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원류.지류를 찾아 .9] 신라이야기(8)

  • 입력 2003-03-11 00:00

풍월주(風月主:대표화랑)는대부분 진골출신이 되었지만 8세 풍월주 문노만은 예외였다. 그의 아버지는 비조부였고, 어머니는 가야국 문화공주였다. 부계가 가야계였던 김유신은 진골이었으나 문노는 그렇지 못했다. ‘화랑세기’는 문화공주가 호조(好助)공의 첩이었으나 비조부공과 더불어 몰래 사통해 낳은 아들이 문노라고 적고 있는데, 가야국의 공주가 사통해 낳은 자식이 진골이 될 수는 없었다. ‘삼국사기’ 권 47 김흠운(金歆運) 열전은 “흠운이 어려서부터 화랑 ‘문노’의 문하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의 문노가 ‘화랑세기’의 문노와 동일 인물임은 분명하다. 다만 그의 한자 이름이 ‘삼국사기’는 ‘文努(문노)’로 기록된 반면 ‘화랑세기’는 ‘文弩(문노)’로 조금 달리 실려 있을 뿐이다.

화랑세기는 문노가 ‘어려서부터 격검을 잘했고 의기(義氣)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런 의기는 어머니의 친정 가야에도 적용되었다. 문노의 휘하에 있던 사다함이 가야정벌전에 동행을 청하자 “어찌 어미의 아들로서 외조(外祖)의 백성들을 괴롭히겠는가”라며 거절한 것이다. 사실 가야 정벌전은 문노에게 가야계라는 출생성분의 불리함을 확실하게 씻을 수 있는 호기였으나 의기로 거절한 것이다. 이에 대해 비난이 일자 사다함은 “나의 스승은 의인(義人)이다”라고 변호하면서 정벌 때 함부로 가야인을 죽이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문노의 뜻에 보답했다고 ‘화랑세기’는 적고 있다. 문노는 비록 가야 정벌은 사양했지만 다른 나라와의 전쟁은 그렇지 않았다. 백제와의 전쟁이 그런 예이다. 진흥왕은 재위 12년(551) 백제 성왕과 연합군을 결성해 죽령(竹嶺) 바깥과 고현(高峴) 안의 열 고을을 빼앗았다.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빼앗긴 이 곳은 한강 유역을 포함하고 있어서 백제로서는 재도약을 위해 사활이 걸린 지역이었다. 마찬가지로 신라도 한반도 동남부에서 벗어나 중심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지해야 할 지역이기도 했다. 먼저 선수친 인물은 진흥왕으로서 그는 재위 14년(553) 이 지역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이는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래 100여년 이상 계속되어온 나제동맹의 붕괴와 함께 백제와의 전면전을 의미했고, 백제 성왕은 직접 신라 공격에 나섰다. ‘삼국사절요’의 기록(554년)에는 “백제왕이 직접 보병과 기병 5천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니 군주인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眈知) 등이 맞아 싸웠으나 패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그 고을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는데…”라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때 김무력은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는데, ‘화랑세기’는 “개국(開國:진흥왕의 연호) 4년(554) (문노)공이 17세에 김무력을 따라 백제를 쳤다. 공이 있었는데, 상을 받지 못했으나 개의치 않았다”라고 이때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성왕의 전사는 백제에게는 큰 비극이었으나 신라에게는 도약의 호기였다. 진흥왕은 이런 여세를 몰아 이듬해(555년)에는 북한산까지 직접 순행해 고구려를 공격하고 진흥왕 순수비를 세웠다. 문노는 이때도 공을 세웠으나 역시 보답을 받지 못했다. 부하들이 불평하자 “대저 상벌이라는 것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은 이미 나를 우두머리로 삼아놓고 어찌 내 마음을 그대들의 마음으로 삼지 않는가”라고 달랬다. 이처럼 문노는 어머니의 고향인 가야 정벌에는 반대했으나 백제나 고구려와 싸울 때는 큰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문노는 가야계라는 이유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고, 또한 진골이 아니라는 이유로 적당한 배필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처지를 깊이 동정한 인물이 진흥왕의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인 세종이었다. 6세 풍월주 세종이 부인 미실에게 이를 의논하자 미실은 “나의 동생 윤궁이 이 사람에게 어울리지만 지위가 낮은 것이 걱정이다”라고 우려했는데, 윤궁이 “그 사람이 좋다면 어찌 위품(位品)을 논하겠는가”라며 문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문노의 지위가 낮기 때문에 정식 부인이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선모(仙母)의 역할을 하면서 대내적으로만 부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공식적으로는 문노가 윤궁의 신하였던 것이다. 이런 문노가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은 것은 대외전쟁이 아니라 내부 권력투쟁이었다. 