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에도 새로운 생각 담을 수 있어…모바일세상에 맞춰간 내 時調와 같아”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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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06   |  발행일 2019-12-06 제34면   |  수정 2019-12-06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시조시인 박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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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직장생활을 밥벌이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지난 35년간 시조정신의 전위라 여기며 최선을 다해 속세의 강을 무사히 건너왔다” 고 말하는 시조시인 박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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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박기섭이 위클리포유와의 인터뷰를 위해 ‘시조는 형식에 갇힌 게 아니라 형식을 갖춘 시’라는 그의 시조관을 원고지에 육필로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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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정신과 맞물려 있는 박기섭이 골동품을 진열해 놓은 대구 이천동의 품 갤러리 내부 전경. 그는 수십년간 월급을 쪼개 한국적인 정서가 담긴 온갖 고서류, 고화류, 도자기류, 수석류, 민속품 등을 품기 시작했다. 광복 직후 초등학교 교과서, 대구의 1세대 서양화가의 그림 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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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된 박기섭은 지금까지 모두 8권의 시조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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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재다능한 박기섭은 시조정신과 함께 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술적 재능을 피력할 수 있었다. 우연찮게 잡게 된 나무젓가락으로 그린 수묵 판화 같은 점묘화(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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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섭은 평생 모은 골동품을 여러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문화사랑방 같은 품갤러리를 6년 전 대구 남구 이천동 골동품거리 한 쪽에 오픈했다.


뒷산 무덤을 에워싼 칼등언덕의 도래솔. 그걸 스친 바람도 내 시조의 최전선이 된다. 그 바람은 내 갓난 울음 속에 들어와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삼신할매나 다름없었던 할매가 그 마법을 푸는 열쇠를 고이 간수하다 백수 어름 지상을 떠날 때 내 손에 꼭 쥐여주고 가셨다.

고향집 마루는 늘 덩그러니 높고 방바닥은 깊었다. 먹빛 비애가 감돌았다. 한밤에는 전설을 만나고 낮에는 신화에 취하게 만들었다. 햇살이 집안에 들면 나는 빛과 그늘 사이를 번갈아 오가며 내 시심을 얼레줄처럼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시조는 그 원형질 형태로 몸 안에 고여 있을 뿐 용암처럼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내 성장기의 세상은 농경과 산업사회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 전답이 최고이던 시절은 돈과 권력이 모든 걸 말해주는 시절로 굽이쳐 가고 있었다. 낭만과 절망, 그리고 저항이 공존했다. 서정시도 호경기였고 참여시의 주가도 치솟기 시작했다. 한국 시문학의 군웅이 할거하고 있었다. 특권이 존재했고 관행이 존재했다. 하지만 뒷골목 대폿집 놋주발 곁 육자배기는 젓가락장단 속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여전히 남자의 목소리가 컸고 여성은 집안의 꽃으로 갇혀 있었다. 난 그게 다 못마땅했다.

고향 마을 뒷산을 넘으면 달성군 가창댐의 상류 계곡으로 이어지는 정대가 나온다. 정대 근처 헐티재를 넘으면 청도군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청도 각북면 금천리 솔안마을로 이어진다. 할매 친정도 바로 거기다. 그런 할매 친정에 내가 운명적으로 귀촌한 것은 2002년. 오랫동안 할매 고향이 거기라는 것을 나는 까맣게 몰랐다. 이 또한 내 시조의 담금질을 위한 세월의 전략이 아니겠는가.

마비정 마을은 새벽녘 귀신 발자국 소리가 들릴 정도로 외졌다. 산짐승의 울부짖음, 그리고 소한·대한 어둑한 눈발들이 싸르락 지나가는 봉창문, 나는 사철 달라지는 바람의 절규를 그 문틈으로 익혔다. 그걸 어김없이 글속에 주워 담았다. 시인이 될 자에겐 절호의 언저리였다. 할매란 하나의 하늘이 사라졌을 때 나는 새로운 하늘을 장착했다. 그 하늘 또한 시조였다. 가족사가 어둑해질수록 문기(文氣)는 더욱 훤해진다. 두 동생이 변고로 모두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렸다. 23세가 되던 해 졸지에 나는 독자(獨子)가 돼버렸다. 부모는 절망이었지만 그로 인해 나는 시조의 본령에 더 접근하고 있었다.

