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劇場 .10] 한때 ‘한국 포크록의 대표주자’였던 사내…심산유곡서 ‘힐링의 음악인생’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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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9-19   |  발행일 2014-09-19 제33면   |  수정 2014-09-19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지리산 가수’ 한치영
“이제 내 노래는 바람과 구름이 전하는 편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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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집 앞 너럭바위에 앉아 멀리 지리산 연봉을 배경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지리산 가수 한치영(58). 한때 유명 가수가 되고 싶어 했지만 이젠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을 지리산 바람에 씻어내고 가슴이 날로 황량해지는 아이를 위해 가족동요 부르기에 올인하고 있다. 맨 오른쪽 궁둥이 모양의 산이 지리산 반야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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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강변가요제 금상 출신으로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결국 자기 음악을 믿는 아내와 음악에 승부수를 건 외아들 덕분에 그는 세속적 욕망을 버릴 수 있었고 이로인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가장 깊은 울림의 노래를 얻을 수 있었다.


82년 강변가요제에서 금상도 타봤 고 천하의 전인권과 함께 노래도 불 러봤다. 그때까지 내가 대단한 줄 알았다. 그런 착각이 음악을 왜곡시키고 뮤지션을 고사시킨다는 걸 나 이 쉰이 넘어서야 깨닫게 됐다.”

지리산.

누구만의 언저리는 아닐 터.

모두의 산이지. 지리산으로 몰려든 숱한 예술가와 현대판 도사, 약초연구가, 귀농인, 명상가…. 지리산은 계룡산이나 태백산과 차원이 좀 달라. 지리산족은 자신이 떠나온 도시의 아픔에 귀를 기울인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는 지리산에서 가족을 위한 동요나 부르면서 ‘옥수수 하모니카’처럼 산다.

다들 날 ‘우릉 아저씨’라 부른다. 우릉이란 천둥소리 ‘우르릉’의 준말이다.

한때 강변가요제에서 금상도 타 봤고 내 음색을 좋아하는 전인권 등과 함께 노래도 불러봤다. 한 음악평론가는 날 ‘한국 포크록의 대표주자’라고 극찬도 했다. 하지만 이젠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대표·최고·1인자와 같은 말은 결국 음악을 왜곡시키고 뮤지션을 고사시킨다. 그냥 음악이 아니면 죽을 것 같은 심정이면 족하다. 그 간절함과 진정성이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여겨야 음악은 완성된다.

대한민국에서 결혼한 사내가 음악만 품고 40년 이상 한 길을 걷는다는 것. 단언컨대 ‘대박’이다. 음악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것, 이게 대박으로 대접받아야 한다. 쉰 넘어 그걸 깨달았다.

그룹사운드의 길은 형극 중 형극이다. ‘한국의 비틀스’를 꿈꾸던 1970~80년대 수천개의 밴드는 안개처럼 증발해버렸다. 사랑과 평화의 이철호, 부활의 김태원, 시나위의 신대철, 백두산의 김도균을 비롯해 프리랜서 기타리스트 김광석과 함춘호 정도만 겨우 버티고 있지만 다들 음악을 포기했다.

죽을 때까지 음악 하려면 아내가 전폭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난 ‘천복’을 타고 났다. 한때 서울의 일급 호텔에서 전자오르간을 쳤던 아내(김경애)가 나와 결혼을 하면서 내게 던진 간곡한 주문이 있다.‘절대 음악만은 포기하지 마라’는 것과 ‘밥벌이를 위해 밤무대에 서지 마라’는 지엄한 당부다. 대한민국에 과연 이런 여자가 있을까 싶다. 국내에서 오카리나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를 한 오카리나 연주가인 외동 아들 태주(25)도 부부를 닮은 듯 참 당차게 산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우린 그냥 허락했다. 태주는‘지리산 흙피리 소년’이란 닉네임을 갖고 음악만 판다. 2005년 11월5일부터 무려 187회 방영된 KBS1 여행프로인 ‘걸어서 세계속으로’의 테마곡 ‘물놀이’도 태주가 작곡했다. 그 놈은 분명 자연의 선물이다. 오카리나 연주 외에도 피아노와 기타, 노래는 물론 작사·작곡·편곡까지 1인 다역을 해낸다.


◆목포 촌놈 서울에서 왕따를 당하다

난 전남 목포 촌놈.

국민학교 2학년 때 서울 서부역 근처에 있던 미동국민학교로 전학을 왔다. 전라도 사투리는 졸지에 서울말에 감금돼 왕따를 당하기 시작한다. 왕따의 환부를 치료해준 건 음악이다.

다른 뮤지션처럼 나의 음악적 사부는 라디오 뮤직스타. 70년대 중반 디스코 돌풍의 기폭제 구실을 했던 영국 출신 3인조 록그룹인 ‘비지스’. 나의 우상이었다. 특히 ‘매사추세츠’란 곡은 날 뮤지션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이었다. 라디오에 나온 노래는 한글 발음을 달아 달달 외었다.

어찌어찌 해서 국민대 경영학과에 들어간다.

당시 대학생에겐 ‘로망’이 있었다. 바로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였다. 대학가요제는 조금 아마추어틱한 구석이 있었고 강변가요제는 ‘꾼들의 무대’였다. 더욱 프로스러웠다. 당시엔 3인조 트리오가 유행이었다. 나도 한국의 비지스가 되고 싶었다.

82년 제3회 MBC 강변가요제에 출전한다. 밴드 이름은 ‘결사대’, 건국대 이길우와 홍익대 정홍택과 손을 잡았다. ‘나빠’란 곡으로 금상을 차지한다.

그런데 대상팀 멤버 2명이 입대하는 바람에 밴드활동을 할 수 없었다. 자연히 금상팀이 대상팀처럼 대우받는다. 영11, 짝꿍들 등 공중파 뮤직프로에 단골로 출연한다. 결사대가 나타나면 방청석은 뒤집어졌다. 곳곳에서 “오빠”를 연호했다. 어떻게 보면 국내 ‘오빠부대’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온갖 음반기획자와 편곡자·뮤지션이 날 주목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한 선배가 날 처참하게 비판했다. ‘너 같이 험하게 기타를 다루는 놈들 때문에 한국음악이 요 모양 요 꼴’이라고 퍼부었다. 그때 그 선배가 진정한 뮤지션이 뭔지를 가르쳐주었다. 삼류는 관객은 냉정한데 혼자 오버하면서 열광한다. 일류는 자기는 냉정하면서 관객을 열광시킨다. 저급과 고급의 차이가 뭔지를 알려준 것이다. 내 음악이 자신이 없었다. 너무 부끄러워 서둘러 팀을 해체해버렸다.

그때까지 내가 대단한 줄 착각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보니 음악의 대가가 즐비했다. 나는 그냥 ‘옹알이’ 수준의 음악을 하고 있었다. 뭐랄까, 가요제 금상은 손주의 재롱에 불과했다. 선배의 음악을 정독하면 할수록 내 음악이 ‘쓰레기’ 같았다. 큰 충격이었다. 모두 날 비웃는 것 같았다.

지리산만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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