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 원류.지류를 찾아 .7] 신라이야기(6)

  • 입력 2003-02-18 00:00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을 평하여 “현명한 재상과
어진 신하가 여기에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
암아 생겼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어서 삼국통일의 원
동력은 화랑으로 인식되고 있다. ‘화랑 관창’처럼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청년 무사들이 이룩한 성과가 삼국통일인 것이다.
그러나 화랑의 최초의 대표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다.

‘진흥왕 37년 봄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처음에 군신이 인재를 알아보
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겨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아 떼지어 놀게 해 그 행
실을 봐서 천거해 쓰려고 하였다. 드디어 미녀 두 사람을 가렸는데 한명은
남모(南毛)였고, 다른 한명은 준정(俊貞)이었다. 300여명의 무리를 모았는데
두 여자가 서로 미모를 다투어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해 술을 강권해 취하게 한 다음 끌어내어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
준정도 이 때문에 사형당하고 무리들은 화목치 못해 해산 당했다.(‘삼국
사기’ 진흥왕 본기 37년조)’ 이 원화가 바로 화랑의 전신이다. ‘삼국사
기’는 ‘준정도 이 때문에 사형 당했다’고 간략하게 기록했지만 ‘삼국유
사’는 살해 사건이 발각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교정(?貞:준정)이 남모를 질투해 술자리를 마련해 취하도록 먹인 후
남몰래 끌어다 북천(北川)에 버리고 큰 돌로 묻어 죽이니 그에 속한 무리
들이 간 곳을 몰라 슬피 울면서 헤어졌다. 이 음모를 아는 자가 있어서
노래를 지어 동네 아이들을 시켜 거리에서 부르도록 하니 그의 무리들이
소문을 듣고 곧 그의 시신을 북천에서 찾고는 교정을 죽였다. 이에 대왕은
명령을 내려 원화를 폐지했다. (‘삼국유사’ 탑상 제4, 미륵선화, 미시랑
, 진자사)’
이처럼 화랑의 전신인 원화는 서로 미모를 다투다가 둘 다 비극적 최
후를 당한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두 원화의 신상에 대해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지만, ‘화랑세기’는 보다 상세한 정보
를 제공하고 있다.

‘일찍이 삼산공(三山公)의 딸 준정이 원화가 되었는데 많은 낭도를 두
었다. 그 때 법흥대왕의 딸 남모 공주는 백제 보과 공주의 소생이었다.
또한 뛰어난 미인으로서 공(미진부공)이 도탑게 사랑했다. 태후가 공을 사랑
해 남모를 도와 원화로 삼고자 하였다. … 준정이 투기를 하여 술로 유혹
해서 물에서 죽였는데 남모의 낭도들이 그 사실을 폭로했다.(‘화랑세기’‘2
세 풍월주 미진부’)’

준정의 아버지 삼산공이 누구인가는 더 이상 자세하지 않지만 남모에
관해서는 상세하다. 준정에게 살해된 남모는 법흥왕과 백제 보과 공주 사이
의 소생이라는 것이다. 보과 공주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등장하
지 않는데, ‘화랑세기’ ‘3세 풍월주 모랑편’에는 모랑이 남모의 남동생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국공(國公)으로
백제에 들어갔다가 보과 공주와 사통을 하였다. 후에 보과가 도망쳐서 입궁
해 남모와 모랑을 낳았는데 모두 미모가 있었다’라면서 두 왕실 사이의
세기의 로맨스를 전하고 있다.

법흥왕과 백제 보과 공주의 사랑이야기는 훗날 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
와 백제 무왕의 로맨스를 연상시킨다. 선화 공주와 백제 무왕의 사랑은 당
시 신라와 백제가 항상적인 전쟁상태였다는 점에서 그 신빙성이 의심스럽지
만 법흥왕과 보과 공주의 사랑이야기는 당시 두 나라가 고구려의 남하정책
에 맞서 결성한 나제동맹 시기란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 법흥왕이 국공으로
백제에 간 것처럼 두 나라는 선린 우호국이었다. 법흥 국공과 보과 공주
는 사랑에 빠졌고, 보과 공주는 귀국한 법흥 국공을 찾아 신라로 도망쳤던
것이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남모는 비록 준정에게 살해당하지만 ‘화랑세
기’‘3세 풍월주 모랑편’은 ‘태후가 모랑을 3세 풍월주로 삼게 명령해
남모의 혼백을 위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화랑세기’ 서문은 원화의 기원이 중국 연(燕)나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화랑은 선도(仙徒)이다. 우리나라(신라)에서 신궁(神宮)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大祭)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燕)나라에서 동산(桐山)에, 노(魯)나라에
서 태산(泰山)에 제사 지내는 것과 같다. 옛날 연부인(燕夫人)이 선도(仙徒)
를 좋아해서 미인을 많이 모아 국화(國花)라고 이름 지었다. 그 풍습이 동
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여자로서 원화를 삼게 되었는데, 지소 태후
(진흥왕의 어머니)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해 국인(國人)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다.(‘화랑세기’서문)’