형식에 갇힌 게 아니라 ‘형식 갖춘 시’
처음 인연닿은 ‘샘터’잡지서 시조賞
시대·실험·비평 정신 부족한 韓시조
84년 새로운 시조위한‘오류동인’결성
40년간 8권 시조집…일상 단어 배치
야설스러운 사투리 구담·해학 주입

속세의 거죽 벗은 명퇴
그리운 외할매 친정으로 운명적 귀촌
중국집 나무젓가락으로 그린 점묘화
우연히 빠진 도자기 잔금의 아름다움
2만여점 모은 골동품도 시조의 연장


◆황청동 랩소디

마비정 마을을 떠나 지금은 대구 수성구 황금동이 된 황청동(黃靑洞)으로 이사를 했다. 이상화 시인이 그린 그 ‘빼앗긴 들’의 배경이 된 수성들녘은 개발이 안 돼 제대로 된 길이 없었다. 띄엄띄엄 들어선 몇몇 자연부락이 넓은 수성들을 가운데 두고 서쪽의 중동과 마주하고 있었다. 대구어린이회관과 교육과학원이 들어선 일대가 집이 있던 자리다.

어느 날 한 아이가 황청동으로 이사를 온다. 그 아이는 내게는 부적과 같았다. 황순원의 대표적 소설이 된 ‘소나기’에 등장한 도회지풍의 그 애와 죽자하고 붙어다녔다. 한쪽에는 할매, 또 한쪽은 짝꿍이 내 상상력을 고양시켰다. 동도국민학교에서 수성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어름 그 아이 집안은 연대보증 때문에 거덜나고 만다. 내가 그 아이를 만나 함께한 시간은 이태가 채 안 된다. 그럼에도 내 어린 날의 기억 대부분은 그 시간에 묶여 있다. 아이는 사라지고 핑크톤의 내 유년도 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 사춘기의 질풍노도가 불어오고 있었다.

수염이 자라나고 있었다. 몽환에 휩싸인 불안이 나를 엄습했다. 그게 뭔지는 몰랐다. 대건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툇마루에 앉아 멍하니 집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소나기구름이 몰려왔다.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소낙비. 그 빗소리 앞에서 나는 야윈 종잇장이 된다. 묘한 여운의 시흥(詩興). 난 그 심경을 구체적으로 토해낼 언어가 없었다. 시만 영접할 뿐 단 한 자도 적지 못한다. 내 생애 첫 시마(詩魔)였다. 가끔 동네 애들을 모아놓고 백일장을 열어주기도 했다. 좌충우돌, 내 방식의 시병(詩病)을 견디고 있었다. 제대로 된 시집이 없어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부터 암송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교정직 공무원이라서 매달 ‘교정’이란 잡지를 읽을 수 있었다.

대건고로 갔다. 입시 두 달 전 막내동생이 결핵성뇌막염 재발로 세상을 떠났다. 의욕을 상실하고 난 잠시 염세주의자가 된다. 대건고 문예반‘태동기’는 나름 짱짱한 전통을 가졌다. 특히 경남 마산에서 전임해 온 도광의 시인이 작문교사로 문예반을 지도하고 있었다.

국립대 국문과에 두 번이나 낙방한다. 대학생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나는 1974년 덜컥 공무원이 된다. 첫 근무지는 고령우체국. 세상은 어질어질했다. 10월 유신,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났다. 장발단속이 직장 내에서도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었다. 시골 우체국에는 한가함이 실바람처럼 넘실댔다. 고령의 산하를 짚고 점차 시조시인으로 진군했다.

직장에서는 시를 생각하지 않았다. 구양수가 언급한 창작의 산실인 3상(침상·측상·마상)처럼 집의 잠자리, 화장실, 그리고 차안을 잘 활용해 시를 낚았다. 잠을 잘 때도 머리맡에도 그리고 차안에도 메모장을 놓아뒀다. 신탁을 받아적기 위해서다. 가끔 몽중시를 적기도 했다.

◆1977년 운명의 신을 만나다

1977년 운명의 신이 내게 다가왔다. 내 친구 자취방에서 난생처음 ‘샘터’란 잡지를 보게 된다. 거기에 도전해 샘터 시조상을 차지하게 된다. 재차 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도전했다. ‘한추여정(閑秋餘情)’은 모두 3수로 구성된 연시조였다. 첫째 수는 사랑, 둘째 수는 죽은 동생, 마지막 수는 친구에 대한 내용이었다. 과감한 이미지와 비유를 가진 실험시조였다. 90년 나온 내 첫 시집의 첫 시 ‘강동(降冬)의 시’도 파격이었다. 첫 문장을 ‘그러나’로 시작했다. 내게 자극을 준 분이 있다. 바로 김천 청암사 주지로 오신 김정휴 스님의 ‘장경각’이란 작품이다. ‘밤이면 장경각이 심해의 어장처럼/ 금빛 고기 떼들이 무리 저 다니더니/ 바다 먼 알몸으로 와서 짐승마냥 눕는다.’

