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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옥의 그림 같은 집] 마음이 닿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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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미디어부기자
  • 2018-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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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질때쯤, 공중전화부스를 지나다 그리운 사람이 떠올라 동전 만지작…

사랑과 우정을 느끼게 하는 공중전화부스. 그리운 사람과의 통화 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산책을 나섰다. 골골마다 가을이 먼저 와 있었다. 소슬한 갈바람소리에 새소리 어우러진다. 홍조 띤 산딸나무 아래로 나뭇잎이 뒹군다. 미처 단풍 들기도 전인데 낙엽 되어 뒹굴다니. 가을을 알리는 신호치곤 처연하다. 지난 여름 폭염 탓인 듯하다. 무더위를 용케 견디고 어느새 영글어서 풍요를 선사하는 가을의 생명들이 더욱 소중해지는 시간이다. 며칠 전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가을풍경을 보냈더니 반가워한다. 실시간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매체로는 전화가 으뜸이지 싶다.

우리 집 근처에도 전화부스가 하나 있다. 병풍처럼 아파트를 둘러싼 길 언저리에 세워진 공중전화부스다. 베란다에 서면 그 전화부스에 눈길이 닿곤 한다. 공중전화부스 안에는 회색 전화기가 한 대 놓여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선 개성 넘치는 전화부스도 많던데 우리 마을 공중전화부스는 10년이 넘도록 하늘색 직사각형이다. 변화에 대한 기대는 고사하고 곧 철거되진 않을까 내심 걱정된다. 찾는 이가 뜸하기 때문이다. 이젠 추억과 회고의 상징체가 된 그 전화부스를 보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사각의 공중전화부스 속에서/ 수첩을 뒤적이지만/ 가을 억새가 나부끼는/ 빈 들판에 나는 서 있고/ 이런 마음을 들어도 좋을/ 편안한 이름 하나 떠오르지 않는다/ 공중전화를 보면/ 그래도 동전을 찾는다.” 신달자 시인의 ‘공중전화를 보면 동전을 찾는다’의 일부다. 무심히 지나치지 못하고 동전을 찾는 시인의 심정을 헤아려본다. 해 질 녘 어두워오는 마음에 불을 켠 듯한 이름 하나를 찾는 시인이나, 그의 심정을 십분 헤아리며 시에 감정 이입하는 독자나 진정한 벗이 그리운 것은 매양 한가지인 것 같다.

며칠 전에 지인과 나눈 대화도 그랬다. 유안진님의 ‘지란지교를…’을 막 풀어놓던 지인에게 농담 섞은 질문을 던졌다. “늦은 저녁을 먹고 찾아가 차 한잔 마시자고 해도 허물없이 맞아주실 건가요? 입은 옷에서 김치냄새가 조금 나더라도 흉보지 않고,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가 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을 열어 보이며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아도 내가 한 말 실어 나르지 않을 거지요?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하면 더 좋겠어요. 반드시 잘 생길 필요는 없답니다.”

느닷없는 반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지인의 박장대소가 생생하다. 그에게 나는 무엇이 되어줄 수 있을까? 비단 사람에게만 국한된 고민만은 아닐 것이다.

흥미 있는 실험노트를 보았다. 2010년에 과학자들이 실행한 쥐 실험이다. 과학자들은 작은 우리에 쥐 한 마리를 가두었다. 그들은 쥐를 가둔 우리를 넓은 방에 놓아주었다. 다른 한 마리의 쥐는 우리가 아닌 넓은 방에 풀어놓았다. 풀어놓은 쥐는 자유로웠다. 반면 우리 안에 갇힌 쥐는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자 넓은 방을 오가던 쥐도 스트레스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자유로운 쥐는 우리에 갇힌 동료를 구하러 나섰고 여러 번 시도 끝에 우리의 문을 열고 갇혔던 쥐를 풀어주었다.

연구자들은 같은 실험을 반복했다. 이번에는 넓은 방 안에 초콜릿을 놓아두었다. 자유로운 쥐는 우리에 갇힌 쥐를 먼저 풀어줄지 초콜릿부터 먹을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여있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몇몇 쥐를 제외한 많은 쥐들이 우리에 갇힌 동료를 먼저 풀어준 다음 초콜릿을 나누어 먹었다는 것이다. 이 실험에서 우리가 취할 교훈은 ‘사람이 쥐보다 못해서야?’가 아닐까. 그러나 회의론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이 실험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쥐가 우리에 갇힌 쥐를 풀어준 것은 불안과 짜증을 불러 일으키는 고통신호를 멈추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결코 괴로워하는 동료 쥐에게 감정이입을 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불쾌한 감각부터 해소하려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중세에는 객관적인 잣대가 세상을 지배했다. 인간의 미적 감각과 가치마저 신의 지시에 따랐던 중세에 비하면 인본주의는 큰 자유를 보장받았다. 르네상스시대 이후 인류가 전개한 역사는 자유 한가운데 있었던 셈이다. 여전한 것은 외로움과 불안심리가 아닐까. 때 이른 낙엽을 보면 처연하고 시인이 전화부스 앞에서 동전을 만지작거리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인공지능의 신인류가 도래해도 사랑과 우정만큼은 인간이 지킬 마지막 보루라 믿고 싶다.

사랑과 우정의 섬세함은 뒷전이고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가 세상에는 많다. ‘사랑’의 반대말은 ‘사랑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것은 해줄 수 없다’라고 한다. 우정도 같다. 이타심이 앞설 때 성사되기 쉽다. 어디 우정뿐이겠는가. 일도 마찬가지다. 불협화음은 대체로 양보의 부재가 그 원인이다. 모두 인간에 대한 이해가 밑바탕이다.

발길을 돌려 한적한 대숲에 들어섰다. 대나무 숲길에 들어서면 가늠하거나 재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가 있다. 담백한 대 줄기 사이로 새소리, 바람소리, 해 돋는 소리가 흐른다. 염탐하지 않아도 들려오는 자연의 협화음은 세상의 소음을 저만치 밀어낸다. 잠자던 평화를 깨우고 저 높은 곳으로 시선을 끌어올린다. 우듬지 위로 펼쳐진 말간 하늘이 해탈한 성자의 낯빛은 아닐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대의 목소리도 반갑지만 자연의 소리에 마음이 더 가 닿는 이유다. 차별 없이 세상을 품어안은 말간 하늘지붕 아래에 펼쳐진 산책길이 더 없이 평화롭다. 화가·미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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