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동 98호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황남대총은 5세기의 것인데 무려 5만7천여 점의 유물이 출토된 적석목곽분(돌무지 덧널무덤)이다.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이어져 있는 표형분(瓢形墳:표주박형무덤)으로서 동서 지름 80m, 남북 지름 120m, 남분 높이 23m, 북분 높이 22m에 달하는 신라 최대의 봉토분으로, 1973년부터 75년까지 문화재관리국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의 조사에 의해 남분이 북분보다 먼저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북분과 남분은 그 출토유물로 피장자의 성별을 알 수 있는데 남분에는 금은장식의 환두대도 등 무기류가 많이 부장된 반면, 장신구가 많이 부장된 북분의 묘곽 안에서는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자가 쓰인 허리띠끝꾸미개가 출토되어 피장자가 여성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사실은 국왕의 무덤인 남분에서는 은관 1점과 구리도금을 한 금동관 6점이 출토된 반면, 왕비의 무덤인 북분에서는 화려한 금관이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북분에서 출토된 신라의 전통적인 황금수목관 모양의 금관은 국보 191호로 지정되었는데, 왕비의 능에서는 금관이, 국왕의 능에서는 은관과 금동관이 출토된 사실은 비상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신라의 첫 여왕인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이 7세기 중반의 인물이기 때문에 5세기 경에 조성된 북분의 주인공이 여왕일 수는 없다는 점이 더욱 관심을 끌었고, 이는 자연히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어떤 경위로 왕비는 금관과 금제과대(金製○帶:금제 허리띠)와 요패(腰佩:띠드리개) 등의 황금 장신구를 하고 국왕은 은관과 금동관 등 격에 떨어지는 장신구를 하고 매장되었을까? 이런 의문을 푸는 열쇠는 역시 출토유물들과 현존 문헌사료들을 입체적으로 검토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황남대총의 주인공에 대해서 제17대 내물왕으로 보는 설이 있다. 북분에서 출토된 굵은고리 금귀걸이가 4세기 말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집안 마선구 1호분 출토 귀걸이와 같은 형식이라는 것이 근거의 하나였다. 이는 황남대총의 피장자가 고구려와 가까웠던 임금임을 말해주는데 5세기 무렵 고구려와 밀접했던 신라의 국왕은 제17대 내물왕과 제18대 실성왕(재위 402~417), 제19대 눌지왕(재위 417~458) 등 3대에 걸친 임금들이었으므로 이들 중 한 명이 황남대총의 주인공일 것이다. 이 세 임금과 그 왕비들에 대해 입체적으로 분석하면 그 주인공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내물왕조는 재위 37년에 ‘고구려가 강성하다는 이유로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을 인질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비문’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내물왕은 시종일관 고구려와 밀접했던 임금이었다. 실성왕도 마찬가지이다. 고구려에 인질 가 있던 실성은 내물왕 46년(401) 6월에 돌아오는데, 이듬해 봄 2월에 내물왕이 사망하자 그 자리를 이었다. 그런데 그 경위가 석연치 않다. 실성왕의 즉위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자. ‘실성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그는 알지의 후손이요 대서지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리(伊利) 부인이니 석등보(昔登保) 아간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다…내물이 죽고 그 아들이 어리므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삼국사기’ 실성왕조)’ 실성왕의 귀국 직후 내물왕이 죽고, 내물왕의 아들 대신 실성왕이 즉위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내물왕의 죽음과 실성왕 즉위 배후에 고구려의 영향력이 작용하지 않았느냐는 추측이 등장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내물왕과 김제상조에 따르면 내물왕은 아들 미해(美海)와 동생 보해(寶海)가 있었는데, 제상의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모두 신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도 정작 왕위에 오른 인물은 이런 왕족들이 아니라 이찬의 아들인 실성왕이었던 것이다. 