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날 대구 달서구 월암동의 한 도로 모습. 차선이 흐릿하게 보인다. <영남일보DB>
비가 내리거나 밤이 되면 도로 위 차선이 흐릿하게 사라지는 듯 보이는 이른바 '스텔스 차선(밤과 악천후 속 시야에서 사라진 차선)' 현상이 대구 도심 곳곳에서 나타나 운전자들의 불안을 키우고 있다. 도로 관리 기관은 차선 설치 기준을 충족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고성능 도료로 도색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문제도 내심 의식하는 분위기다. 운전자들은 "비 오는 밤에는 차선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계속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행정 기준과 현장 체감도 사이에 간극이 적지 않은 셈이다. 그 과정에서 스텔스 차선은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대구 도로의 품격(品格)'과 연관될 수 있는 지점이다.
◆ "비 오는 밤이면 차선이 사라진다"
대구에서 개인택시기사를 운영하는 이철우(59·동구 신암3동)씨는 비 오는 날 야간 운전이 특히 어렵다고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이씨는 "대구는 차선을 얇게 칠한 구간이 많아 야간에 잘 보이지 않는다"며 "특히 동구 일대에 스텔스 차선이 많아 운전을 할 때 불편을 자주 겪는다"고 토로했다.
수성구 황금동에 거주하는 30대 운전자 최정훈씨 역시 "내비게이션을 따라간다고 하더라도 익숙하지 않은 길에 비까지 오면 차선이 거의 보이지 않아 순간적으로 차로를 헷갈릴 때가 있다. 특히, 교차로나 고가도로 진입부에서 긴장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대구 지역 교통사고 분석 결과, 야간 사고 비중이 높고 우천 시 치사율이 급증하는 것으로 나났다. 나 주의가 필요합니다. 한국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분석시스템 자료. <그래프=생성형 AI>
이처럼 스텔스 차선이 생기는 근본적인 원인은 '차선 노후화'에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밤이나 악천후 시 운전자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아 교통사고를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차선은 운전자의 방향을 안내하는 일종의 '기본 신호'로 인식되는데 가시성이 떨어지게 되면 동시에 운전자 판단력도 흐트러뜨릴 수 있다.
이 같은 '스텔스 차선'은 단순한 운전자 불편을 넘어 대형 사고로 직결될 수 있다. 한국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분석시스템(TAAS) 통계를 살펴보면, 우천 시 야간 교통사고의 치사율은 맑은 날 주간 대비 확연히 높게 나타난다. 지난해 대구지역 교통사고 1만222건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3천543건이 야간에 발생했다. 통상 야간 심야 시간대 차량 통행이 주간보다 적다는 점을 감안하면 높은 편이다. 사망자는 38명, 부상자는 5천여 명에 달했다. 비 오는 날 교통사고는 660여 건이 보고됐다.
서울시에서 시범 설치한 발광형 노면표시. <이진욱 동구의원 제공>
이와 관련해 대구 기초의회 차원에서도 지적해 왔다. 이진욱 대구 동구의원(국민의힘)은 "최근 3년간 동구에서 교통사고가 4천584건 발생해 35명이 숨지고 6천573명이 다쳤다"며 "이 중 야간이나 악천후 상황에서 발생한 사고가 17.4%에 달했는데, 국토부 교통사고 보고서와 도로교통공단 분석 결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스텔스 차선'이다. 시야가 흐려진 상황에서 사고가 잦았다"고 꼬집었다.
◆ 대구 차선 절반 이상은 재도색 필요
차선은 차량 헤드라이트 불빛을 반사하는 원리를 활용한다. 이를 '재귀반사도' 또는 '휘도'라 부른다. 경찰은 2012년부터 흰색 차선은 기존 130밀리칸델라(mcd)→240mcd로, 황색 차선은 최소 150mcd 이상을 유지하도록 기준을 강화했다. 칸델라는 빛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다. 1천mcd는 촛불 1개 밝기에 해당한다.
재귀반사. <그래프=생성형 AI>
23일 영남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대구공공시설관리공단이 관리하는 지역 내 노면(폭 20m 이상 도로) 총 1만612㎞ 중 재도색이 필요한 노후 차선은 절반이 넘는 5천599㎞(약 52%)에 이른다. 이 중 재도색이 시급한 차선을 솎아내면 10% 수준인 1천319㎞에 달한다.
대구공공시설관리공단은 기준에 따라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시설관리공단 도로시설팀 직원은 "차선은 보통 2~3년 정도 내구성을 갖지만 교통량이나 외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며 "반사 성능 측정 결과가 기준치 이하일 경우 보수 계획을 세워 재도색하거나, 심한 경우 완전히 제거 후 새로 시공한다"고 했다.
다만 이러한 기준이 실제 운전자 체감과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로 환경과 교통량, 기상 조건 등에 따라 차선의 시인성(視認性)은 크게 달라질 수 있어서다.
특히, 교통량이 많은 간선도로에서는 차량 바퀴 마찰로 차선 위 유리알이 빠르게 마모되면서 반사 성능이 떨어질 수 있다. 차선 재도색 주기가 길어질 경우 이러한 현상은 더 두드러진다.
