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세프를 찾아서-돼지국밥 전문 ‘돌삐’ 이경남 사장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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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17   |  발행일 2017-02-17 제41면   |  수정 2017-02-17
대구 유일무이 ‘돼비지탕’…北 실향민 향수 달래주는 속깊은 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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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프한 첫인상과 달리 미소가 인상적인 ‘돌삐’ 이경남 사장. 그는 실향민인 아버지의 체취가 물씬 풍겨나는 돼비지탕을 지역에서 처음 선보여 눈길을 끌고 있다. 별도로 내는 양념장이 맛을 다양하게 변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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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뼈와 돼지뼈를 고아 맑으면서도 묵직한 국물이 인상적인 돼지국밥.

식당 입구. 그 식당주만의 ‘색깔’을 액면 그대로 드러낸다. 그 색깔이 고집스러움과 우직함 쪽으로 넘어서면 그 오너셰프는 본질적인 것에 더 치중하게 된다. 이목을 끌만한 실내 인테리어, 디자인 등에 들어갈 돈은 최대한 아낀다. 더 좋은 식재료 구입에 치중한다. 갈수록 그런 식당주를 만나기가 어렵다. 운명이 아니고 ‘어쩌다 식당’인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TBC대구방송 남쪽 골목 초입에 있는 돼지국밥 전문점 ‘돌삐’. 그는 상호처럼 살려고 머리카락을 빡빡 밀어버렸다.

우연찮게 길을 지나가다가 식당 첫인상이 꽤 괜찮다 싶어 차를 세우고 식당 안에 들어가봤다. 묵직한 느낌이 왔다.

오너셰프 이경남씨의 별명은 ‘똘삐’. 좋다. 그 이름이 믿음직스러웠다. 그와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지난 정월보름날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너무 피곤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돌삐란 동일한 상호를 가진 식당 둘을 동시에 꾸려가야 된다. 돼지국밥집과 횟집이다. 지난 30여 년 그가 올인한 영역은 횟집. 하지만 그의 식당인생 2부는 돼지국밥에 승부를 걸었다.

그는 지금 그로기 상태다. 수십 년간 누적된 피로가 온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그가 두 손을 내민다. 류머티스 환자처럼 뼈 마디가 다 휘어져버렸다. 툭하면 물리치료를 받아야 된다. 식당일이 얼마나 고된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주말에는 찬모가 없어 아들 일을 돕고 있는 노모(박봉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그가 등장했다. 씩 웃는다. 그 표정이 꼭 괴짜 피아니스트 임동창을 빼닮았다. 터프한 표정 속에서 돋아난 ‘돌삐표 살인미소’가 좋아 단골이 된 손님도 많다.

◆돌삐의 인생역전

학창 시절 그는 한 주먹했다. 공부보다 운동이 화두였다. 승부사 기질 탓에 이런저런 다툼이 잦았다. 한창 때는 누구와 싸움을 해도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식당을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쌈꾼이 바로 ‘손님’이란 걸 알게 됐다. 가장 친절하고 가장 성실하고 가장 진실해야만 단골을 확보할 수 있다. 그래야만 가족을 먹여살릴 수가 있다. 이보다 무서운 적수가 있을까. 젊은날 날센 주먹은 이제 요리하는 손으로 변해 버렸다.


두산동 TBC 대구방송 인근 골목 초입
30여년 횟집 내공 주먹깨나 쓴 주인장
고교 때 야반도주한 서울서 요리 입문
80년대 창녕횟집 차리며 본격 셰프의 길

이따금 손님 위해 끓여낸 탕·국밥 인기
그 참에 전국 국밥집 1년여 순례후 개업
가마솥 지키며 정성들인 돼지국밥만큼
콩물·배추속 어우러진 돼비지탕도 인기



남으로 내려오기 전 이북에서 선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 대구로 온다. 서구 내당동에서 살았다. 북한 음식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는 해외 근로자로 일을 하다가 말년에는 개인택시를 몰다 돌아가셨다.

그는 한때 주목받는 운동선수였다. 필드하키, 마라톤, 육상 등에 강했다. 정이 많은 술고래였다. 친구 퍼먹이기가 특기였다. 부모한테 배운 북한식 만두를 많이 빚었다.

