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친일 종족주의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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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24   |  발행일 2019-09-24 제30면   |  수정 2019-09-24
종족주의에서 못 벗어나고
사기의 나라라고 한국 왜곡
‘반일 종족주의’책내용 황당
면역력 없는 사람엔 치명적
친일 좀비로 변하게 할 수도
20190924
허석윤 중부지역본부장

‘반일 종족주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이 책을 두고 워낙 말들이 많아 관심이 갔다. 도서관에서 빌려보려다 포기했다. 대여 예약이 너무 많아 순서를 기다리는 게 하세월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서점에서 책을 사서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값이 아까웠다. 도대체 이 책이 왜 베스트셀러가 됐는지 이해가 안 간다. 책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필자처럼 내용이 궁금해서 사보는 사람이 더 많은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건 ‘반일 종족주의’는 도발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국민적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어쩌면 이 책을 출간한 이영훈 교수와 공동 저자들은 내심 흐뭇해할 수도 있겠다. 많은 이들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지만 그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일단, 혐한(嫌韓) 바이러스를 퍼뜨리려는 소기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한 듯 싶다. 거기에 더해 유명세와 짭짤한 인세 수입까지 보너스로 챙겼으니 그들로선 꽤나 남는 장사였으리라.

문제는 그 바이러스가 면역력이 없는 얼빠진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라는 점이다. ‘친일 좀비’로 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이 ‘반일 종족주의’란 책이 마치 은폐된 진실을 고발한 것처럼 착각한다. 최고 학벌을 자랑하는 저자들이 각종 통계 수치를 동원하고, ‘학자적 양심’까지 운운하며 주장을 펼치니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다. 해악은 크다. 이 책의 논리에 고무된 친일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부추기는 혐한론이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 인터넷과 SNS가 주된 통로다. 혐한·친일 방송에 열을 올리는 유튜버들이 제멋대로 설쳐대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소녀상에 침을 뱉는 망나니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광복을 맞은 지가 74년이나 됐건만, 아직도 우리나라가 일제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이 책은 서문에서 반일 종족주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두가지 전제를 둔다. 한국이 거짓말과 사기의 나라라는 것과 한국인은 종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궤변이다. 저자는 국민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정치, 학문(역사), 재판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는 온통 거짓말로 점철돼 있다고 강변한다. 그 근거로 한국의 사기 범죄, 위증 등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관련 통계를 제시한다. 하지만 범죄 통계의 국제 비교는 각국의 사법 시스템이 다르기에 단순 비교가 어렵다는 것은 상식이다. 사실, 이런 부류의 학자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통계만 보여주는 건 흔히 쓰는 수법이다. 이 책 내용의 대부분이 철저히 취사선택된 통계와 자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을 왜곡하는 통계 놀음에 말려드는 것은 어리석다.

한국인을 샤머니즘에 사로잡힌 종족 수준까지 끌어내린 것은 더욱 황당무계하다. 이 책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한민족(韓民族)이라기보다 미개한 ‘반일 종족’이다. 그래서 일제 치하에서 벌어지지도 않았던 허위 사실을 토대로 일본을 배타적으로 감각하는 것이란다. 책 서문의 황당함이 이 정도이니 본문 내용은 말할 것도 없다. 일제의 식량수탈, 강제동원·강제징용은 없었고,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근거없는 떼쓰기라고 한다. 또 위안부도 강제로 끌려간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돈벌러 갔단다. 일본군 성노예가 아니라 전쟁특수를 이용해 한몫 챙겼다는 것이다. UN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수많은 증거자료들을 토대로 확인한 일제의 만행들을 깡그리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더 기가 찬 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조차 거짓말로 몰아붙인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이 책의 내용은 일본 극우파 주장을 빼다박았다. 우연이 아니다. 저자들처럼 일본 우익의 후원을 받는 일종의 신(新)친일파가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다. 일본에서 태어났어야 할 친일 종족주의자들이다. 이들의 발호를 더 이상 용납해선 안된다. 허구와 기만으로 가득찬 식민지 근대화론부터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 올바른 정신을 가진 역사가와 학자들의 책임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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