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경호원이었던 나를 가수로 다시 돌려놓은 이는 아내였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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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9-19   |  발행일 2014-09-19 제34면   |  수정 201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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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감동시키려고 하지말고 하늘을 감동시키는 음악을 하라’고 당부하는 아내 덕분에 한치영은 지난 20여년 집없는 나그네 가객의 삶을 통해 음악의 본질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최근 15번 이사를 한 끝에 지리산 발치에 소박한 안식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영롱한 아침 햇살을 관객으로 앉히고 싱어롱하고 있는 부부는 현대인에게 삶에 있어 진정 소중한 가치가 뭔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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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에 살 때 집 앞 한 재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초등학교 4학년인 태주와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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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흙피리 소년’으로 유명해진 외아들 한태주.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음악에 전념해 만든 2002년 첫 오카리나 창작집 ‘하늘연못’이 5만여장 팔리는 바람에 떠돌던 부부는 지리산 자락에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생애 첫 직장은 청와대 경호실.

제대 무렵 거기로 불려갔다. 경호실 업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개인의 삶이 전혀 없다. 나는 얼떨결에 청와대에 왔는데 집안에선 잔치를 했다. 당시는 군부독재 시절, 누가 청와대 직원이라고 하면 웬만한 건 다 무사통과. 심지어 친척이 경찰에 잡혀가도 다 풀려났다.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아내와의 두 번째 중매 자리였다. 아내는 광주학살 충격 때문에 세상과 담을 쌓고 있었다. 나 역시 청와대에 잘못 온 것이라 생각하면서 고뇌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는 연약해 보이지만 굳건한 성정을 갖고 있었다. 나를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사람은 멍청하지 않은데 왜 그렇게 이상한 집단에 들어갔냐’고 힐책했다. ‘나도 괴로워하면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아내의 다음 일격이 날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든다. ‘진정한 용기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호관 생활이 1년 넘으면 함부로 퇴직하기 어려웠다. 11개월 만에 짐을 쌌다. 대타로 온 경호관은 미얀마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 때 현장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1986년 아내와 결혼을 하면서 나는 구름 속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완전한 백수였지만 음악은 부자였다. 하지만 음악적 열정만 ‘100’이지 정작 실력은 ‘0’이었다. 서른을 넘어섰다.


# 음악을 그만두고 싶었을 때 아내가 늘 쓴소리를 했다. “당신은 과연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음악을 했느냐”고. 절대로 음악만은 포기하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주문이었다


# 3년전 가족동요 음반을 내면서 어디에도 연연해 하지 않고 그냥 노래 부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 오카리나 연주가인 아들 태주는 나보다 몇 배 더 유명하다. 이 녀석은 온전히 자연 속에서 컸다. 아들을 위해 술과 담배도 끊었다.


◆넌 아직도 음악 하냐

경기도의 한 헛간 같은 전셋집에서 신혼살이를 했다. 사글세가 2만5천원이었다. 둘 다 직장이 없었다. 아내는 친정에서 용돈을 보내주는 것도 거부했다. 나보다 더 자존심이 강했다.

친척과 지인들은 ‘넌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음악 하냐’는 표정을 보냈다. 보다 못한 아내가 인류가 기억해야 될 1천1곡이 수록된 명곡집을 안겨줬다. 통달해라고 명령했다. 배수진을 쳐라는 말이다. 한 곡 한 곡 가슴으로 품었다. 지상에 그렇게도 아름답고 경이로운 곡이 많은데 나는 그걸 모르고 몇 곡만 갖고 깐죽대고 폼잡고 나녔다.

86년쯤 국내에 신시사이저 붐이 인다. 일본 KORG사 한국 총판에서 마케팅 직원으로 잠시 일을 한다.

경기도 원당의 한 서민 아파트로 들어갔다. 거기서 완전 백수가 된다.

