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원류.지류를 찾아 .10] 신라이야기((9)

  • 입력 2003-03-18 00:00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며 수양도 하고 집단 유희도 즐기다가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전사조직으로 변해 목숨을 던지던 화랑도의 사상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최치원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에 그 단초가 담겨있다.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고 한다. 이 교의 창설 연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는데, 기실은 삼교(三敎:유·불·선)를 포함해 인간을 교화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집에 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함은 노사구(魯司寇:공자)의 뜻이요,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으되 말없이 교훈을 실천함은 주주사(周柱史:노자)의 종지요, 모든 악행을 하지 않고 모든 선행을 실천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석가)의 교화이다.(‘삼국사기’ 진흥왕 37년조)” 유·불·선 삼교 중에서 영향력이 가장 미약했던 유교가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해 유교정치체제를 배웠다는 점과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 역시 유학자였다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인데, 실상 화랑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은 선교(仙敎)였다. 선교(仙敎)는 신라의 전통 민간 신앙과 도교사상이 어우러져 형성되었는데, 나중에는 신라의 건국사료까지 윤색될 정도였다. ‘삼국유사’는 신라의 시조 혁거세에 대해서 “설자(說者)가 말하기를 (혁거세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것이다. 중국인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하는 말에 ‘현자를 잉태해 나라를 세웠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혁거세가 여신선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선도성모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 제5 ‘선도성모가 불사를 좋아하다’편에 보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선도성모는 중국 제실(帝室)의 딸로서 이름이 사소(娑蘇)인데 해동(海東)으로 와서 신선이 되었다. 사소가 ‘진한에 이르러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으니 혁거세·알영 두 성인의 시초가 된다’라는 것이다. 다음 기록도 같은 맥락이다. ‘김부식이 정화(政和:송 휘종의 연호) 연간에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佑神?)을 방문했더니 여신선의 상을 설치한 당(堂)이 한 채 있었다. 관반(館伴)학사 왕보(王?)가 “이분은 귀국의 신인데 공은 아십니까?”라고 물으면서 “옛날 중국 제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에 이르러 아들을 낳아 해동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녀는 지선(地仙)이 되어 늘 선도산(仙桃山:경주 서악, 서연산)에 거처했으니 이것이 그녀의 형상입니다”라고 말했다. 또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우리 조정(고려)에 와서 동신성모(東神聖母)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문 가운데 ‘현자를 잉태해 나라를 세웠다’는 구절이 있었다.(‘삼국유사’ 권제5 ‘선도성모가 불사를 좋아하다’)’ 신선의 시조를 중국 제실의 딸로 보는 것은 고려시대 들어 선교의 유래를 중국과 연결시키려는 의식의 소산일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선교를 단군에게 연결시키고 있어서 흥미롭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 21년조에는 “평양은 원래 선인 왕검의 터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서 선인은 단군을 의미한다. 또한 이규보의 ‘동명왕편’에는 비류국왕 송양이 자신을 “선인의 후손”이라고 자칭하고 있는데 여기의 선인 역시 단군을 뜻한다. 이는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에도 선교의 영향이 지대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선교는 실제 화랑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삼국유사’ 권3의 ‘처음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國仙)으로 삼으니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초이다’라는 구절은 선교가 일종의 국가 종교 기능까지 했음을 말해준다. 최치원이 화랑도를 풍류(風流)라고 부르고, ‘화랑세기’에서 대표 화랑을 풍월주(風月主)라고 부르는 것 또한 선교의 영향이다. 