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원류.지류를 찾아. 11] 신라이야기(10)

  • 입력 2003-03-25 00:00

한국 고대사의 많은 부분이 그런 것처럼 신라 왕실 김씨의 기원도 베
일에 싸여있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출발점은 김씨가 최초로 등장하는 ‘삼
국사기’ 석탈해 9년(서기 65년)조이다. 금성 서쪽 시림(始林) 나무 가지에
걸려 있던 금궤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탈해왕이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내게 주는 아들이 아니냐?”라면서 거두어 길렀다. 그가 자라면서 총명하
고 지략이 많아서 알지(閼智)라고 부르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고 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를 기념해 ‘시림을 고쳐서 계림이라
개명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알지가 바로 13대
미추(味鄒·재위:262~284) 이사금의 5대조가 된다.

이 김알지가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것이 수수께끼의 핵심인데, 필자는
연재 초기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몽골에서 왔다는 견해와 흉노에서 왔다는
견해를 소개한 적이 있다. 문정창씨는 ‘가야사(1978)’에서 경주 김씨의
시조도 흉노에서 왔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비상한 관심을 끌어왔다. 이 주장
의 문헌적 근거는 중국 정사인 ‘한서(漢書)’인데, 이 책에 기록된 경주
김씨의 시조가 김일제(金日?)이다. 김일제는 ‘한서’에 스쳐 지나가듯이 언
급되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한서’ 제 68권이 ‘김일제전’일 정도로 자세
히 언급된 중요인물이었다.

김일제라는 인물은 비단 김씨와의 관계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 인생 자
체로도 드라마틱하다. 김일제의 부친은 흉노족의 임금 휴도왕(休屠王)이었는데
기원전 2세기경 그는 당시 한나라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지금의 서안) 서
북부의 현 감숙성(甘肅省) 무위(武危)시 근처 언지산(焉支山)과 둔황(敦煌)시
근처 삼위산(三危山) 일대의 기다란 회랑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서안 서북쪽 오초령에서 시작해 신강(티베트)에 이르는 길이 약 1천여
km, 폭 40~100여km의 긴 이 지역은 중국인들이 황허의 서쪽 지류가 흐르는
복도라는 뜻의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 불렀다. 이 일대는 북쪽으로
현재 내몽골의 등격리(騰格里)사막과 태산용수산(台山龍首山) 등이, 남쪽으로는
현재의 청해성 주랑남산(走廊南山) 등이 버티고 있어서 이 하서주랑을 통
하지 않고는 서역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지리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더
구나 이 지역은 거대한 얼음 호수에서 녹아내린 물이 곳곳에 강과 호수를
이루고, 넓은 초원이 형성되어서 목축과 농업이 발달한 곡창지대였다.

흉노는 이 지역은 물론 그 북쪽의 모든 지역을 지배했는데 한나라는
항상 흉노의 공격 때문에 골치를 썩었다. 기원전 141년 16세의 어린 나이
로 즉위한 무제(武帝)가 흉노 정벌에 많은 정력을 쏟은 것은 이런 한나라
의 숙원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무제는 재위 3년 장건(張騫)을 월지국(月氏
國)에 보내 대흉노 동맹을 맺고 오라고 명령하는데, 흉노 출신의 노예 감
부(甘父) 등 100여명과 함께 장도에 오른 장건은 도중 흉노에게 체포되어
억류생활을 하였다. 10여년간의 억류생활 끝에 장건은 월지국이 흉노들의 공
격 때문에 중앙아시아로 쫓겨 가 지금의 사마르칸트에 대월지국을 수립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흉노를 탈출한 장건은 한나라로 가는 대신 대월지국으
로 가서 대흉노 동맹을 체결하려 했으나 대월지국은 현 이주지가 하서회랑
보다 훨씬 더 비옥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장건은 귀국길에 다시 흉노에 체포되어 1년간 더 억류생활을 한 후에
귀국했는데, 흉노와 대월지국에 대한 그의 정세보고 중에서 한 무제는 흉노
의 한 일파인 대원국(大宛國:타지키스탄 페르가나 지역)에서 목덜미에서 피가
날 정도로 빨리 달린다는 한혈마(汗血馬)가 생산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
를 수입하기로 결심했다. 무제는 그간 한나라가 흉노에 패한 이유는 흉노족
에 비해 말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무제는 군사를 수
만리 떨어진 대원국까지 보내 한혈마를 빼앗아 오게 했다. 원정군이 한혈마
를 구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무제는 “서녘 끝에서 천마가 오도다. … 유
사(流沙:흐르는 모래사막)를 건너서 사이(四夷:사방의 오랑캐)를 정복했도다(사
기)”라고 노래할 정도로 기뻐했다.

드디어 기원전 121년 무제 휘하의 위청(衛靑) 장군이 흉노 공격에 나서
는데, 정벌군에는 위청 누이의 아들 곽거병(?去病)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그
의 어머니는 한무제의 부인인 위 황후의 언니로서 무제는 그에게 외삼촌이
었다.

