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뮤지션이다…음악으로 시장경제에 저항하는 자립시민이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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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1-23   |  발행일 2015-01-23 제35면   |  수정 2015-01-23
■‘제11회 한국대중음악상 3관왕’윤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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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독서와 성찰이 지루해지면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 전역을 돌아다닌다.

구미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라났다. 영남대 심리학과에 들어가 당시 한강 이남 최고의 캠퍼스 밴드 중 하나로 불렸던 ‘에코스’에서 암약했다. 나는 이미 공부해서 호의호식할 놈이 못됐다. 그런 내게 음악은 최고의 ‘최음제’였다. 브리티시록 등 음악사를 좌지우지했던 서양음악에 통달하고 싶어 종일 뮤직룸에만 쳐박혀 있었다. 기타 위에서 갈수록 암울해지는 심사를 지워나가려 애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음악이 깊어지는 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의문만 더 깊어졌다. 초보 철학가를 넘어 점차 사상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대화를 나눌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나만의 옥탑방에 고립되고 있었다. 마치 뭉크의 작품 ‘절규’ 같은 나날이었다. 햇볕을 잘 보지 못해 내 표정은 아편중독자 같았다. 암울해질수록 내 생각은 더욱 명료해져 갔다. 나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고 나는 시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가, 세상을 이렇게 복잡다단하게 만들어가는 궁극적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인류사를 관통하는 불변의 이치와 원리는 무엇인가. 내 지식의 한계, 내 호기심의 한계, 인류 문화사의 한계가 무엇인지 캐내고 싶었다. 이게 20대 젊은날 나를 사로잡은 삶의 화두였다. 밴드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다.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동상
조동익·장필순 등과 음악작업
유럽 유학 다녀온 후 제주도로
텃밭 일구고 장작 패고 자전거타고
11년째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
녹색당원·녹색평론 평생회원
“비·바람소리가
현대음악보다 몇수 위라고 생각”

어느 날 운명적인 한 권의 책을 만난다.

지구촌 첫 대안학교의 존재를 알린 A.S. 니힐의 명저 ‘서머힐(Summerhill)’이다. 영국 런던에서 약 150㎞ 떨어진 서포크 백작령의 레이스턴 마을에 위치한 서머힐은 학생이 수업을 받지 않을 권리를 존중한 100여년 역사의 혁명적 교육기관이다. 나는 그 책을 읽고 공공선과 정의, 그리고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구조에 대해 궁리한다. 한국의 어둠은 결국 왜곡된 교육 때문이고 나 역시 그 교육의 피해자란 생각을 했다. 더 이상 대학에서 할 게 없었다. 그대로 자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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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서재에는 다양한 비평서가 수북하게 꽂혀 있다. ‘일꾼없이 음악없고 음악없이 삶이 없다’는 기타 전문 제조업체 콜트 농성현장에서 발견한 이 문구를 참 좋아한다.

난 그냥 ‘고상한 딴따라’였다. 나도 모르게 당시 대한민국에서 문화 일탈의 본거지였던 서울 홍대 앞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기서 한 시절 ‘강태공’처럼 살고 싶었다. 홍대로 간 것은 더 깊은 음악을 찾고 싶은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찾고 싶어서였다. 당시 대구에선 세상의 흐름을 거시적으로 간파할 수 없었다. 홍대 앞으로 가면 다양한 문화적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직장도 없고 밴드활동도 하지 않았다.

몽상가의 나날은 홍대에서 강남으로 옮겨간다. 거기서 나와 닮은 꼴 인간들과 허교한다.

점차 작곡에 대한 욕심이 일었다.

1993년 어느 날이었다. 나를 객관적으로 체크하기 위해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 출전해 동상을 받는다. 난 그때까지도 유재하가 누군지 몰랐다. 기존 가요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운 좋게 90년대 대한민국 꼴통 뮤지션의 본거지였던 음반기획사 ‘하나음악’의 일원이 된다. 조동진, 조동익, 한동준, 장필순, 김창기(동물원의 리더), 이무하 등이 있었다.