실성왕의 즉위가 순조롭지 않았음은 그의 뒤를 이은 눌지왕의 즉위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눌지왕은 내물왕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미추왕의 딸이고, 왕비는 실성왕의 딸이었다. ‘내물왕 37년에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주었더니 실성이 돌아와 왕이 돼서는 내물왕이 자신을 외국에 볼모로 준 것을 원망해 그의 아들을 죽여 원한을 풀려고 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서 고구려 시절에 알던 사람을 불러서 비밀리에 ‘눌지를 보거든 죽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눌지에게 고구려인을 보라는 명을 내렸다. 고구려인이 눌지의 형신이 쾌활하고 젊잖아 군자의 풍모가 있음을 알고 마침내 ‘그대 나라 임금이 나에게 그대를 죽이라고 했으나,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이에 돌아갔다. 눌지가 이를 원망해 도리어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삼국사기’ 눌지왕조)’ ‘삼국유사’가 전하는 내용은 이와 조금 다르다. ‘실성왕이 전 임금의 태자 눌지가 덕망이 있음을 꺼려서 장차 그를 죽이려 고구려 군사를 청하고 거짓으로 눌지를 맞아들이는 체했다. 고구려인이 눌지를 만나 어진 행동이 있음을 보고 이에 창끝을 돌려 왕을 죽이고 눌지를 세워 왕을 삼아놓고 가버렸다. (‘삼국유사’ 제18대 실성왕조)’ ‘삼국사기’는 눌지왕이 자신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것처럼 표현하고 있으나 ‘삼국유사’는 고구려 군사의 직접 개입으로 눌지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기록을 따르든 눌지왕은 고구려의 호의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눌지왕은 재위 34년 하실라 성주 삼직(三直)이 고구려 장수를 실직(悉直) 벌판에서 죽인 것을 계기로 적대관계로 돌아서, 재위 38년에는 고구려 군사가 북쪽 변경을 침략했으며, 이듬해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자 군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하기까지 했다. 이런 관계변화로 볼 때 눌지왕이 사망했을 때 적국이었던 고구려계 유물들을 부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눌지왕은 황남대총 남분의 피장자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럼 내물왕과 실성왕 중 누가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일까? 내물왕과 실성왕, 그리고 그 왕비들의 출신을 살펴보면 일단의 답이 나올 것이다. 일단 내물왕과 실성왕은 모두 왕자는 아니었다. 내물왕은 구도갈문왕의 손자이자 말구각간의 아들인데, 구도갈문왕은 다름 아닌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른 13대 미추왕의 아버지였다. 즉 내물왕은 미추왕의 조카였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니 서로 4촌으로서 그리 층하가 진다고 볼 수는 없다. 반면 실성왕은 이찬의 아들에 불과했고 어머니도 아간의 딸이었으나 그 부인은 미추왕의 딸이었으니 신분 차이가 작지 않다. 더군다나 실성왕은 내물왕의 아들이나 동생이 올라야 할 왕위를 빼앗고 눌지마저 죽이려다가 그에게 되레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실성왕을 죽이고 즉위한 눌지가 실성왕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을 것임은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이런 상황들은 은관·금동관과 함께 묻힌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이 내물왕보다는 실성왕일 가능성이 더 높으리라고 추측하게 해 준다.
<>南墳서출토된 유리제품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유리병과 유리잔 등 7점의 유리제품들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 유리제품들은 국보 193호로 지정되었다. 이런 형태의 유리그릇을 로마유리라고 부르는데, 로마유리는 로마제국이 시작된 후 395년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으로의 분열을 거쳐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만들어진 유리그릇의 총칭이다. 특히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고 서로마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로마제국 영내에서 만들어진 유리그릇을 후기 로마유리라고 하는데, 남분에서 출토된 로마유리 역시 후기 로마유리이다. 남분 출토 로마유리의 대부분은 지중해 동쪽 해안지대의 유리 산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 당시 두 지역의 교류관계는 1천500년 전의 세계 역시 그리 넓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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