미실은 진흥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진지왕이 자신을 소홀하게 대하자 그의 폐위를 결심했는데, 문노는 평소 미실의 행실을 좋지 않게 여겼지만 스승 세종과 부인 윤궁의 권유에 따라 자신을 따르는 가야파를 움직여 진지왕 폐위에 한몫 했던 것이다. 이 공으로 문노는 아찬으로 진급하면서 진골의 골품을 획득하게 되었고, 진평왕의 조칙으로 윤궁을 정처(正妻)로 삼을 수 있었다. 정식 결혼식 당일 윤궁은 “어제까지는 낭군이 첩의 신하였으므로 첩을 따르는 것이 많았으나, 오늘 이후 첩은 낭군의 처로서 마땅히 낭군을 따라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문노는 미실의 지지로 8세 풍월주까지 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왕위쟁탈전에 뛰어들어 신분을 상승시키고 풍월주까지 되었지만 ‘화랑세기’에 “용맹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아랫사람을 자기처럼 사랑하고,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과거를 불문하고 모두 받아들여 어루만져주었으므로 명성이 크게 떨쳤고 낭도들이 죽음으로써 충성하기를 원했다”고 기록한대로 오히려 화랑들을 결속시켰다. ‘화랑세기’는 “사풍(士風)이 이로써 일어나 꽃피었으며, 통일 대업이 (문노)공으로부터 싹트지 않음이 없었다”라고 평가하고 이어서 “유신이 삼한을 통합하고 나서 공을 사기(士氣)의 종주(宗主)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계는 가야왕족이었으나 모계가 신라왕족이었던 김유신은 자신과 정반대로 모계가 가야왕족이었던 문노에게 남다른 감정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문노는 휘하의 신라 왕족들도 흔쾌히 복종시켰는데 내물왕의 후손이자 태종 무열왕의 사위였던 김흠운이 그런 인물이었다. 당시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해 아직까지 그 이름이 남아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김흠운이 개연히 눈물을 흘리며 이에 격동되어 자신도 그렇게 하겠다는 기색을 보였다. 그래서 같은 문하에 있던 승려 전밀(轉密)은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간다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 당시 화랑들은 이미 전사한 화랑들을 흠모하며 감투정신을 되새겼던 것이다. 김흠운은 백제전에 나서면서 따로 집안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 속에서 군사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 양산(陽山)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다가 한밤에 역습을 당했을 때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공이 지금 죽더라도 남들이 알지 못할 것이며, 공은 신라의 귀골(貴骨)이자 대왕의 사위로서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이자 우리의 깊은 수치가 될 것이다”라고 피신을 종용했으나 그는, “대장부가 이미 나라에 몸을 맡긴 이상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같은 것이니 어찌 감히 명예를 바라겠느냐”라면서 죽었다. 보기당주 보용나(寶用那)는 이 소식을 듣고 “그는 귀족으로서 세도도 번성하고, 남들이 아끼는 처지임에도 절개를 지키어 죽었는데, 나는 살아도 이익이 없으며, 죽어도 손해가 없다”면서 백제 진영에 돌진해 역시 전사했다. 위기 앞에서 지배층부터 목숨을 던졌던 신라 화랑들의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약소국 신라를 통일의 주역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이 비는 종래 무학대사의 비석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순조 16년(1816) 추사 김정희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고증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72년 북한산 비봉에 있던 비를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실에 옮겨 놓고 원래 자리에는 모조품을 만들어 놓았다. 국보 3호인 화강석의 이 비는 높이 약 168cm, 너비 약 76cm로서 다른 비와는 달리 직사각형으로 가공된 석재를 사용하여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는데, 비신의 상단(上端)에 1단의 촉을 만든 것으로 보아 원래는 개석(蓋石)을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진흥왕이 지방을 순수하는 목적과 영토확장을 찬양하고 있으나 윗부분이 심하게 마멸되어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가 많다. 진흥왕 순수비는 이것 외에도 황초령(함경남도 함주) 순수비, 마운령(함경남도 이원) 순수비, 창녕(경상남도 창녕) 순수비가 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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