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신라사는 제17대 내물왕(356∼402)이 만능 키의 역할을 하고 있
다. 신라사의 여러가지 문제가 내물왕 때 한꺼번에 해결된다는 것이다.
현재 사용 중인 고등학교 ‘국사’에도 이런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4세기 내물왕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지역
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계승권이 확립되었다. 또한 왕의 칭호도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고등학교 국사 50쪽)
내물왕 때 신라는 진한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김씨에 의한 왕위세습권을
확립하며, 마립간이란 칭호를 사용했으며 다른 집단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네 가지 내물왕의 업적 가운데 ‘삼국사기’
기록과 일치하는 내용은 김씨에 의한 왕위세습권밖에 없다.
먼저 진한정복 기사를 검토해보자. ‘삼국사기’는 물론 ‘삼국유사’에도
내물왕 때 진한을 정복했다는 기록은 없다. 삼국유사에는 박제상과 관련한
유명한 이야기가 실려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도 마찬가지이다. 삼국사기
‘내물왕조’의 전쟁 기사는 세 차례인데 재위 9년과 38년, 신라를 침략한
왜병을 물리쳤으며, 40년에는 북쪽 변경을 침략한 말갈을 물리쳤다고 기록
되어 있다. 백제와는 재위 11년과 13년 우호관계를 맺을 정도로 사이가 좋
았다가 18년에는 300여명의 백제인들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근초고왕의 항의를
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재위 26년 봄에 전진(前秦)의 부견에
게 위두를 사신으로 보내고, 재위 37년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는데, 실성이 46년 7월 귀환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
다.
진한을 정복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지난 호에 기술한대
로 신라는 3대 유리왕(24∼57) 때부터 주변 국가 정복에 나서 12대 첨해왕
(247∼261) 때쯤이면 진한 전 영역을 이미 정복했기 때문이다. 내물왕 이전
까지는 경주 일대의 작은 소국이었던 신라가 내물왕때 갑자기 강국이 되어
진한 일대를 정복했다는 주장은 아무런 사료적 뒷받침이 없는 비실증적
주장에 불과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물왕이 치른 세 차례의 전쟁이 모두 방어전인 것
은 그가 정복군주가 아니라 수성(守城)군주임을 말해준다. 이런 사실들은 만
주 지안현에 서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이 비문은 일부 과장은 있을 수 있지만 당대에 기록
한 1차 사료라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내물왕 관련 기사가 등
장한다.
“영락 9년(광개토대왕 9년:내물왕 44년:399년)에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和通)하였다. 왕이 평양을 살피고자 내려오니 신라가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왜인들이 나라 안에 가득하여 성과 못을 부수니 이 노객(奴客
:내물왕)은 왕의 민이 되어 왕께 귀복하여 하명을 청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영락 10년 경자년(400)에 교서를 내리어 보병과 기병 5만명을 파견해 신
라를 구원하게 하니 남거성(男居城)에서 신라성(新羅城)에 이르기까지 왜가
가득하더니 왕의 군사가 이르자 도망갔다.”
그러나 정작 삼국사기 내물왕 44년조에는 이런 내용이 없으며 38년에
왜인이 금성을 포위 공격하는 기사가 있으므로 왜인의 공격때문에 내물왕이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내물왕에게 아들이 있었음에
도 고구려에 가 있던 실성이 내물왕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것은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그 영향력의 기
반은 이때의 군사지원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은 혜성같이 등장했다는 정복군주 내물왕의 위상과 걸맞지
않다. 위대한 정복군주는 광개토대왕처럼 거침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거나,
백제 근초고왕같이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켜야지 왜인의 공격에 시달리고,
자신을 노객(奴客)이라고 비하하며, 인질을 보내는 그런 정복군주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마립간이라는 용어에 지나치게 집착할 이유도 없다. 마립간이라는
용어가 마치 전제군주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면서 내물왕을 만능 키로 만든
중요한 구실을 했으나 이 역시 문제가 있다. 더구나 삼국사기에는 내물왕
이 마립간이 아니라 이사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왕력조’에 내물
왕이 마립간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전가의 보도로 삼지만 정작 삼국유
사는 마립간에 대해 앞뒤가 다르게 적고 있다. 일연은 ‘왕력조’에서는 내
물왕을 마립간이라고 적어 놓았으나 막상 본문 ‘기이편’의 제22대 ‘지철
로왕(지증왕:500∼514)조’에는 “우리말〔鄕稱〕에 왕을 마립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임금 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적어 지증왕을 최초의 마립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연 자신이 혼동하고 있는 마립간이라는 용어사용을 기준으
로 내물왕을 최초의 중앙집권군주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마립간이란 용어에 대해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
문(金大問)의 말을 인용해, ‘마립이란 말뚝이란 뜻의 방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후세의 품계석처럼 왕의 말뚝 아래 신하의 말뚝이 늘어서므로 이렇
게 이름 지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일부 신라사 연구자들이 ‘내물왕
=마립간’을 고집하다 보니 많은 무리수를 낳았다.
