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경북 근.현대인물사 . 38 > 정칠성

  • 입력 1997-12-23 00:00

정칠성(丁七星:1897~?)은 일제시대를 살면서 조선여성해방운동에 투신했
던 여성운동가이다. 단순히 여성운동가라고 하기보다 여성혁명가라고 부르
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녀의 생애 초반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성장한 후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고 여성운동가로서 일관되게
살다간 생애는 선명하게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정칠성은 1897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이후 상경하
여 남도 기생들이 중심이 된 한남권번(漢南券番)의 기생이 되었다. 그녀가
기생이 된 배경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화류계에 있었기 때문에 당
시 급변하는 사회정세를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세때에는 말 타고 나라를 구하는 외국여걸들의 전기를 읽고 자신도 그
와같은 유명한 여장부가 되려고 승마를 배우기까지 하였다. 여자가 집 밖
으로 다니는 것을 꺼려하고, 말을 탄다는 것은 금기시되기조차한 사회에서
그녀의 행동은 도발적인 것이었다. 정칠성은 이때의 경험을 생애에 있어
서 가장 유쾌했던 일로 회고하는 글을 잡지 '별건곤(別乾坤)' 에 싣기도
하였다.

정칠성은 3.1운동 뒤 화류계를 떠나 사회주의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
했고, 1922년 도일하여 일본 도쿄영어강습소에서 수학했다. 1923년 귀국하
여 물산장려운동에 한때 참여하였고 10월 이춘수와 대구여자청년회 창립을
주도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대구여자청년회의 창립은 당시 종교단체외
에 여성운동을 조직적으로 하는 단체가 없던 상황에서 여성대중을 대상으
로 조직을 결성한 첫 시도였다.

이 해 말부터 정칠성은 정종명, 오수덕 등과 함께 종래의 소극적 여성운
동을 극복하고자 여성해방단체조직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여
성의 사회활동이란 생소한 것이었기에, 정칠성은 일반 부인을 대상으로 직
접 회원모집에 나섰다. 그리하여 그녀는 1924년 5월23일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주의적 여성해방론을 주장한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 결성에
참여하였다.

조선여성동우회는 그 강령에서 '사회진화법칙에 의하여 신사회의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에 입(立)할 일꾼의 양성과 훈련을 기하고, 조선여성해방운동
에 참가할 여성의 단결을 기한다'라고 그 설립 취지를 명확히 선언했다.

정칠성은 1925년 3월 대구여자청년회주최로 '국제부인의날 기념행사'
를 가질 때 '국제부인운동의 의의'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기도 하였다. 같은
달 경북 도 단위 사상단체 사합동맹(四合同盟) 결성에 참여하고, 도쿄로
건너가 동경여자기예학교(東京女子技藝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녀는 기예학
교에서 수학하면서 여성사상단체인 삼월회(三月會) 결성에 참여하여 간부
로 활약하였다.

이 삼월회는 일본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산천국영(山川菊榮)의 영향을 받
아 조직된 일본유학한국여학생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이다. 정칠성은 삼월회
간부로서 1926년1월4일자 '조선일보'에 '신여성이란 무엇'을 발표하여 "진
정한 신여성은 모두 불합리한 환경을 부인하는 강렬한 계급의식을 가진 무
산여성으로서 새로운 환경을 창조코자 하는 열정있는 새 여성이다" 라고
하였다.

1927년 5월27일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서 근우회(槿友會)가 창립되었다.
근우회는 김활란(金活蘭), 유각경(兪珏卿) 등의 기독교계 여성지도자들과
여성혁명단체를 조직하였던 박원희(朴元熙), 정칠성 등의 사회주의운동계
지도자들 및 이현경(李賢卿), 황신덕(黃信德), 최은희(崔恩喜) 등의 언론
계 신진여성들이 통일과 단결을 지향하여 창립한 단체이다.

정칠성은 근우회 제1회 창립준비위원회에서 회원모집의 업무를 맡았고,
이후 근우회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창립대회장에서
정칠성은 "여자날(당시 4월16일) 제정기념으로 시위를 하자" 는 의견을 내
었으나 감시중이던 일본경관들의 저지로 시행할 수 없었다.