새로운 시조를 위한 동인과 도원결의를 한다. 먼저 나와 이정환, 문무학은 김종윤이 회장으로 있는 낙강 영남시조문학회에 가담했다. 84년 우리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오류동인’을 결성한다. 새로운 시조를 위한 전위였다. 나는 비감어린 창간사를 적었다. ‘어쩌면 우리는 삼류에 지나지 않는, 문단 일각의 돌배나무쯤 되는 처지이다. 그러면서도 구태여 삼류 아닌 오류로서 동인의 뜻을 모은 데는 나름대로 그만한 까닭이 있다. 우리의 지향할 바는 민중의지·역사의식에 입각한 투철한 시대정신일 수도 있다’고 적었다. 90년 펴낸 첫 시집의 ‘추상’이란 연작시조에서는 크기가 다른 액자형 꼴로 글을 배치하기도 했다.

40여년간 모두 8권의 시조집을 냈다. 그동안 내가 본 한국시조는 세 가지 정신이 부족해 보였다. 바로 시대·실험·비평정신이다. 나는 달리 갔다. 사내 등과 같은 기존 시조가 꺼려하던 일상의 단어를 전면에 배치했다. 연작사설시조집 ‘엮음 수심가’(2008)도 새로운 시도였다. 이때 직접 마을회관 고스톱 뒷자리에서 어르신들의 불콰하고 야설스러운 사투리 구담을 채록하듯 옮겨적은 걸 시조로 피워냈다.

고교 선배인 이재행 시인과 10년 어질어질한 명정(酩酊)의 교류를 한 것도 내 시조로선 천만다행이었다. 착해빠진 시조에 해학과 불량스러움을 주입시킬 수 있었다. 이 선배의 대표시 ‘형용사의 가을’ 같은 가을만 오면 지금도 그가 채권자처럼 내 앞에 나타날 것만 같다. 늘 술에 취해 있었던 그 사내. 비좁은 술상머리에서 격렬한 일인무를 펼치는가 하면, 술집의 어항 속 고기를 잡아 안줏감으로 삼기도 했다. 그는 늘 시비의 빌미가 되고 싸움판에 휘말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난 그의 핏속에서 의로움, 그의 시에서 순결함을 봤다. 그래서 그랬을까, 어느날 공주식당에서 그를 흉보던 어떤 자의 술상을 엎어버리기도 했다.

2009년 명퇴를 했다. 35년간 들고다닌 속세의 거죽을 벗었다. 그리고 나는 고향의 흙빛을 진행형으로 복원 중이다. 시조가 그 배후다. 6년 전 남구 이천동 거리 한 편에 ‘품’이란 골동품 갤러리를 잉태했다. 나는 늘 그 가게의 낮달로 앉아 종일 졸고 있다. 때가 되면 내 일생 또한 저승의 몫이겠지만 아무튼….

누가 “시조가 뭐냐”고 묻는다. 난 그렇게 중얼거린다. ‘시인은 감각의 허공에 뜬 거미요, 심상의 수면을 걷는 소금쟁이다. 시조는 형식에 갇힌 게 아니라 형식을 갖춘 시’라고 말한다. 시조는 그 형식 안에 우주를 담으면서 스스로 우주를 이룬다. 형식 자체가 이미 하나의 우주율이기 때문이다.

◆박기섭의 여기(餘技)

직장시절 야근 때마다 심심하면 자투리 검정 캔트지에 색연필로 낙서하는 걸 좋아했다. 그 실력이 늘어 지금은 중국집 나무젓가락으로 점묘화를 그린다. 일종의 ‘호작질화’다. 고령의 화가 이규목의 집에서 열리는 빈둥거리는 화첩놀이 때 내 여기도 좀 빛을 발한다.

골동품 또한 내 시조의 연장이다. 골동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서울 장안평·황학동 골동품거리를 갔다가 한 도자기 전문점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주인이 고배율 돋보기를 내밀었다. 도자기에 도사린 잔금(빙렬)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당장 송나라 주전자 한 점과 중국 대나무 퇴침을 구입했다. 그렇게 30년 이상 사모은 게 2만점이 넘는다. 처음에는 다듬이, 방망이, 반닫이, 장롱 등 민속품에 매료됐다. 이후 광복 직후 귀한 시집, 초등학교 교과서, 대구지역의 1세대 서양화가 그림, 그리고 수백점의 옹기 등에 맘이 갔다. 골동품은 시조와 다를 바가 없다. 골동품이 오래된 형식이지만 거기에 새로운 생각을 담을 수 있다. 오래된 새로움이 바로 골동품이고 그게 시조라 믿는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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