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초기 왕위계승의 수수께끼 신라의 초기 왕실은 다른 나라의 왕실과 아주 다르다. 동서고금을 막론 하고 모든 왕실은 일개 성씨가 왕위를 계승하지만 신라 왕실은 박씨·석씨 ·김씨의 세 성씨가 교대로 왕위에 올랐다. 시조 혁거세부터 3대 유리 이 사금(尼斯今)까지는 박씨였으나 4대 탈해 이사금은 석씨였다. 5대 파사 이사 금부터 다시 박씨가 왕위에 올라 8대 아달라 이사금까지 계속 되다가 9대 벌휴 이사금대에 오면 다시 석씨가 왕이 되어 12대 점해 이사금까지 계 속된다. 그러다가 김씨인 미추 이사금이 13대 국왕이 되었다가 다시 14대 유례 이사금부터 16대 걸해 이사금까지는 다시 석씨가 왕위에 오른다. 17대 내물 마립간부터는 김씨가 왕이 되어 끝까지 계속된다. 이런 특이한 왕위계승은 일인 식민사학자 스에마츠(末松保和)에게 내물 마립간 이전의 왕명과 왕모, 왕비는 모두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게 했는데, 이런 그의 주장은 일부 한인 학자들에게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세 성씨가 교대로 임금이 되었다는 사실이 조작이란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세 성씨의 등장과 교체 과정을 합리적으로 해석하 는 일이 더 중요할 것이다. 2대 남해 차차웅(次次雄)은 혁거세의 적자인데, 차차웅은 제사장〔巫〕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삼국사기 ‘남해 차차웅조’는 김대문(金大問)의 입 을 빌려 ‘세상 사람들은 제사장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므로 외경(畏 敬)한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신라 국왕이 제정일치의 기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 남해왕 때 바로 석탈해(昔脫解)가 등장하는데, 남 해왕은 재위 5년(서기 8년) ‘탈해가 어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장녀 를 주고, 재위 7년에는 ‘대보(大輔)’에 임명해 군국과 정사(軍國政事)를 맡게 한다. 그는 심지어 죽기 직전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내가 죽 으면 너희 ‘박’ ‘석’ 두 성 중 연장자가 왕위를 이어라”고 유언한다. 이는 나이 많은 탈해에게 왕위를 넘기라는 명령이었다. 이에 따라 태자 유리는 부왕 남해가 재위 21년(서기 24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대보 탈 해가 원래 덕망이 있다’는 이유로 왕위를 양보하려 한다. 그러나 탈해가 “신기대보(神器大寶:왕위)는 나같이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라며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으니 떡을 깨물어 시험하자고 제안한다. 시험 결과 유리의 잇금이 더 많아 그를 왕으로 올리고 왕호를 잇금〔齒理〕이란 뜻의 이사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석탈해는 유리 이사금이 재위 34년(서기 57년) 만에 사망하자 유리의 두 아들 일성(逸聖)과 파사(婆娑)를 제치고 62세의 나이로 임금이 되었다. 이런 석탈해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그의 출신지를 ‘왜국(倭國) 의 동북쪽 천리 떨어져 있는 나라’라고 공통적으로 적고 있는데, 정작 그 국명에 대해서는 ‘다파나국’(삼국사기), ‘용성국’(삼국사기)이라고 달리 기록하고 있다. 석탈해에 대한 모든 기록은 그가 가야와 관련이 있음을 전 하고 있어 흥미롭다. 삼국사기는 석탈해 역시 박혁거세처럼 알에서 태어났는 데 당초 궤속에 넣어져 금관가야(가락국)에 닿았으나 가야 사람들이 받아들 이지 않자 다시 신라로 향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가락국 바 다 한 가운데 배가 와서 정박하자, 수로왕이 신민들과 함께 북을 울리며 떠들썩하게 영접하면서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그 배는 나는 듯이 달아났다 ’고 기록해서 삼국사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내용과는 반대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탈해가 수로왕과 싸우는 기사가 있다. 완화국 함달 왕의 아들인 탈해는 수로왕의 왕위를 빼앗으려다가 거부당하자 술법으로 겨 루자고 제의한다. 탈해가 매로 변하자 수로왕은 독수리로 변했고, 탈해가 참새로 변하자 수로왕은 새매로 변해 한 수 위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패배 를 자인한 탈해가 뱃길로 떠나자 수로왕이 배 500척을 보내 추적하다가 그 가 계림(신라) 영역으로 들어가자 그냥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실제로 석탈해는 재위 21년(서기 77년) 아찬 길문(吉門)이 황산진구(黃山津口:낙동 강 하구)에서 수로왕의 가야군과 싸워 1천여 명을 사로잡는 격전을 치렀으 니 그가 가야와 적대적이었던 점은 사실로 입증된다. 탈해의 출신지인 ‘왜국 동북쪽 천리’인 다파나국이나 용성국, 혹은 완 화국이 현재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기사들은 그가 바다를 건너 온 해양세력임을 말해준다. 