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인물은 신라 13대 임금 미추왕이다. ‘삼국
유사’의 ‘미추왕과 죽엽군(竹葉軍)조’는 “미추왕은 김알지의 7대손”이라고
그 계보를 적고 있다. ‘삼국사기’의 ‘미추이사금조’는 보다 구체적인데
, “미추의 선조는 알지로 계림에서 나온 이니 탈해왕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길러내어 뒤에 대보(大輔)란 벼슬을 주었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
한은 아도를 낳고, 아도는 수류를 낳고, 수류는 욱보를 낳고, 욱보는 구도
를 낳으니, 구도는 곧 미추의 아버지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알
지가 낳았다는 세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문무왕 비문의 성한왕과 관련
된 논란이다.
‘(6행)…15대조 星漢王(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靈(영
)이 仙岳(선악)에서 나와, □□를 개창하여 玉蘭(옥란)을 대하니, 비로소 조
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石紐(석뉴)를 보고 金輿(금여)에 앉아…
하는 것 같았다.(‘문무왕비문’)’
이 성한왕이 바로 김알지라는 것인데, 일부에서는 ‘삼국사기’의 세한이
성한으로서 김알지와 동일인물인데 아들로 표시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미
추왕으로 보는 견해와 석탈해로 보는 견해까지 있으나 대체로 성한왕은 김
알지라고 해석한다.
‘하늘에서 내렸다’는 비문의 내용이 ‘삼국사기’의 김알지 등장 장면
과 비슷하다는 점도 성한왕을 김알지로 보는 논거의 하나가 된다. 성한왕은
김일제의 후손으로 마지막으로 투후의 지위를 이은 김성(金星)인데 그가
왕망의 몰락 뒤 신라로 왔다는 추론이다.
‘삼국사기’에 13대 미추왕은 재위 23년(284)에 사망해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700여년 만인 1973년에 우연히 발견되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경주 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이 바로 미추왕릉
인데, 그 전에는 존재했을 봉분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위에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1973년에 도로 공사를 하면서 배수로를 파다가 우연
히 돌무지가 발견되어 영남대학교에서 1973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발굴
조사에 나섰는데, 이곳에서 금제감장보검(金製嵌裝寶劍·보물 635호)과 상감
유리옥 목걸이(보물 634호), 금제 수식(垂飾·보물 633호) 등이 출토된 것이
다. 이중 금제감장보검과 상감유리옥 등은 중국이나, 고구려, 백제 등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서 신라만의 출토물이다.
이런 형태의 유물들, 특히 보검은 유럽이나 중동지역에서 발견된 일은
있으나 동아시아에서는 미추왕릉에서 유일하게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 배경을
두고 수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보검은 어떻게 최초
의 김씨 왕인 미추왕릉에 묻히게 되었을까. 철로 된 검신(劍身)은 삭아서
없어지고 검집과 금판에 박았던 옥만 남아있는데, 이 보검은 그 기능상 전
투용이라기보다는 의례용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손잡이는 강력한 타격을
지속적으로 견딜 수 없는 구조여서 전투용으로는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
삼국사기’ ‘미추왕조’에 따르면 미추왕은 재위 2년과 20년 시조묘에 제사
를 지내는데 이럴 때 왕의 절대적 권한을 나타내주는 상징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또한 재위 3년 미추왕은 동쪽의 망해(望海)에 순행하고, 황산(黃山)
에도 행행(行幸)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데 이런 경우에도 이 보검은
국왕을 하늘을 대신하는 존재로 비추게 하는 기능을 했을 것이다.