조선 시대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도 ‘신라는 용의단정한 소년을 뽑아 풍월주로 부르고 훌륭한 인재를 구해 무리를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화랑도는 불교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삼국유사’ 권제3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는 화랑과 불교의 관계를 흥미롭게 적고 있다. 이에 따르면 진지왕 때 흥륜사의 승려 진지는 부처님이 화랑으로 화신해서 모실 수 있게 해 달라고 항상 기도했는데, 어느 날 꿈에 한 승려가 나타나 ‘웅천(공주) 수원사에 가면 미륵선화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진지가 수원사에 가자 절 문 밖에 한 소년이 있다가 자신도 서울(경주) 사람이라면서 극진히 대접하고 갑자기 사라졌다. 나중 천산(千山)의 산신령을 만나 미륵선화를 찾으니 ‘이미 수원사 문 밖에서 미륵선화를 뵈었는데 다시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답했다. 진지왕에게 이를 전하자 ‘낭(郎)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니 서울에서 찾아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진지는 그 소년을 찾아 경주를 헤매다가 영묘사 나무 밑에서 만나게 되었다. ‘진자는 그와 마주치자 놀라며 “이 분이 미륵선화다”라면서 그에게 다가가 “낭의 집은 어디이며, 성씨는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라고 물었다. 낭은 “내 이름은 미시(未尸)인데, 어릴 때 부모님이 다 세상을 떠났으므로 성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에 그를 가마에 태워 가지고 돌아와서 왕에게 뵈오니 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해 국선으로 삼았다.(‘삼국유사’ 권 제3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 이 소년이 바로 미시랑인데 일연은 이 미시랑에 관해서 “설자가 말하기를 미(未)는 미(彌)와 그 이름이 가깝고 시(尸)는 역(力)과 그 글자형태가 비슷하므로 그 근사함을 취해서 바꿔 부르기로 한 것이다…지금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일컬어 ‘미륵선화’라 하고, 남에게 매개하는 이를 ‘미시’라고 하니 모두 진자의 유풍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화랑도가 불교·선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음은 팔관회(八關會)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팔관회는 흔히 고려시대 때 성행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 시작은 신라 진흥왕 때이다. ‘삼국사기’ 진흥왕 33년 조는 “겨울 10월20일 전사한 사졸을 위해 외사(外寺)에 팔관연회(八關筵會)를 베풀어 7일만에 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가 날짜까지 기록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진흥왕은 재위 29년(568) 함경도의 황초령과 마운령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이런 정복전쟁 와중에서 죽은 사졸들을 위로하기 위해 팔관연회를 베풀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팔관회에 대해 더 이상 기록하지 않지만 ‘고려사’ ‘팔관회’조에서 “유사(有司)가, ‘전왕조(신라)는 매년 11월에 크게 팔관회를 베풀어 복을 빌었다’라고 말하는 구절에서 매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팔관회는 미륵의 화신을 자처했던 궁예도 크게 중시했는데, 궁예는 898년 “겨울 11월에 국주(國主)로서 팔관회를 시작했다”라고 전한다. 왕건 또한 마찬가지여서 ‘고려사’ 세가(世家)는 그의 즉위 해(918) ‘11월 처음 팔관회를 열다. 왕은 의봉루에서 구경하다. 매년 상례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팔관회와 신라 화랑도의 관계에 대해서는 고려 의종이 재위 22년(1168)에 내린 하교가 보여주고 있다. ‘첫째 선풍(仙風)을 존중 숭상하라. 옛날 신라에는 선풍이 크게 행해져서 용천(龍天)이 환열하고 민생이 안녕하였다. 그러므로 조종 이래 그 풍을 숭상한지 오래이나 근래 양경(兩京:개경·서경)의 팔관회가 날로 옛 풍격이 줄어져서 유풍이 점차로 쇠퇴해 가고 있다. 지금부터 팔관회는 양반으로서 가산이 풍족한 자를 미리 택해 선가(仙家)로 정하고 옛 것에 의거해 사람과 하늘이 모두 환열토록 하라.(‘고려사’ 세가 권 제18 의종조)’ 신라의 화랑들은 축제까지도 국가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생산과 놀이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현대인들이 배울 자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태조때의팔관회

팔관회는 한마디로 환상적인 축제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가 위풍루에 나가 이를 보았는데 백관이 조복으로 행례하니 구경꾼이 도성에 넘쳤다 한다. 넓은 격구장(擊毬場)에 윤등(輪燈) 하나를 두고 향등(香燈)을 사방에 배치해 은은한 향기가 퍼졌으며, 또 5자 남짓한 채붕(綵棚:비단 장막) 둘을 설치했는데, 백 가지 놀이와 가무가 행해졌으며, 사선악부(四仙樂部)와 용(龍)·봉(鳳)·코끼리·말·수레·배가 모두 ‘신라의 고사’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태조 왕건이 유명한 ‘훈요십조’에서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일이요, 팔관은 천령(天靈) 및 오악(五嶽), 명산·대천·용신(龍神)을 섬기는 일”이라며 길이 거행하라고 유언한 것은 팔관회가 국가 통합의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