박혁거세가 말을 타고 온 유목세력 출신임을 감 안하면 석탈해가 해양세력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신라 왕실이 유목세력, 즉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연합으로 구성된 상황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잇금 을 재보는 행위 등이 두 세력의 전쟁을 말해주는 것인지는 해석하기 나름 이겠지만 어쨌든 석탈해는 유리왕이 자신의 장녀를 주어야 할 정도로 무시 하지 못할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석씨는 이런 실력을 바탕으로 박씨와 함께 신라 왕실의 중요한 축이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왕실 세력이 김씨 세력이다. 김씨 세력은 탈해 이 사금 때 등장하는데, 삼국사기는 석탈해 9년(서기 65년) 금성 서쪽 시림(始 林) 나무 사이에서 닭이 홰치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작은 금궤가 나뭇가지 에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닭이 울고 있었으며 금궤에서 사내아이가 나 왔다고 전하고 있다. 탈해왕은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내게 주는 아들이 아 니냐?”라면서 거두어 길렀는데, 그가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서 알 지(閼智)라고 부르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고 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를 기념해 ‘시림을 고쳐서 계림이라 개명하고 이를 국호 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알지가 바로 13대 미추(味鄒:재위 262∼ 284) 이사금의 5대조이다. 삼국사기 ‘미추 이사금조’는 ‘알지가 세한(勢漢 )을 낳고 … 수류(首留)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았으 니, 구도가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라고 그 계보를 적고 있다.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閼英)은 알지(閼智)와 첫 음절이 같아 주목된다. 또 알영은 입술이 닭부리같이 길었는데, 월성 북쪽 냇물에 가서 목욕을 했 더니 부리가 떨어졌다고 전한다. 이는 알지가 등장할 때 닭이 등장한 것처 럼 같은 종류의 닭 ‘토템’인 것이다. 그래서 알영과 알지가 같은 김씨 부족이라고 보는 견해가 등장하는 것이다. 김알지가 처음 등장했을 때 탈해왕은 ‘하늘이 준 아들’이라며 국호까 지 계림으로 바꿨지만 막상 탈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인물은 김알지가 아니라 2대 유리왕의 둘째아들 파사왕이었다. 석씨도 아닌 박씨가 다시 왕 이 된 것이다. 그러나 파사왕의 부인이 허루(許婁) 갈문왕(葛文王)의 딸 사 성부인(史省夫人) 김씨인 점은 김씨와 박씨의 결혼동맹의 결과로 파사가 즉 위했음을 해석하게 해 준다. 그런데 이 김씨는 어디에서 왔을까? 김씨의 기원을 흉노족에서 찾는 견 해는 일찍부터 존재하면서 많은 관심을 끌어왔다. 이와 관련해 태종무열왕의 아들인 30대 문무왕(제위 661∼681)의 비문에 자신을 ‘투후 제천의 자손 〔?侯祭天之胤〕’이라고 밝힌 것은 주목할 만하다. 투후는 전한서(前漢書)에 따르면 흉노족 휴도왕(休屠王)의 태자 김일제(金日?)인데, 그는 일단 간략 하게 소개하면 부왕 휴도가 살해된 후 한나라의 포로가 되었다가 한 무제 의 신임을 얻어 투후에 봉해진 풍운아 같은 인물이다. 김일제의 어머니, 즉 휴도왕의 부인의 성도 공교롭게 알씨(閼氏)라는 점에서 김씨와 알씨 사 이의 상관관계도 주목된다. 김씨와 흉노의 관계는 나중에 따로 다룰 예정이 다. 만약 김씨의 이런 기원이 박씨처럼 북방 기마민족이라면 두 세력이 서 로 격렬하게 싸우기보다는 협력을 지향했던 이유가 분명해진다고 할 것이다. 이들 북방 유목세력이 남방 해양세력과 연합해 신라의 왕족이 되어 천년 왕국을 이끌고 간 것이다. 신라가 고구려에 막혀 대륙 진출은 좌절되었다고 해도 강한 해양지향성을 띠었던 이유에 대한 설명은 충분한 것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 갈문왕이란?
5대 파사 이사금의 부인이 허루 갈문왕의 딸이란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신라사에는 갈문왕이란 특수한 신분이 존재한다. 일연이 삼국유사 ‘남해왕조’에서 ‘신라 사람들은 무릇 추봉자(追封者)를 갈문왕이라고 일컬 었으나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라고 쓴 것처럼 그 자세한 내용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박씨왕 시대의 갈문왕은 주로 왕비의 아버지였는데 이는 왕 비족과 유대를 강화해 왕권의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며, 형 제 상속이 많았던 석씨왕 시대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의 아버지나 왕 의 외할아버지가 책봉되었다.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었던 눌지마립간 이후에는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났던 왕의 동생들이 주로 갈문왕에 책봉되면서 그 권한 이 약해졌던 점 등 그 내용과 기능을 추측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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