보조어선이 어울려 자리를 잡는 어법을 처음 개발한 김요생이라는 어부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제주 해안마을 중에서도 서귀포시 보목마을이 자리돔으로 유명하다. 매년 5월이면 자리돔축제를 열기도 한다.

아직 동이 트려면 두어시간 기다려야 하는 신새벽이다. 보목항으로 향했다. 오전 4시면 자리밧으로 나서는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자리는 여름에 돌밭에 산란을 한다. 이런 곳을 ‘걸바다밭’이라 한다. 이곳은 우무, 톳, 구젱이 그리고 수심이 있는 곳에는 자리가 머문다. 자리가 사는 곳이나 그 습성은 돌밭을 일구며 살아온 제주사람을 꼭 닮았다. 수컷은 산란을 할 때까지 곁에서 알을 지킨다. 어린 치어는 성어가 되어서도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

보목항의 여름 새벽은 자리를 잡으러 가는 배들로 요란한다. 세 척의 배가 움직인다. 모선인 큰 배 한 척에 작은 배 두 척이 딸린다. 자리는 멀리 오가지 않고 무리지어 서식처 주변에 머물기에 들망을 이용해 기다렸다가 잡는다. 자리를 유인하기 위해 미끼를 뿌리기도 한다. 이렇게 자리가 많이 있는 곳을 ‘자리여’라고 한다.

모슬포 자리는 뼈가 억세 구이로 좋다. 보목 자리는 뼈가 부드럽고 고소하니 물회로 좋다. 비양도 자리는 크기가 작으니 젓갈로 좋다고 한다. 서해 어촌마다 자기네 낙지가 최고이듯 제주에서는 지역마다 자리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 오죽하면 ‘보목 사람들 모슬포 가서 자리물회 자랑하지 말라’는 속담까지 생겼을까. 지금도 보목이나 모슬포의 어민들은 서로 자리가 많이 있는 명당자리를 잡기 위해 자리철이면 밤잠을 설친다. 물회와 젓갈용으로 서귀포 보목자리, 구이와 조림은 모슬포·마라도·가파도 자리를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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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해지는 자리생태계

2000년대로 건너오는 과정에 자리 어획량은 큰 폭으로 감소된다. 산란장 감소, 과도한 어획, 해양환경 변화 등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자리가 좋아하는 산호초와 갯바위가 파괴되고 훼손되고 있다. 해양산성화로 인한 백화현상도 주된 원인 중 하나다. 바다는 지구상의 이산화탄소 1/3을 흡수한다. 집중호우나 토양이 탄소를 흡수하지 못할 때 바다에 과잉공급되면서 탄소 유입이 증가하게 된다. 그 결과 해양산성화가 진행되면서 백화현상이 발생해 해양식물의 서식처가 사라진다. 서식처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개나 게 등 바다생물의 껍질인 탄산칼슘의 균형이 무너진다.

수온의 변화로 인한 자리돔의 이동은 들망어선의 조업수역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현재 자리돔 들망조업수역은 제주 연해이지만 온난화로 자리돔이 북상하고 있다. 더 이상 물반 자리반, 값싼 생선이 아니다. 남해를 넘어 강원도 속초까지 북상하고 있다. 자리돔 어기에 수역조정이 요구된다. 2009년대 자리돔 어획량은 척당 7.5t, 서귀포 지역은 한 해 총 255t으로 30억원 정도의 수익을 올렸다. 많이 어획한 해는 500t에 이르지만 이젠 100t도 잡지 못하는 해도 있다. 최근에는 자리돔이 북상하면서 제주 어민들이 울상이다.

◆베지근한 맛을 육지것들이 알까

자리물회는 망종 전에 맛을 보아야 한다. 물질을 하는 해녀나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채소와 된장만 준비했다가 뼈째 썰어 물을 부어 먹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찬밥을 말아야 자리의 꼬들꼬들한 식감이 더해진다. 그 무렵에 우엉팟(텃밭) 열무를 뽑아서 담근 열무김치를 곁들이면 최고다. 특히 보목동은 자리젓으로 유명하다. 뼈가 부드럽기 때문이다. 자리와 소금을 4대 1로 버무려 항아리에 넣고 4~5개월 숙성한 후 풋고추, 고춧가루, 참깨, 참기름, 마늘, 파 등을 적당하게 넣어 무쳐먹는다. 옛날에는 양념도 하지 않고 생젓으로 먹었다. 때로는 밥솥에 찌거나 냄비에 무를 넣어 졸여서 반찬으로 이용했다.

자리는 식감이 좋고 뼈째 먹기에 칼슘, 철, 인 등이 풍부하다. 제주사람들이 나이 들어도 뼈가 튼튼하고 허리 굽은 사람이 적었던 것도 자리 덕분 아닐까. 식초에 재웠다 토장으로 간을 하고 요리할 때는 초피를 넣는다. 보릿고개에 식량이 떨어져 어려움을 겪을 시기에 남자들은 자리를 뜨고 여자들은 중산간 등지로 팔러다녔다.

◆자리맛은 된장맛

제주에 토종 콩으로 ‘푸른콩’이 있다. 제주말로 ‘푸른 독새기콩’이다. 제주에서는 소금이 귀해 간을 소금이 아니라 된장으로 했다. 그때 사용한 된장이 푸른콩으로 만든 막된장이다. 자리의 베지근한 맛을 내는 데 자리가 반이면 콩이 반이다. 그만큼 된장이 중요하다. 요즘 육지것들 입맛에 맞게 초장을 사용하는 곳도 있지만 제주맛은 아니다. 된장은 간을 맞추기도 하지만 자리에 남은 비릿함을 제거하는 역할도 한다.

산지천 아래 허름한 식당에서 별미 자리물회를 맛 본 적이 있다. 정말 우연이었다. 지나가다 배가 고파 기웃거리는데 사장 남편이 “우리 아내가 정말 된장을 맛있게 잘 담그며 특히 물회맛이 끝내 준다”며 한마디 툭 던졌다. 물회를 먹고 싶다는데 된장을 미끼로 던질 줄이야. 이 정도면 고수다. 생활의 고수다. 상술이 아니라 그냥 터져 나오는 말이다. 앞 식탁에 앉은 세 명의 사내도 새벽에 도착한 화물선의 짐을 내린 직후 자리물회 한 그릇을 시켜 놓고 한라산을 잔에 가득 따른다. 옆 식탁을 보며 침을 삼키는 사이에 물회가 나왔다. 한 숟가락 떠서 입안에 넣었다. 느끼하지 않은 기름과 고소함이 된장맛과 함께 입안에 착 감긴다. 이런 맛을 제주말로 ‘베지근하다’고 한다. 그냥 지나쳤다면 어찌됐을까. 여행은 이런 맛이다. 자리가 제주바다를 떠나면 어떻게 하나 벌써 걱정이다. 베지근한 자리물회와 코시롱한(고소한) 자리젓이 마냥 그립기만 하다.

(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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