보검을 장식하는 여러 문양들은 이 검을 만든 사람들의 세계관을 반영
하고 있다. 먼저 칼자루 끝에 붙어있는 둥근 원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
로 해석된다. 검신과 손잡이 사이의 손잡이울에는 세 개의 태극무늬가 나란
히 배열되어 있는데, 이는 유목민족의 우주 이해 구조인 천지인에 해당하는
것을 보인다. 그리고 그 태극무늬 안에는 각각 세 개씩의 꽃봉오리가 정
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 검을 북방 스키타이족과 연결시킨 인물은 미국태생의 동양미술사학자
인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이었다. 그녀는 ‘한국문화
의 뿌리를 찾아’(학고재, 1999)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미추왕릉 칼처럼 정교한 보검은 두 말할 것 없이 코카서스산맥 일대
스키타이 금세공 기술의 한 부분을 계승한 것이다.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의
기술을 첨단의 것으로 유지하려고 그리스 노예들을 물물교환했다. 이들은
스키타이 왕족들을 위해 금세공품들을 제작했다. 또한 흑해에서 한반도 남단
경주까지 뻗치는 스키타이식 무덤 축조는 목곽과 돌이 섞인 네모난 방을
기본적으로 설치하고 그 위를 완전히 봉분으로 덮는 묘제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스키타이식 무덤은 바로 적석목곽분을 말하는 것이다. 미추왕릉
출토 보검이나 그 장식옥들이 보석상감 기법의 스키타이 보물들과 일맥상통
하다는 주장이 일면서 미추왕 시대의 신라와 스키타이족과의 관계가 비상한
관심사가 되었다.
기원전 8세기 경부터 3세기 경까지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에 살았던 스
키타이족이 신라와 무슨 관계였을까가 의문의 핵심이다. 스키타이족은 자신의
문자가 없었기에 역사기록을 남기지 못한 수수께끼의 종족인데, 2천500여
년 전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가 그들에 대해 남긴 기록이 그나마
스키타이족에 대한 일단의 정보를 제공한다. 이에 따르면 기원전 514년 페
르시아의 정복군주 다리우스는 스키타이족을 섬멸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인
솔해 갔으나 그들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가축과 음식까지 모두 지닌
채 여기 저기 이동하는 기마민족인 스키타이를 잡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이어서 다리우스는 아무런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
던 것이다. 스키타이족은 역사는 남기지 못했어도 예술품은 많이 남겼는데,
그 대부분이 황금으로 만든 정교한 것이었고, 그리스 문화와 유사성이 많
다.
미추왕릉 출토 보검을 스키타이가 아니라 로마와 연결시키는 시각도 있
다. 일본의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가 그런 인물인데, 그는 ‘유리의 길
’ ‘고대유리’ 등의 저서를 통해 유리 공예를 통한 동서양 교류사를 연
구해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그는 ‘로마문화 왕국, 신라’(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2)이라는 책에서 미추왕릉 출토 보검이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도나우강 남부의 트라키아 지역에 있던 로마화한 켈트국의 국왕이
신라 국왕에게 선물로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담한 주장은 미추왕릉 출토 보검과 상감유리옥 목걸이의 특수한
형태들이 켈트족들의 것과 유사하다는데서 출발한다. 보검의 태극무늬 안의
꽃무늬는 로마화한 켈트인들이 즐겨 사용한 무늬로 일반적으로 이런 양식을
‘켈트파’라고 한다는 것이다. 보검의 장식옥들과 상감유리옥에는 백조와
꽃나무, 그리고 왕과 왕비의 얼굴이 상감되어 있는데 이런 방식의 제조기술
도 켈트족의 특징적 양식이라는 것이다.
요시미즈는 이 보검과 상감유리옥은 신라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켈트국
왕에게 받은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황금보검과 상감유리옥은 동·서를 왕래
하는 무역상에게 전달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켈트왕의 사절이 직접
신라로 가져오거나, 신라의 사절이 켈트 국왕을 알현한 후 선물로 받았다
는 것이다. 그는 이런 유물들이 중국이나 고구려·백제에서는 출토되지 않으
면서 오직 신라에만 출토되는 것에 주목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백제와는
달리 중국과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으면서도 로마와는 수많은 교류를 했다
는 것이다. 이 보검의 정확한 유래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
만 고대 신라인들은 북방, 혹은 서방과 독특한 교류를 했던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미추왕과 죽엽군
‘삼국유사’는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신라
가 위기에 빠졌을 때 귀에 죽엽을 꽂은 군사들이 도와줘 이길 수 있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죽엽군은 어디론가 없어졌는데 미추왕릉 앞에 댓
잎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미추왕의 음덕인 것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
다. ‘삼국사기’는 이를 소개했지만 다만 ‘누군가 미추왕릉 앞에 수 만의
죽엽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라고 해서 단정적으로 쓰지는 않고, 다만
이로써 “국인들이 선왕이 음병(陰兵)으로 전쟁을 도왔다고 말했다”고 적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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