그 중 하나가 중국측 기록에도 마립간이 나온다는 것. 내물왕은 재위 26
년(381) 전진의 부견에게 위두를 사신으로 보내는데, 이를 중국 기록은 ‘
그 왕 루한(樓寒:내물왕)이 위두를 사신으로 보내 미녀를 바쳤다(其王樓寒遣
使衛頭, 貢美女)’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내물왕=마립간’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루한’을 왕명이 아니라 ‘마립간’의 중국식 표기라고 주장한
다. 루(樓)를 ‘마루’로 훈독하면 ‘마립(麻立)’과 같이 볼 수 있고, 한(
寒)은 간(干)처럼 취음(取音)한 글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루’가 ‘마루’
이고 ‘마립’으로 연결된다는 주장은 약간의 언어학적 지식만 있어도 할
수 없는 지나친 비약일 뿐만 아니라 ‘한(寒)’의 중국음은 ‘han(한)’이고
‘간(干)’의 중국음은 ‘gan(간)’으로서 전혀 다른 글자이다. 이 역시
억지로 꿰어 맞춘 자의적 해석일 뿐이다.
중국 역사서는 주변 이민족의 임금들을 기록할 때 ‘송서(宋書)’, 고구려
전의 ‘고구려왕 고련(高璉:장수왕)’ ‘남사(南史)’ 백제전의 ‘백제왕 여영
(餘映:전지왕)’, ‘양서(梁書)’ 신라전의 ‘신라왕 모진(募秦)’이라는 기록
처럼 전통적으로 왕명을 적었지 해당 지역에서 부르던 왕호를 중국식으로
음차(音借)해 적은 적은 없다.
내물왕 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세습권이 확립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비로소 신라가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석씨 또한 9대
벌휴왕부터 16대 흘해왕까지 중간의 13대 미추왕(김씨)만 빼놓고는 왕위를
세습했다. 신라는 이 무렵 이미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한 것이다. 내물왕은
또 이전의 국왕들과 적대적인 관계도 아니었다. 그는 석씨·박씨 집단과 격
렬한 왕위계승전쟁 끝에 임금이 된 것이 아니라 “홀해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내물이 그 뒤를 이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자연스레 즉위했
던 것이다. 그렇기에 내물왕은 그 전의 임금들처럼 신라왕실의 전통에 따라
재위 3년 2월 박혁거세를 모시는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내물왕
은 위대한 정복군주가 아니라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 등 여러 사료
가 전하는 대로 힘겹게 나라를 지킨 수성 군주인 것이다.
<>왕호 다양..법흥왕때부터 중국식
신라의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
干) 등으로 불리다가 법흥왕때 와서 비로소 중국식 왕호로 불렸다. 박혁거
세만이 거서간으로 불렸는데 이는 임금이란 뜻의 진한(辰韓) 말이며, 남해왕
의 칭호는 차차웅이었는데 이는 귀신을 섬기는 제사장이란 뜻으로서 제정일
치 사회임을 알 수 있다. 이사금은 연장자라는 뜻인데, 이는 모두 약간의
뉘앙스는 다르지만 제각기 군장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마립간 만이 군장을
나타내는 칭호는 아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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