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적이지만 낯설지 않은…韓-中 그 사이 어디쯤 ‘차이나타운’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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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3-24   |  발행일 2017-03-24 제34면   |  수정 2017-03-24
■푸드로드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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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둥성에서 인천으로 넘어온 자장미엔은 훗날 캐러멜이 첨가된 춘장 덕분에 ‘한국짜장면’으로 진화된다. 차이나타운 만다복은 특이하게 100년 전 화교들이 먹던 짜장면을 선보이고 있다. 잘게 다진 닭가슴살 소스가 인상적인 만다복의 검정 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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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면장 맛이 감도는 만다복의 하얀 짜장면.

인천 차이나타운, 그리고 거기서 한국짜장면의 원형이 태동된 걸까.

중화요리(中華料理), 그것이 한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된 건 1882년 임오군란 때였다.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되찾자 민비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이때 4천500여명의 청나라 군졸들이 인천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온다. 1885년쯤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서울의 상점은 300여집. 하지만 이때만 해도 중화요릿집 전성기는 아니었다.

혈혈단신 한국으로 온 하층민 화교 ‘쿨리(苦力)’는 먹고살기 위해 좌판식 조그마한 식당을 열었다. 중국 본토도 아편전쟁, 대기근 등으로 인해 살기 어려워진다. 남은 가족들도 한국으로 이주한다.

19세기말 화교들이 내민 대표적인 중국음식은 자오쯔(餃子)와 젠빙(煎餠). 자오쯔는 원나라 지배를 받던 고려 때 들어왔는데 그때 고려인들은 ‘만두(饅頭)’라고 불렀다. 젠빙은 ‘북방 오랑캐 호(胡)가 먹는 떡(餠)’이란 뜻의 호떡이다. 만두도 몇 종류가 있었다. 물만두인 수이자오쯔, 찐만두인 정자오쯔, 군만두인 젠자오쯔 등이 주종이었다.

150t 돌 이용한 11m 높이 ‘패루’ 위용
1880년대 제물포에 정착하게 된 화교
식재료 제약에‘한국식 麵’ 짜장면 탄생
요릿집 공화춘은 ‘짜장면박물관’ 변신

신승반점·만다복 등 중화가의 식당들
원조 논란 속 특색 살린 신메뉴로 경쟁
얇은 단무지로 짜장면을 싸 먹는 별미
캐러멜 안 섞은 100년 전 맛 ‘하얀 짜장’



190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형 중화요릿집 시대가 열린다. 화교들은 1905년 인천에 공화춘을 비롯해 인천 자유공원 남측 일본인 거리에 있던 대불호텔을 매입해 북경요리 전문점 중화루를 오픈한다. 이 중화루가 최초의 매머드 중화요릿집으로 불리고 이때부터 청요리 전성시대가 시작된다. 이후 선린동 주변에 치외법권과 무역활동을 인정받는 청국조계지(淸館)가 형성된다. 이게 오늘의 차이나타운이다. 쿨리가 이국에서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면요리가 바로 짜장면이었다. 식재료 제약으로 인해 중국에도 한국에도 없는 새로운 스타일의 짜장면이 탄생한 것이다.

◆도깨비가 짜장면을 만났을 때

다들 패루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다. 차이나타운의 명물이 된 중화가 패루는 인천시와 우호도시 관계인 중국 웨이하이(威海)시가 150t의 돌을 이용해 11m 높이로 만든 것.

월요일이라서 다소 한산했다. 하지만 주말은 투어객 때문에 떠밀려 다녀야 된다. 지난 1월21일 종영이 된 tvN 금요드라마 ‘도깨비’ 특수 탓이다. 인천관광공사는 대놓고 ‘인천도깨비여행’이란 상품을 론칭했다.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여수 밤바다’ 때문에 촉발된 여수 관광특수와 진배없다. 1회에 소개된 송도 ‘동북아무역센터(NEATT)’, 3회에서 책들에 둘러싸인 도깨비의 실루엣과 따뜻한 햇살이 부딪쳐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던 배다리 헌책방인 ‘한미서점’, 4부에 나온 도깨비가 등장한 서구 ‘청라호수공원’, 대한통운 창고를 개조한 ‘인천아트플랫폼’ 등은 이미 전국구 포토존으로 변모했다.