이후 난 하나음악의 조동익, 장필순과 주로 음악작업을 해나갔다. 장필순의 역작이자 6집 음반 ‘너의 외로움이 나를 부를 때’에서 ‘스파이더맨’과 ‘빨간 자전거 타는 우체부’를, 또한 조동익의 ‘Movie’에서 ‘예예예’ ‘무더운 여름과 자전거 타기’를, 한동준과 권혁진 듀오 엉클(Uncle)의 음반 ‘그대와 함께라면’에서는 ‘7년후’를, 요즘 프랑스에서 재즈보컬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나윤선의 음반 ‘Memory Lane’에서 ‘천사’란 작사로 동참했다. 하지만 나는 갈수록 더 피폐해졌다. 음악이 ‘노동’처럼 여겨졌다.

99년 갑자기 유학길에 오른다. 유럽 최고의 명문 음악대학인 암스테르담 콘서바토리움에 도전한다. 내 곡인 ‘어쩐지 먼’과 ‘외로운 이층집’으로 응시했다. 이미 나의 음악적 욕구는 제도권에 어울리지 않았다. 자퇴한 뒤 암스텔페인 한인학교에서 강의도 하면서 2년을 보내다 귀국한다.

비빌 언덕이었던 하나음악도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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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방 한편에는 생각하는 농부답게 톱 등 각종 연장이 인테리어 소품처럼 앉아 있다.

홍대 앞 거리도 상업특구로 변했다. 내가 있을 곳이 못 되었다. 2004년 장필순이 조동익 등과 함께 제주도에 입성한다. 나도 제주도로 거처를 옮긴다. 중산간 지역에 터를 잡는다. 사시사철 땔감나무를 구비해야 하는 곳에서의 삶이 시작 되었다. 제주 산간 지역에서의 일상이 음악활동보다 더 비중을 크게 차지하게 된다. 땔감을 준비하고 마당을 쓸고 풀을 뽑고 산과 들을 다니며 먹을 것을 채집하고 텃밭을 일구었다.

10여년 전 서머힐에 이어 경이로운 잡지를 만난다. 김종철 전 영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현 발행인)가 1991년에 창간한 ‘녹색평론’이다. 인류의 지속가능한 삶의 지평에 대해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동안 나의 사상적 고민이 대부분 해결된다. 난 그 잡지의 평생회원이 됐다. 얼마 전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녹색당의 당원이 된다. 녹색당가도 재능기부로 지어주었다. 그러면서 현재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조합원이다. 또한 ‘평화통일을사랑하는사람들’의 홍보대사이기도 하다.

어떤 날에는 바람소리와 빗소리가 정교한 현대음악보다 몇 수 위란 생각이 든다. 현대음악은 그렇고 그런 멜로디, 리듬, 템포를 설정하고 거기에 자기 생각이 담긴 가사를 올린다. 그걸 놓고 우열을 정하고 더 낫고 덜 낫고를 따진다. 좀 인기 있는 곡엔 자본이 몰린다. 어떻게 보면 다들 음악을 하자는 게 아니고 다들 자기 노래로 유명해져 큰돈을 벌고 싶어한다.

난 음악생활을 한 지 17년 만에 생애 첫 음반을 내고 최근까지 석 장의 음반을 냈다.

11년째 제주도에서 빈둥거리며 살고 있다.

가끔은 구름 속 달처럼, 가끔은 개울의 나뭇잎 배처럼, 또 가끔은 인도의 수행승 또 어떤 때는 문화독립군처럼 살고 있다. 타율에서 벗어나 자립시민이 되기 위해 농사를 직접 짓고, 비싼 담배를 피해 잎담배를 직접 말아 피우고 있다. 서툰 장작질이지만 드문드문 난방비를 절약하기 위해 땔감도 마련해 둔다. 친환경 유기농을 조금 실천한 덕분에 냄새 피우지 않는 통시(화장실)도 갖게 됐다.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기 위해 자전거를 탄다. 필요한 책을 공수받기 위해 홈쇼핑으로 책을 구입한다. ‘씨드림’이란 모임체를 통해 토종씨앗을 공급받고 있다. 텃밭 채소를 갖고 불쑥 하룻밤 청하고 가는 지인을 위한 밥상을 차려준다. 솔직히 작곡하고 공연하는 것보다 한 수 위의 보람을 준다. 잡초를 전제로 한 토종 ‘태평농법’도 조금씩 전수하고 있다. 무자비한 시장경제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옷도 단벌로 버티고 세수도 줄이고 TV도 안 본다. 최소한의 규모만 유지한다. 집도 내 소유가 아니다. 누가 사용하라고 해서 대충 수리해 살고 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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