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노소 세대불문 ‘당구홀릭’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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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01   |  발행일 2019-11-01 제33면   |  수정 2019-11-01
■ 당구의 귀환
인터넷 보급·PC방에 밀려 침체기 겪던 ‘당구’
국제대회 활약·프로리그 출범…새로운 열풍
청소년∼장년층 부담없이 즐기고 쉽게 어울려
전자식 점수판 등장…‘레저 스포츠’ 인식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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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를 취미로 즐기고 있는 직장인 박민지씨(23)가 지난 24일 저녁 대구시내 한 당구장에서 친구와 게임을 하고 있다. 박씨는 지난달 열린 동호회원들만 참가하는 ‘태백산배 전국 3쿠션 당구대회’에서 여자부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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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연기 자욱한 당구장에서 건장한 20대 청년들이 패싸움을 벌인다. 수건으로 당구공을 둘둘 말아 ‘철퇴’로 휘두르고, 부러뜨린 당구 큐를 ‘창’처럼 사용한다. 1997년 개봉한 국내 영화 ‘비트’의 한 장면.

‘당구’라고 하면 40대 이상 세대에서는 이처럼 담배연기가 자욱한 한편에서 짜장면을 시켜먹고 저녁이면 술판까지 벌어지는 어두침침한 당구장을 연상한다. 고교시절엔 비행청소년이 가는 곳, 대학시절엔 수업을 빼먹은 학생들로 북적이는 장소가 당구장이었다.

하지만 지난 22일과 24일 찾은 대구시내 당구장들은 하나같이 깔끔하고 청결한 분위기에 점수판까지 전자식 터치스크린으로 갖춰놓아 눈을 의심케 할 정도였다. 20대 여성이 3쿠션을 치고, 초등학생이 프로선수에게 당구 레슨을 받는 모습은 10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5년 순종이 창덕궁에 당구대 2대를 설치하면서 우리나라에 도입된 당구는 광복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987년부터 미국 당구선수권을 12년 연속 제패한 이상천 선수는 한국 당구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 당시 전국의 당구장 수만 4만개가 넘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와 함께 당구도 침체기를 겪는다. 인터넷 보급과 PC방 급증이 당구 인구 급감으로 이어졌다.

침체기를 겪던 당구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국내 당구 선수들이 각종 국제대회를 싹쓸이하며 인기몰이에 나선 것.

결정적인 계기는 당구장이 청소년 유해시설에서 제외되고 금연구역으로 지정된 데 있다. 과거 칙칙한 당구장 분위기를 단번에 바꿔 놓았다. 당구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당당히 자리잡으면서, 값싸게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스포츠라는 매력 때문에 학생들로부터도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더 이상 국내 영화나 드라마 속 당구장 흡연 장면도 볼 수 없다.

세대를 불문하고 새로운 놀이 공간으로 자리 잡은 당구의 부활에는 베이비부머인 5060세대의 퇴직도 한 몫을 했다. 다른 운동에 비해 돈은 적게 들고 누구와도 쉽게 어울릴 수 있을 뿐 아니라 학창시절의 추억까지 느끼게 해 주는 당구는 퇴직 세대에겐 단연 최고의 스포츠이자 놀이다.

목 좋은 당구장에는 어김없이 5060세대들이 포진해 있다. 한국인이라면 죽을 때까지 끊기 어렵다는 골프도 포기하고 당구의 세계로 뛰어든 이도 많다. 덩달아 내리막을 타던 당구 산업도 회생하고 있다. 골목길에서 사라져가던 당구장이 다시 늘어나 어느새 PC방 수를 앞질렀다.

하루 당구장 내방객 120만명, 애호가 1천200만명, 전국 골목 곳곳에 당구장 2만2천개, 세계 유일의 당구 전문 TV채널. 숫자로만 보면 한국은 당구를 세계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지난 9월19일부터 22일까지 서울 강서구 마곡동 더 넥센 유니버시티에서 열린 ‘2019 서바이벌 3쿠션 마스터스’는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당구 붐’을 입증했다.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인 프로야구, 프로축구는 물론 손흥민이 출전한 유럽축구경기 시청률까지 뛰어넘었다. 22일 열린 결승전 시청률은 1.201%로, 당구 중계 사상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이는 같은 기간 방송된 다른 스포츠 종목 시청률을 뛰어넘은 수준이다. 21일 열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경기(손흥민 출전) 시청률은 1.081%였다. 프로배구는 21일 경기가 최고 0.440%, 22일 경기가 최고 0.412%에 불과했다. 프로야구 시청률과 견줘도 뒤지지 않는다. KBO리그 4경기가 열린 20일 최고 시청률은 0.716%, 2경기가 열린 21일 최고 시청률은 0.726%였다. 같은 기간 당구는 20일 최고 0.547%, 21일 최고 0.759%를 기록했다. 태풍 영향으로 프로야구 한 경기만 열린 22일에만 KBO리그 시청률이 1.436%로 당구 최고 시청률(1.201%)보다 높은 수치를 보였다.

올해 5월 출범한 당구프로리그도 당구 열풍에 불을 붙이고 있다. 프로골프,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농구, 프로배구, 프로볼링에 이어 7번째로 프로화에 성공한 프로당구(PBA)는 세계 최초로 시도되는 3쿠션 당구투어를 통해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뿐 아니라 당구 대중화 및 활성화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당구 경력 20년의 정연철 프로는 “국제식 대대(큰 당구대) 보급 확대와 당구대회 TV 중계 등의 영향으로 혼자서도 당구장에 가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며 “무엇보다 전자식 점수판 등장으로 수지(핸디)가 투명해지면서 모르는 사람들과도 얼마든지 경기를 즐길 수 있어 당구도 이제 당당한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임성수기자 s018@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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