출출해진 투어객이 맨 먼저 찾는 음식은 당연히 차이나타운의 짜장면. 맛이야 자기 동네와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투어객은 ‘여기만이 진짜 짜장면 특구’라고 애써 믿는다. 인천화교협회 고창신 고문은 “짜장면이라는 음식 하나로 동양 3개국과 서양의 만남이 이뤄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가게 앞 매니저에게 “여기가 짜장면 1번지가 맞냐”고 하면 다들 “그렇다”고 말한다. 그들 대다수는 짜장면 역사를 잘 모른다. 그냥 조건반사적으로 그렇게 물으니 그렇다고 앵무새처럼 대답할 뿐이다. 공화춘은 물론 할아버지의 가업을 잇고 있는 ‘신승반점’, 춘장으로 만든 소스가 아닌 닭고기 육수와 중국된장에 볶은 고기를 면과 함께 섞어먹는 ‘하얀짜장’ 전문점 ‘만다복’ 등은 차이나타운 3대 짜장면집으로 소문 나 줄서지 않으면 제때 먹기 힘들다.

짜장면의 상징인 공화춘은 83년 폐업된다. 현재 ‘짜장면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공화춘 외부는 벽돌로 마감해 아주 단단해 보인다. 1전시실에선 짜장면 탄생사, 2전시실은 30년대를 재현한 공화춘 접객실, 제5전시실은 춘장의 진화, 7전시실은 주방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은 대구 종로 화교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특수를 누린다. 2천여명의 화교가 거주하며 40여 곳에 달하는 중국음식점과 특산품점이 깔려 있다.

◆1급 청요릿집인 공화춘

공화춘은 일제강점기 대구의 대표적 청요릿집이었던 군방각(모문금씨가 개업했고 68년쯤 종로호텔로 바뀐다)과 비슷한 포스다. 그때는 1급 청요릿집으로 불렸다. 서울의 태화관처럼 기관단체장, 기업가, 고위관료 등 지역의 오피니언리더가 이용하던 고급 사교클럽이었다.

중국 산둥성 무핑(牟平)현 출신의 조리사 위시광(于希光·1886~1949)은 ‘산동회관’이라는 숙박시설 겸 상인들의 만남의 장소인 ‘객잔(客棧)’을 운영했다. 중국 신해혁명으로 청조국의 전제정치가 막을 내리고 공화정을 표방한 중화민국이 탄생하자 ‘공화국에 봄이 왔다’는 뜻을 담아 1912년경 업소 명칭을 공화춘으로 바꾼다. 6·25전쟁 중 영업을 중단하기도 했으나 휴전 후 우홍장이 공화춘을 인수해 68년쯤 인접 건물을 매입하며 70년대까지 그 명성을 유지했다.

그런데 2003년 2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 벌어진다. 강원도 출신의 프랜차이즈 전문가 최완배씨가 화교들의 맘을 움직인 것이다. 그들의 묵인하에 공화춘 브랜드를 소유한 데 이어 전국에선 처음으로 중화요리 체인망을 구축한 것이다.

‘공화춘 원조설’에 대해 이의를 제시하는 시각도 있다. 그걸 입증하기나 하듯 공화춘 개업 연대부터 부정확하다. 1895년설부터 1905년설, 1907년설, 1912년설 등이 있다. 한양대 중문과 연구교수인 양세욱 교수는 ‘짜장면뎐’(프로네시스 펴냄)이란 책을 통해 인천발 짜장면 스토리텔링의 허와 실을 되짚는다. 그럼에도 여러 정황으로 미뤄 짜장면이 인천 개항 후 청국 조계지에서 처음 선보인 것에 이론을 제기하는 전문가는 없다.

◆공화춘의 명맥 잇는 식당

차이나타운 입구 중화가로 들어서자마자 오른편 작은 골목에 사람들이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는 곳이 있다. ‘신승반점’이다. 원조 공화춘을 운영했던 위시광의 외손녀 왕애주씨가 가업을 잇고 있다. 이곳의 대표 메뉴 유니짜장은 일반 짜장과 달리 고기와 채소를 잘게 썰어 목넘김이 부드럽다. 종이처럼 얇은 단무지로 짜장면을 김으로 밥 싸먹듯 후루룩 넘기면 그 맛도 일품이다.

98년 공화춘 재건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현대 대표는 2004년부터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공화춘이란 중화요릿집을 운영하고 있다. 위시광의 공화춘과는 다른 업소다.

이번 짜장면 기행 중 가장 인상적인 맛은 캐러멜을 섞지 않은 100년전 그 짜장 맛을 보인다는 ‘만다복’의 하얀짜장이었다. 이 집은 간짜장 스타일이다. 맛도, 향도 다른 집과 확연히 구별된다. 7천원짜리 검은색 일반 짜장에는 잘게 다진 닭가슴살이 들어간 ‘첨면장(甛麵醬)’이 따로 나온다. ☞ W3면에 계속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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