결혼만 덜컥 안 했다면 세계를 떠도는 여행가가 되고 싶었단다. 고교 때 벌써 셰프 팔자가 확인된다. 동대구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도망쳤다. 종로5가에 있던 중화요리집 ‘선일각’에 팔려가서 죽을 고생을 했다. 동구 신암동 옛 영신고 근처에서 포장마차를 차려 고갈비·닭똥집 등을 구워팔았다.

군을 제대했다. 기술이 없어 공사장을 전전했다. 눈썰미가 있어 학원에 안가고도 조적 기술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하루에 무려 8천장을 쌓았다. 하지만 목돈은 잡지 못했다.

1980년대 초중반 남구 대명동 즉결재판소 맞은편에 형성된 한 향어 횟집에서 처음 요리를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기술을 그대로 가르쳐주는 이는 없었다. 눈치껏 배워야만 했다. 대명동 복개도로 회타운에 있었던 ‘창녕횟집’에서 본격적으로 셰프 인생이 시작된다. 그는 회를 제대로 써는 법을 알기 위해 근처 선어를 취급하는 아줌마에게 매달렸다. 기술자만큼 회를 쳐낼 수 있었다. 이후 그는 10여개 이상의 횟집을 열었다 닫았다를 거듭했다.

달서구 신당동 신당시장 안에서 ‘창녕횟집’을 열었을 때는 수족관 살 돈이 없어 벽돌로 대충 만들었다. 하지만 콜레라 파동 때문에 손님이 끊겨버렸다. ‘장사는 내가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흐름을 타야 되고 굴곡변수가 도처에 깔려 있다’는 걸 절감했다.

동대구역 앞에서 ‘다도횟집’을 할 때는 심야손님을 겨냥한 소고기스키야키, 복어탕, 동태탕, 우럭탕 등을 꽤 잘 끓였다. 그는 가능하면 고춧가루가 덜 들어간 이북식 탕을 고집했다.

생선과 고기 요리, 이걸 통합시키고 싶었다. 횟집 시절에도 툭하면 단골, 종업원, 이웃 식당주 등을 위해 소머리국밥을 잘 끓여냈다. 다들 회보다 국밥이 더 낫다면서 국밥집을 한 번 해보라는 무언의 압력도 넣었다. 그런 반응이 그를 국밥집 사장으로 만든 셈이다.

◆돌삐표 돼지국밥 국물 레시피

처음엔 제대로 된 소머리국밥집을 낼 요량이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국밥집을 가봤는데 원재료에 충실한 데를 찾기 어려웠다. 수입고기가 국내산으로 둔갑하는 경우도 많았다. 제대로 된 국물맛을 내는 건 정성밖에 없었다. 주인이 가마솥 앞을 지키지 않으면 국물도 주인을 속였다. 봉덕, 목련, 범어, 명덕 등 지역의 유명 장터 돼지국밥집에 이어 전국구 국밥집도 1년여 순례해봤다. 그런데 자기 입맛에 맞는 국물맛을 찾지 못했다.

‘돌삐표 국물’을 만들어 보자고 결심했다. 그는 기술을 배우려고 했지만 돈을 주지 않고선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동안의 탕 요리 노하우를 기본으로 시행착오를 겪었다. 실패가 결국 ‘실력’이 되었다. 이제 원하는 사람이 오면 국물 제대로 빚는 법을 공짜로 가르쳐주겠단다. 셰프에 따라 같은 레시피도 맛은 제각각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일단 돼지와 소 뼈부터 공부했다. 그리고 대전의 삼성주물을 통해서 특제 가마솥 둘을 구입했다. 하나는 고기 삶고 또 하나는 뼈를 우려내기 위한 용도였다.

고기도 현금 박치기여야 제대로 된 걸 얻을 수 있다. 그게 오히려 단가를 낮출 수 있다. 사용하는 고기는 돼지 부위 중 삼겹살, 목살, 아롱사태, 전지 등이고 후지는 퍽퍽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내장은 오소리감투, 창자, 암뽕 등을 넣는다.