하지만 대박 가수에 대한 꿈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경기도 성남시 청계산 시절 근처에 오아시스 레코드사 사무실이 있었다. 그 어떤 음반기획자도 불러주지 않았다. 승부수를 걸 수밖에 없었다. 가정용 음향기기를 갖고 11곡의 노래를 테이프에 녹음했다. 당시 내 몰골은 나무꾼 같았다. 그 차림으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가 거세게 날 제지했다. 내가 강변가요제 금상 수상자라고 얘기해도 믿지 않았다. 끝내 문예부장과 독대할 수 있었다. 내 음악을 들은 부장이 이틀 뒤 음반을 내자는 제안을 한다. 그 유명한 여가수 임희숙도 내 옆방에서 녹음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하루 만에 11곡을 다 녹음해버렸는데 임희숙은 21번째 수정 녹음 중이었다. 난 속으로 ‘조용필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1집 음반 ‘유정무정’은 음반시장에 그 어떤 반향도 불러 일으키지 못한 채 사장된다. 단지 음반만 내는 데 혈안이 됐지 이를 둘러싼 음반시장의 속성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아내와 공동체마을 운동을 벌이기 위해 충청도의 한 산골로 들어갔다. 그런 어느 날 내 1집 음반을 접한 들국화의 리드보컬 전인권한테서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용수철처럼 상경했다. 록그룹 백두산의 기타리스트 김도균과 포크가수 강산에 등도 함께 경복궁 근처 ‘카페 전인권’에서 만나 소말리아 난민 돕기 프로젝트 음반제작에 들어간다. 하지만 후원자와 마찰로 불발이 되고만다. 하지만 전국을 돌며 실컷 내 노래는 할 수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생계는 여전히 바닥.



◆전라도의 대표 머슴이 된 부부

전남 해남으로 내려갔다.

생계비를 벌기 위해 6년쯤 별의별 일을 다해야만 했다. 당시 아내가 만들었던 친환경 미숫가루는 도시인에겐 최고의 이유식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남이 시키는 일만 했는데 그때부터 스스로 일을 찾았다. 농번기에는 모내기도 하고 양파·감자·고구마·당근도 캤다. 도금 공장에서 막일을 하고 대나무를 갖고 죽염도 만들어 팔았다. 신혼초 서로 음악 외에는 그 어떤 일도 하지 말자고 약속했는데, 해남에서 그 생각이 박살난다. 전라도의 대표 머슴이 된다.

하지만 음악 전선은 여전히 냉랭했다. 음반만으로 먹고 산다는 게 더 이상 어려워진 이 불합리한 세상. 나는 속으로 ‘1천만원만 벌면 음반 만들어 공짜로 나눠줘버리자. 그게 이 놈의 세상에 대한 유일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절대 음반만은 상업적으로 팔지말자고 다짐한다.

음악을 접으려고 하던 순간 서울의 한 편곡자한테서 연락이 온다. 모 기획사 사장이 1집 음반에 관심을 보이니 상경하란다. 역시 참새는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는 모양이다. 날 알아주는 사람이 생겼으니 상경할 수밖에. 아내는 날 한심한 듯 쳐다봤다. 하지만 2집 제작을 눈앞에 두고 음반사 사장은 부도가 나서 잠적해 버린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몇몇 뮤지션이 합심해 내 음반을 내주겠단다. 하지만 세상 물정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아내는 속으로 ‘저 음반도 망해버려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오아시스에서 펴낸 2집 ‘이것 참 잘 되어야 할텐데’이다.

2집은 1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어킨다. 사회풍자적 가사 때문에 드라마에도 삽입되기도 한다. 덕분에 생애 첫 단독 콘서트를 김민기가 운영하는 소극장 ‘학전’에서 갖는다. 가요계에선 그를 ‘돌아 온 코리안 록’으로 주목한다. 그 어름 배고픈 후배 가수 윤도현과 초고음가수 김경호 등도 날 찾아와 선배, 선배하면서 부러워 했다.

그때 뭔가 깨달은 게 있다.

음악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확신이 부족하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타인은 뭔가 있는 줄 착각한다. 그래서 다들 주죽이 든다. 그렇다 보니 콘서트장 대기실에선 다들 남에게 먼저 인사를 못한다. 난 먼저 인사를 했다. 하지만 나는 음악만 알았지 세상은 몰랐다. 음반사 없이 혼자 가자고 다짐한다.


◆광개토대왕을 노래하다

조용필은 부산에서 시작해 서울로 입성했다.

나는 제주도에서 시작해 서울을 습격하자고 작정한다. 전국투어콘서트를 시작했다. 앰프를 들고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갔다. 제주도관광공사를 찾아 노래할 무대를 찾았다. 중문단지에 있는 한국콘도를 찾아가서 내 음반을 내밀면서 노래할 무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피서객과 함께한 무대는 대박이었다. 대구MBC FM ‘별이빛나는 밤에’를 진행하는 유진혁 DJ가 나를 초대가수로 불렀다. 서울에선 김광한 DJ 프로에도 출연했다. 그것뿐이었다. 저작권문화가 전무한 시절이었다. 내 음반을 내놓고도 정작 내가 필요한 음반은 내 돈을 주고 구입해야 할 정도였다.