원화의 설치를 신궁의 제사와 관련지어 설명했다는 것은 원화에게 제관(
祭官)의 기능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연나라는 전국(戰國) 7웅(七雄)의 하나로
서 기원전 222년에 진나라에 멸망당했는데, 연나라의 동산 제사나 노나라의
태산 제사는 모두 국가적인 거대한 제천행사였다. 이는 신라의 신궁 제사
역시 국가적 제천 행사였음을 의미하는데 이를 주관한 제관이 여성인 원
화였던 것이다.

살해사건 때문에 폐지되었던 원화는 신라 제일의 미녀 미실에 의해 29
년(진흥왕 29년:568) 만에 일시 부활된다. 미실은 자신이 사로잡은 진흥왕에
게 원화의 부활을 요청하는데, 마침 이 때의 풍월주(대표 화랑)는 미실의
남편 세종이었다. 원화의 부활은 곧 풍월주 지위의 상실을 뜻하는 것이었는
데 그래서 세종은 이에 불평하는 낭도들에게 “새 원화는 나의 옛 부인이
니, 너희들은 불평하지 말고 잘 섬기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화랑세기’
는 이때 ‘낭도들은 눈물을 흘리며 물러가지 못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원
화제도의 부활은 낭도들에게 큰 충격이었으나 진흥왕과 풍월주 세종의 명령
을 어길 수는 없었다.

이로써 원화제도는 다시 부활되었는데, 이는 단순히 진흥왕과 미실 사이
의 개인적 애정의 결과물만은 아니었다. 진흥왕은 이를 기념해 미실과 함께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어 입고 남도(南桃)에서 조알을 받고 큰 잔치를
베풀었으며, 연호까지 대창(大昌)이라고 고칠 정도였다. ‘화랑세기’에 기록
된 이날의 잔치 장면은 고대 신라인들의 제사의 모습과 자유로운 성 풍습
을 잘 보여준다.

‘이 날 밤, 진흥제와 미실은 남도의 정궁(正宮)에서 합환하였다. 낭도
와 유화(遊花)들로 하여금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지
않고 합하게 하였다. 성중의 미녀로서 나온 자가 또한 가득 찼다. 밝은
등불이 천지에 이어졌고 환성이 사해(四海)에 끓어 넘쳤다. 진흥제가 원화
와 함께 난간에서 구경했는데, 낭도들이 각기 원화 한 명을 이끌고 손뼉치
고 춤추며 그 아래를 지나갔고, 그때마다 만세 소리가 진동했다.

진흥제는 매우 큰 기쁨을 느끼고 원화와 함께 채전(彩錢)을 무리에게
던져주며 “저들도 각기 자웅(雌雄:암컷과 수컷)이고 나와 너도 자웅이다”라
고 말했다. 미실은 몸을 완전히 돌려 진흥왕의 품에 파고들며 “숙모(사도
왕후)의 존귀함으로도 이런 즐거움은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대개 미실이 색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리는 것은 옥진(玉珍)의 기풍을
크게 가진 것이다.(‘화랑세기’ 6세 세종조)’

이 기록은 남성으로 구성된 낭도 외에 여성으로 구성된 유화(遊花)가
있었음을 말해주는데, 이 잔치장면은 마치 낭도와 유화 사이의 집단섹스를
연상케 한다. 미실이 숙모의 남자 진흥왕과 사랑을 나누면서도 이를 자랑스
러워했듯이 고대 신라인들은 이는 불륜이 아니라 신국(神國)의 도(道)라고
여겼다.

*화랑도는 언제 생겼나?

화랑도는 일반적으로 진흥왕 37년(576)에 창설되었다고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 ‘3세 풍월주 모랑’편은 태후가 모랑을 3세 풍월주로
삼은 것이 ‘진흥대왕 9년(548)’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진흥왕 37년 이전
에 이미 화랑도가 존재했다고 전하고 있다. 하긴 ‘삼국사기’도 진흥왕 37
년에 화랑도를 창설했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진흥왕 37년에 원화
를 폐지시키고 ‘그 후(其後) 다시 미모의 남자를 취해 장식(粧飾)시켜 이
름을 화랑이라 부르고 받들게 하니 무리가 운집했다’라고 그 시기를 ‘그
후’라고 애매하게 적고 있는 정도이다. ‘화랑세기’와 조선시대 편찬된
‘삼국사절요’ ‘동국통감’은 모두 진흥왕 원년(540)에 창설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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