일단 돼지와 소뼈를 다 넣고 삶는 게 특징. 처음에는 장장 12시간을 한 타임으로 삶아봤다. 초벌 때 숨은 핏물이 많이 발생했다. 국물이 갈변해버렸다. 그 초벌 국물은 역한 냄새 때문에 먹기 힘들었다. 불 조절이 정말 중요했다. 강한 불로 계속 가면 잘 우려지지만 마지막에 불을 낮춰 뭉근하게 고아내면 국물은 뽀얀 데서 불그죽죽해진다.

돼지국밥이라고 해서 돼지뼈만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소뼈를 아웃소싱했다. 각종 돼지뼈 중에서도 선별했다. 대퇴부·족발 등을 축으로 하고 그 곁에 소뼈(엉치뼈·갈비뼈·사골)를 섞었다.

맞다. 핏물 제거가 정말 중요하다. 수돗물을 갈아주며 하루 이상 핏물을 뺀다. 다시 그 뼈를 20~30분 뜨거운 물에서 데쳐내듯 삶아 내버린다. 뼈의 표면을 자세히 보면 굳어버린 선지 덩어리 같은 게 묻어 있다. 미지근한 물에 다 씻어줘야 한다.

그렇게 장만한 뼈를 찬물에 넣고 뚜껑을 덮는다. 강불에 3시간 정도 고아내면 뽀얀색이 드러난다. 거기서 한 단 불을 낮춰 5시간 더 우려낸다. 그 물을 받아낸다. 정수기에서 빼낸 알칼리수를 남은 뼈에 붓고 센불로 8시간 정도 끓인다. 그럼 국물이 3분의 1 정도 확 줄어든다. 그걸 받아낸다. 이때 돼지뼈는 흐물거려 버려야 된다. 초탕 국물 색은 탁도가 있다. 재탕 국물은 흰색에 가깝다. 특유의 뽀얀색이다. 또 물을 소뼈에 넣고 센불에 6시간 정도 끓인다. 그렇게 장만한 국물 세 가지를 1대 1대 1로 섞는다.

고기는 따로 삶아야 된다. 고기 삶은 물은 맑은 갈색이고 단맛이 나면서 천연조미료 구실을 한다. 그걸 기존 국물에 15분의 1 정도 섞는다. 너무 많이 섞으면 본연의 맛이 감퇴된다.

◆북한식 돼비지탕

두부집도 아닌데 삶은 콩이 보였다. 그 콩은 그가 부모로부터 배운 북한식 돼지음식인 ‘돼비지탕’(9천800원)을 만들기 위한 기본 재료다. 원래 돼지등뼈와 믹서에 간 콩물이 연한 배추 속과 잘 어울리게 끓여내는 것이다. 예전에는 배추 속 대신 시래기도 사용했다. 식성대로 소금만 넣고 먹는 이도 있고 대구식 칼국수처럼 양념장을 넣고 먹기도 한다. 돼비지탕은 콩국수에 돼지삼겹살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기자도 대구에선 처음 먹어본 메뉴다. 돌삐 사장은 “아직 대구 사람들은 이 음식을 잘 모르고 속초 아바이마을 같은 북한에서 내려온 강원도권 실향민은 대구에서 돼비지탕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란다”고 말했다. 아직 이 음식을 크게 홍보하지 않고 있다. 마니아가 원할 경우만 끓여낸다.

횟집 잡어탕에서 시작된 그의 요리 탐구는 결국 돼지국밥을 넘어 돼비지탕으로 영역을 넓힌 것 같다. 원산지란에 주인과 종업원을 국내산으로 표기해 놓았다. 그의 요리 사부는 연습과 시행착오란다. 직접 담근 깍두기와 매운 배추김치. 이 둘도 국물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남해군 미조항 멸치로 만든 젓갈과 액젓만 고집한다. 액젓은 멸치젓갈을 3년 묵혀야 얻을 수 있다. 디저트로 주는 칡즙. 여느 식당의 희석한 매실액보다 훨씬 투실투실해 보였다. 수성구 두산동 185-4 (053)768-7998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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