18세였던 곽거병은 800기를 이끌고 흉노의 천자인 선우(?于)의 백부와
숙부의 목을 베는 승전을 거두었다. 이 공으로 표기(驃騎) 장군이 된 곽거
병은 그 여세를 몰아 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하서주랑의 언지산 근처에서
흉노의 절란왕(折蘭王)과 노후왕(盧侯王)을 참하고 혼사왕자(渾邪王子) 등을
비롯한 9천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한서’의 ‘곽거병전’은 이때 곽거병이 아주 중요한 물건을 획득했음
을 전하고 있다.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금인(金人)을 몰수했다(收
休屠祭天金人)”는 기록인데, 금인은 경주 김씨 성의 유래를 암시해 주고
있다. ‘한서’의 편자 반고(班固)는 이 구절에 대해 여순(如淳)의 입을 빌
려 “금인으로 하늘에 제사 지내는 사람을 왕으로 삼는다”는 설명을 덧붙
이고 있다.

자신 휘하의 여러 왕들이 곽거병에게 잇따라 패전하자 흉노의 천자 선
우는 혼사왕(곤사왕(昆邪王)으로도 기록됨)과 휴도왕을 소환해 잇단 패전의
책임을 물으려 했다. 혼사와 휴도는 이를 두려워해서 함께 한나라에 투항하
기로 모의했으나 휴도왕이 곧 생각을 바꾸어 한나라와 결전을 다짐하자 혼
사는 휴도를 살해한 다음 10만 여명을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한서’
는 이때 ‘한나라는 혼사왕을 열후(列侯)에 봉했다. 김일제는 부왕이 항복을
거부하여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 알씨(閼氏), 동생 윤(倫)과 함께
구몰(俱沒)되어 한나라에 들어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서’ 지리지는
이때 휴도왕의 영토를 무위군(武威郡)으로 편입시켰는데 10개현, 1만7천여
호, 7만6천여 인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흉노족이
한나라로 끌려갔다.

한나라 수도 장안으로 끌려간 김일제는 왕실의 말을 키우게 되었다. 몇
년 후 김일제는 무제가 말을 사열하는 것을 기회로 출세의 줄을 잡는데
‘한서’는 이 사열식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무제가 놀이를 하면서
말을 검열했다. 후궁들이 주위에 가득 모여 있었다. 일제를 비롯해 수십
인이 자신이 기르던 말을 데리고 전각 아래를 지나면서 (후궁들을) 힐끔
힐끔 쳐다보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오직 일제만이 감히 그러지 않았다.

일제는 키가 8척2촌이고 용모는 엄숙했으며, 말 또한 살지고 좋았다. 무제
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본래의 정상을 갖추어 대답했다. 무제가 기이하게
여겨 즉일로 목욕시키고 의관을 주어 마감(馬監)으로 임명했고, 곧 시중(
侍中) 부마도위(附馬都衛)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옮기게 했다.(‘한서’ 권 68
김일제전)’

김일제는 이렇게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곧 무제의 파격적인
총애를 받았고, 무제는 그의 두 아들까지 사랑해 주위에서 “폐하가 망령
이 들어 오랑캐 새끼를 귀중하게 여긴다”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일
제는 맏아들 농아(弄兒)가 궁녀와 통간(通姦)하자 스스로 아들을 베어 죽일
정도로 자신에게 엄격했다.

14세 때 장안에 잡혀 온 김일제는 47세 때 다시 큰 기회를 잡는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망하라(莽何羅)가 칼을 들고 무제를 살해하려는 것
을 막아서 무제의 생명의 은인이 되는 것이다. ‘한서’ 김일제전이 “무제
는 망하라를 토벌한 공으로 조서를 내려, 일제를 투후(?侯)로 봉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투후’라는 베일의 봉작이 등장하는 것이다. 같은 김일
제전은 “원래 휴도왕은 금인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 지낸 고로 (무제가)
김씨의 성을 내렸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성(賜姓) 김씨의 유래이
다. ‘투후’와 ‘김씨’는 신라 30대 문무왕(제위:661~681)의 비문에서 자신
을 “투후 제천의 자손(?侯祭天之胤)”이라고 언급한 내용과 연결되기 때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투후 김일제의 어머니 성씨가 알씨(閼氏)라
는 점과 김알지의 이름 알지(閼智), 혁거세의 부인 알영(閼英) 등 ‘알(閼)
’자가 공통으로 관련되는 것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투후나 알씨 등은
결코 흔한 이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마총 유물

1973년 4월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에 연습삼아 발굴했다가 수많은 유물
이 쏟아져 나온 천마총(天馬塚)은 여러 모로 흉노와 연결된다. 흉노족의 무
덤 양식인 적석목곽분이라는 점이 먼저 주목되며, 국보 188호로 지정된 금
관은 ‘제천금인(祭天金人)’했다는 흉노족의 금 숭배 풍습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천마도는 중국인들이 천마라고 불렀던 흉노족 특산물인 한혈마와
연결된다. 천마총 출토 허리장식의 물고기 문양은 알타이 산록의 흉노족 무
덤인 파지릭 적석총 미라의 문신과 같은 형태이다. 이런 공통점들은 천마총
의 주인공이 흉노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추측하게 해 준다.
이덕일<역사평론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