여기에 비가 내리면 상황은 더 나빠질 수 있다. 도로 표면에 이른바 '물막'이 형성되면서 헤드라이트 빛이 차선에서 제대로 반사되지 않고 퍼지기 때문이다. "비 오는 밤에는 차선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운전자들의 고충이 단순히 '체감'으로 치부할 사안이 아니라는 의미인 셈이다.
계명대 홍정열 교수. <계명대 제공>
이에 대해 계명대 홍정열 교수(교통공학과)는 운전자의 인지 오류와 자율주행 시대의 혼란을 경고했다. 홍 교수는 "차선이 불분명하면 운전자는 무의식적인 주행 대신 순간적인 판단에 의존하게 된다"며 "이 과정에서 운전자에겐 급감속이나 급조향 같은 위험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해 측면 충돌이나 단독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인지 반응이 늦은 고령 운전자들이나 카메라 데이터에 의존하는 자율주행차에게 스텔스 차선은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며 "사고 다발 구간이나 산업단지 인근처럼 마모가 심한 곳을 중심으로 실시간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장기적으로는 차선 정보를 아예 디지털 데이터로 주고받는 스마트 도로(V2X·Vehicle to Everything)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 스텔스 차선을 지우기 위한 노력들
대구에선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지만 스텔스 차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그간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진행돼 왔다. 경찰청은 이미 2021년에 비 오는 밤에도 차선이 잘 보이도록 '우천형 노면표시' 설치를 의무화하도록 매뉴얼을 개정했다. 일반 도료보다 단가는 높지만, 물에 잠겨도 빛을 반사하는 특수 유리알을 사용해 시인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선진 기술을 도입한 해외에서는 실제 안전 효과가 보고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차선이나 중앙선에 태양광 충전식 LED 도로표지병(일명 '스마트 로드 스터드')을 설치해 야간 시인성을 높이는 기술이 활용되고 있다. 이 장치는 낮 동안 태양광을 충전한 뒤 밤에 스스로 빛을 내거나 강한 반사를 일으켜 운전자에게 차로 경계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일부 실험 구간에서는 이러한 장치를 설치한 뒤 야간 교통사고 발생률이 기존 대비 약 52.96% 수준으로 낮아진 것으로 보고됐다.
일본과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고성능 유리알과 두꺼운 열가소성 도료를 결합한 '고반사 차선'이 간선도로와 고속도로에 적용되고 있다. 일반 도료보다 반사 성능이 높아 야간이나 우천 시에도 차선 식별이 상대적으로 선명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에선 서울시가 2023년부터 차선 표면에 요철을 만들어 빗물이 고이지 않게 하는 '돌기형 선형표시'를 확대 적용 중이다. 울산시 역시 야간 빗길 시인성이 2배 이상 높은 특수 도료를 간선도로에 도입했다. 초기 시공 비용은 일반 도색 대비 30~50%가량 비싸지만, 내구연한이 길어 장기적인 유지보수 비용 절감은 물론, 야간 교통사고 예방이라는 사회적 비용 감소 효과까지 거두고 있다.
◆ 발광차선 도입 가로막는 '예산'…
대구시의 경우 매년 배정되는 차선 도색 예산이 한정돼 있다. 전체 노후 구간(5천599㎞)에 고성능 도료를 전면 적용하기엔 한참 모자란 상황이다. 취재진이 대구시에 확인 결과, 현재 대구 도로 차선에 적용하고 있는 '융착식(열로 녹여서 붙이는 방식) 도료'는 1m당 5천~5천300원(재도색 기준)이다. 하지만 '고성능 방식' 중 하나로 꼽히는 LED 차선의 경우 1m당 2만~3만원 수준이다. 일반적인 융착식 도료보다 최소 4배 이상 비용부담이 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구 도로 차선 도색 작업엔 '땜질식 처방'이 반복되는 상황이다. 고성능 방식 대신 가장 현실적인 도료가 쓰이거나 도색 주기가 길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현재 논의 중인 각종 도로 안전 기술은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도로 연장이 갈수록 늘어나는 시점에서 관련 예산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까지 빚어지고 있다.
이진욱 대구 동구의원은 "차선이 희미하면 운전자가 방향을 잃기 쉽고 사고 위험이 커진다"며 "서울, 부산, 울산 등은 이미 △고성능 도료 △스마트 마모도 측정 시스템 △발광형 노면표시 등을 도입하고 있는 만큼, 대구도 '잘 보이는 차선(고휘도 차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신기술을 활용하고, 예방 중심으로 예산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면서 하루빨리 과학적 관리체계로 전환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 미래엔 차선 자체가 정보 송·수신
교통 전문가들은 '시인성'에 의존하는 현재의 교통환경은 기술 발전으로 인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홍정열 교수는 "아스팔트는 온도가 높아지면 말랑말랑해지는 특성이 있는데, 대구는 폭염이 잦아 도로 포장면이 쉽게 변형된다"며 "이런 상황에서 성서산업단지 등을 오가는 대형 화물차들이 차선을 밟고 지나가면 도색 마모가 훨씬 심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래 사회에선 차선 자체가 정보를 송·수신하는 주체가 돼 자율주행차나 스마트카에 디지털화된 위치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게 된다"며 "기술이 상용화되면 운전자의 눈에 차선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정밀 지도와 데이터 전송을 통해 차량이 스스로 경로를 유지할 수 있다. 스텔스 차선으로 인한 인지 오류 문제가 기술적으로 해결되는 '도로의 디지털 전환(DX)'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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