IMF 외환위기 때 고구려 전문가인 윤명철 박사를 만날 수 있었다. 2000년에 발표한 4집 대표곡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해양교섭사를 연구하여 학위를 받고 30여년 수많은 뗏목항해와 동굴탐험, 오지답사 등을 한 윤 박사의 시를 갖고 작곡했다. 윤 박사는 역사 마인드가 거의 없는 나에게 역사의 소중함과 함께 고구려 역사의 본질에 대해 한 수 가르쳐주었다. 기타리스트이자 내 친구인 김광석과 의기투합해 음반제작에 나선다. 천신만고 끝에 나온 4집은 시장마인드 부족으로 인해 또 사장된다.

세 번째로 음악 포기를 깊게 고심한다.

‘한다, 안 한다’를 오가는 나를 뒤로 밀쳐낸 아내. ‘흑기사’처럼 전면에 나선다. 아내가 이런 지적을 한다. ‘당신은 지금껏 쓸데없는 음악만 했다. 진짜 음악은 사람의 맘을 어루만져줘야 하는데 당신 음악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고 분석한 것이다. 아내는 모두 어려운 시절, 우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를 되묻는 그런 수준의 노래를 주문했다.

그동안은 드럼이 들어간 밴드 스타일 음악이었지만 4집 ‘우리들의 시인’은 전과 달랐다. 전자음을 배제했다. 어쿠스틱했다. 진정한 자작음반 1호였다. 우리가 직접 홍보를 했다. 그런데 힐링붐을 타고 명상원, 찻집 등에서 내 음악이 잔잔한 입소문을 탄다. 놀랍게도 5천여장이 팔린다. 답답한 남편 때문에 아내는 음반제작자가 된다. 우린 방송국을 철저히 무시한다.


◆아직 너는 힘을 빼지 않았다

신동엽이 작시한 ‘조국’이란 노래가 있다.

40대 중반의 어느 날 경남 하동문화예술회관 공연 때 비장한 이 노래를 열창했다. 너무나 비장한 노래였다. 내 목소리엔 형언하기 힘들 정도의 힘이 들어가 있었다. 관객은 억지로 듣는 척을 했지만 모두 경직돼 있었다. 절정부에서 피를 토하듯 조국을 외쳤다. 그 순간 한 아이가 그 소리에 놀라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순간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내 음악은 아이를 울리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햇살처럼 밝은 음악을 하자고 다짐한다.

나보다 몇 배 더 유명한 아들 태주.

그 놈은 스스로 정규교육을 거부했다. 흙피리(오카리나)만 품고 우리 부부를 붙들고 자기 음악세계를 탐구해갔다. 2002년 첫 오카리나 연주곡집 ‘하늘연못’은 5만여장이 팔렸다. 태주 때문에 전국에 오카니라 교육 붐이 일어났다. 덕분에 지금 흙집에 살 수 있게 됐다. 대표곡 ‘물놀이’ 등 몇 곡은 드라마, 영화, 광고음악 등에 삽입됐다. 음반 관계자가 저마다 ‘키워주겠다’고 군침을 흘렸지만 난 화가 나서 ‘야, 네 자식이나 잘 키워’라며 각종 제의를 잘라버렸다. 나와 달리 태주 음악은 너무나 맑았다. 나는 아들을 위해 술과 담배도 버렸다. 난 아들에게 내가 가진 모든 음악적 자산을 다 주었다. 사계절의 변화와 음악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민하도록 도와줬다. 2집에선 사람의 소리를 찾도록 하기 위해 인도로 장기 여행도 보내줬다. 3집을 준비하면서 클래식 공부도 시켰다. 나도 그때까지 클래식에 대해 정통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들은 자연의 힘 때문인지 너무나 쉽게 지식을 습득해버렸다. 아들이지만 질투가 났다. 작곡 수업을 위해 명시 100편도 외우게 했다. 2011년 싱어송 라이터로 변신한 태주가 ‘첫비행’이란 창작집을 발표한다. 이제 태주는 다시 오카리나로 돌아왔다. 6집을 준비하고 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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