그녀는 1928년 근우회 임시전국대회자격심사위원, 중앙집행위원으로 선
출되어 활동하였다. 정칠성은 근우회가 전국에 지회를 결성할 때 대구지회
결성의 임무를 띠고 파견되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집행위원(당시 21명)을
구성하는 데까지 활약하였다.

그녀는 이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여성의 정치.경제.사회적 전적이익의 옹
호를 위한 전국순회강연에 의욕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로인해 일본경찰에
여러차례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후 정칠성은 1929년 광주학생의거에
간여하여 정종명, 허정숙 등과 함께 검거.투옥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조선공산당 사건과 관련되어 검거되는 등 합법적, 비합법적 투쟁에 나서서
일제에 정면으로 대항하였다.

한편 그녀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간부로 활동하였으며, 1931년초 신
간회 해산문제가 제기되자 이에 앞장섰다. 1931년 5월 신간회 전체대회에
서 신간회 해산이 결의되자, 그후 2년동안 사회활동을 일시 중단하고 서울
낙원동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경영하였다.

이후 경성, 평양, 대구, 통영을 돌며 편물강습 등으로 생활했다. 편물이
라는 실업노동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한 여성해방운동의 실천적 행
위로 볼 수 있다. 그녀는 1938년 5월 함경남도 장진에서 삼포금광배급소
주임으로 일하면서 생활하였다.

해방이 되고 대구로 돌아온 정칠성은 조선공산당 경북도당에 참여, 부녀
부장을 시작으로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조선부녀총동맹의 중앙집행
위원 및 부위원장, 남조선 부녀동맹 중앙위원,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중앙
상임위원 겸 조직부차장 등을 역임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녀는 1
947년 남한지역에서 사회주의진영의 활동공간이 축소되면서 월북하였다.

월북후 정칠성은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지냈다. 그해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으
로도 활동하였으며 민주여성동맹과 노동당간부로서 활동적인 삶을 살았다.
그녀의 북한에서의 삶은 분단된 현실로 인해 상세히 알 수 없다.단지 북
한인명사전 등의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북한정권수립에 참여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후 1957년까지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으로 활동하였
다.

그러나 1958년 북한정권이 권력강화를 마무리할 때 정칠성은 남로당계로
지목되어 숙청되었다. 이러한 정칠성의 삶은 사회주의사상 아래 여성운동
을 전개하다가, 결국은 사회주의권력으로부터 제거당하는 아이러니를 느끼
게 한다.

* 연보

- 1923년 대구여자청년회 창립
- 1929년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 중앙집행위원장
- 1948년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
- 1958년 남로당계로 숙청

* 답사기

'여성해방'이란 용어는 우리삶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이
여성해방이라는 말은 남성들에대한 피해의식에서 나오는 적대감이나, 성적
자유를 주장하는 것 일색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부정적인 편견을 갖고서 일제시대에 여성해방운동을 했다는 정칠성 을 처
음 접할때 마음 한 구석에 의문이 생겼다.

정칠성은 조선왕조가 기울어 가는 시절에 태어나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
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면서 자랐다. 그녀는 식민지백성으로서의 불평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인간다운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절실하게 깨달았
을 것이다.

정칠성은 일제라는 식민지 억압구조와 조선의 봉건적 구습의 테두리 속
에서 얽매여 있던 여성들의 의식부터 깨우고자 노력하였다. 그녀는 가정과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열등한 인간취급을 받던 여성들에게 잠에서 깨어나
라고 강하게 호소하였다. 그리고 평생을 여성해방운동을 위해서 투신하였
다. 정칠성이 화류계에서 벗어나서 사회주의여성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
던 힘도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서의 해방을 갈망했던 몸부림에서 나왔으리
라.

오늘날 자본주의의 성상품화에 쉽게 길들여지고 있는 여성들은 '깨어있
는 여성 정칠성' 의 삶을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한
국의 여성들이 현 사회안에서의 자신의 참모습과 사명을 발견하게 되길 바
란다.
김희정<대구.경북근현대사연구회 회원>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