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영남사람들 .11] 박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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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영배<경북대기자 
  • 200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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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영남사람들 .11] 박중양 [역사속의 영남사람들 .11] 박중양

◇침산을 아지트로 한 박작대기

박작대기! 침산을 아지트로 작대기를 짚고 다녔으며, 이 작대기를 휘둘러서 일본 관헌들을 혼내주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박중양(朴重陽),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일본 측 기록인 '조선신사대동보(朝鮮紳士大同譜)'에는 "주소지는 경기도 양주, 생년월일은 1874년 5월3일, 본관은 반남(潘南), 경력은 대구군수, 평안남도관찰사, 경상북도관찰사 …" 등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는 화려한 경력의 친일파 관료로 출세하였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잘 생긴 외모와 뛰어난 일본어 실력 때문이다. 그는 청일전쟁 무렵부터 서울에서 일본인들과 자주 교제하였고, 1897년 이후 약 7년 동안 관비로 일본에 유학하였다. 그때 기독교인이 경영하는 아오야마(靑山英和) 학원 중학부에서 수학하였고, 이어 도쿄 경시청에서 경찰제도와 감옥제도를 연구하였다. 그는 유학시절부터 이미 야마모토(山本信)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는 야마모토라는 일본식 이름과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본 관료들과도 친분을 쌓을 수가 있었다. 후일 경기도 장관이 된 히가키(檜垣直右)나 충청북도 장관이 된 스즈키(鈴木隆)도 이때 사귀었던 인물들이다. 가증스러운 것은 당시 충청남도 장관이던 박중양이 이들과 같이 장관이 된 사실을 '신(神)의 작희(作戱)'라고까지 경탄해 마지않았다는 사실이다.

◇일본인들이 칭송한 야마모토 군수

경부선 개통으로 대구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왔다. 때문에 일본인과 경북관찰사 사이에 빈번한 대립과 충돌이 생겨났다. 이때 대구군수 박중양은 주로 일본인들의 편에서 일하였다. 따라서 일본거류민들은 그를 '야마모토 군수'라고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야마모토 군수는 일본인들의 신뢰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당시 일본거류민들이 가장 소원했던 바는 바로 대구읍성의 철거 문제였다. 그런데 1906년 6월 그가 경북관찰사 서리를 겸하게 되면서, 곧바로 읍성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만들었다. 결국 성을 철거함으로써 성내 상권까지도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일본인들은 이를 두고 야마모토 군수의 '과감한 조치'라고 극찬하였다. 읍성을 불법으로 철거한 박중양에 대해서는 조정에서도 징계를 검토했지만 이토 통감의 개입으로 무마되었을 뿐 아니라, 그는 오히려 평남관찰사로 영전하였다가 경북관찰사로 되돌아왔다.

야마모토 군수의 친일행각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언론에서도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중양가절 말 말아라. 전무후무 비기수단(肥己手段) 대구성곽 구공해를 일시간에 팔아먹네. 애구(哀邱) 대구(大邱) 흥 …" (대한매일신보, 1909. 1. 16. '중양 타령')

뿐만 아니라 그는 1908년 무렵 일본인들과의 한 모임에서 "이 땅의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바는 귀국인들이 스승으로서 책임을 갖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항상 일본인들의 우월성을 앞세웠다. 더군다나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항일의병전쟁이 전국토를 뒤흔들자, 그는 의병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그들의 상황을 면밀하게 조사 보고함으로써 친일 관찰사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일제 시기, 출세 가도를 달리다

일제가 조선 식민통치 25주년을 기념하여 편찬한 '조선공훈자명감'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이토 이하 총독부의 대관으로부터 역량 수완이 탁월하다고 인식되고 비상한 때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지사 급에서는 박중양뿐이다."

이 말은 박중양이 그들의 가장 충직한 심복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촌로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토 부부가 일본을 내왕할 때는 어김없이 박중양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이토 부인이 바다에 빠져 몹시 위급해졌을 때, 박중양이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토가 박중양을 더욱 각별히 아끼게 되었고 후일 양자로까지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이토 통감의 총애를 받은 박중양은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통역을 도맡았다. 뿐만 아니라 의친왕이 일본에 행차할 때는 통역 수행원으로 따르기도 하였다.

박중양의 횡포는 백성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 이는 대한매일신보 '제2의 박중양'에서 평안남도관찰사 이진호를 겨냥하여 "박중양의 횡포로 인민의 고통은 말도 못할 지경인데, 박중양이 둘이나 되니 인민이 어떻게 살아갈지 민정(民情)을 슬퍼한다"는 기사에서 잘 나타난다.

박중양의 친일관력은 일제 강점 후 더욱 빛을 발하였다. 그는 총독부의 고급관료 자리를 종횡무진하였다. 식민통치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위직은 다 차지하였고, 3·1 운동 때는 '자제단(自制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탄압에 광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식있는 한국인은 그를 노골적으로 거부하였다. 한말의 문필가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1862~1935) 선생에게 박중양이 그림 한 폭을 청하자, 석재는 "당신 같이 지체 높은 분은 일본 화가들에게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텐데 하필이면 나한테 받으려 하느냐"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항간의 이야기처럼, 박중양이 일본관헌들을 혼내주고, 실직자를 취직시켜주고, 억울하게 구속된 사람을 풀어주고, 횡포한 경찰들을 혼내주는 등의 일화들은 친일귀족 박중양에 대한 오해에 불과한 것이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곧바로 친일파를 심판하지 못하였던 역사 앞에, 오직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침산과 박중양

조선 성종 때 문인 서거정(徐居正)이 노래한 '침산의 저녁노을(砧山晩照)'이란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물은 굽이돌고 산은 끝났는데

침산 푸른 숲에 가을빛이 어리었네"

침산! 금호강과 신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산이 하나 있는데 그 모양이 다듬잇돌처럼 생겼다하여 '침산'이라 하였다. 또 봉우리가 5개라 하여 '오봉산'이라고도 하였으나, 화려한 친일 경력자 박중양이 이곳을 작대기를 짚고 자주 오른 데서 '박작대기산'으로도 일컬어졌다.

박중양은 광복 후 친일파로 붙잡혔다가 곧 풀려나 대구 침산동 오봉산 기슭에서 말년을 보냈다. 박중양이 그의 기개(?)를 떨치기 위해 오봉산 제일봉에 '일소대(一笑臺)'라는 단(壇)을 세웠으나 지금은 철거되었고, 경기도 양주에서 이장했다는 그의 양친 합장묘만 능선에서 질곡의 세월을 지키고 있다.




#다음 연재인물은 사명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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