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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영남사람들 .17] 최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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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종기자 
  • 200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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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영남사람들 .17] 최석헌 [역사속의 영남사람들 .17] 최석헌

일제시기 반민족 행위를 저지른 친일파는 전국에 걸쳐 존재하였고, 영남지역에도 많았다. 친일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지역의 친일파로 박중양(朴重陽), 문명기(文明琦), 서병조(徐丙朝), 장직상(張稷相) 등을 쉽게 떠올릴 것이다. 이들은 경제력을 이용하여 일제에 충성하고, 자신들의 영혼을 일제에 팔아 넘긴 민족 반역자였다. 하지만 대표적인 친일파로 분류되는 친일 경찰의 면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 지역은 독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만큼 이를 탄압한 친일 경찰도 많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석현(崔錫鉉:1893∼?·창씨명: 山本祥資)을 꼽을 수 있다. 그는 30여년 동안 헌병보조원과 고등계 형사로 독립 운동을 탄압하며 일제에 충성을 다했던, 그야말로 일제에 온 몸을 바쳤던 이 지역 친일 경찰의 대부였다.

# 온갖 고문으로 독립운동가를 사망시키거나 불구로 만들어


최석현은 1893년 봉화군 석포면 석포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22세이던 1915년 영주 헌병분대의 헌병보조원이 되면서 반민족 행위의 길로 들어섰다. 이 당시 헌병보조원은 독립 운동을 염탐하고 독립운동가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고문을 자행하여 일반인 사이에 일제 헌병이나 경찰보다도 악명이 높았다. 일제가 1919년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헌병경찰제를 폐지하자, 그는 영주경찰서의 순사로 승급하였다.

최석현은 출세를 위해 독립 운동 조직을 적발하고 독립운동가의 검거를 주된 임무로 하던 고등계 형사를 자임하였다. 그는 자신이 체포한 독립운동가를 조사하면서 갖은 고문을 자행하였다. 경북경찰부 고등계 형사로 재직 중이던 1923년 소위 '가이(甲斐)순사 살해사건'을 취급하면서 관련자에게 성고문을 비롯한 온갖 고문을 자행하였으며, 27년에는 부하인 남학봉(南學鳳)·고창덕(高昌德)과 함께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을 고문하여 두 다리를 못 쓰는 불구로 만들었다. 1930년대에는 김천지역 독립운동사건을 지휘하면서 부하들에게 고문을 지시, 관련자를 사망하게 만들기도 했다. 고문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 증인으로 소환되거나 고소되기도 했지만, 일제 하에서 문제될 리 없었다. 오히려 25년 순사 부장과 경부보(警部補)로 승진하였으며, 29년에는 경부(警部)로 승진하였다. 이는 일반 경찰과는 다른 초고속 승진이었다.

1927년에 발생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은 대구는 물론 전국을 깜짝 놀라게 한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도자를 비롯한 사건의 전모는 쉽게 밝혀지지 않았다. 최석현은 2년에 걸친 조사 끝에 주도자가 장진홍(張鎭弘)임을 밝혀내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도 장진홍을 체포하지 못하자, 일본의 사찰을 찾아가 '국가 때문에, 사회 때문에 흉한(兇漢)을 무사히 체포하게 해 달라'고 기원까지 하였다. 결국 장진홍은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장진홍은 일제에 의해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라고 여기고 1930년에 자결, 순국하였다.



#독립 운동 만큼 친일 경찰도 수없이 많아

최석현은 1932년에 송세태와 함께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난 뒤, "웬일인지 기쁜 눈물이 뺨에 흐르고 있다"고 격한 감정을 토로했다. 그야말로 '일제보다 더 일제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이자 선산지역 대표적인 민족운동가인 박상희(朴相熙)를 체포하기도 했다. 이처럼 최석현은 일제 초기부터 광복직전까지 이 지역 독립 운동 관련 사건의 대다수를 취급하고,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반민족 행위를 저질렀다. 이러한 '눈부신 공로'로 35년 일제가 식민지 지배 25주년을 기념하면서 마련한 조선인 공로자로 표창을 받았으며, 40년 마침내 경찰로서 가장 높은 계급인 경시(警視)로 승진하였다.

그의 반민족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경북경찰관교습소 소장을 지내면서 많은 친일 경찰을 교육·육성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단체를 적발하고 독립운동가를 체포·고문하는 '비법'을 전수하였다. 그는 1945년 '경찰의 꽃'으로 조선인으로서는 좀처럼 기용되기 어려웠던 도경찰부 고등경찰과 과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45년 7월 경찰직을 떠나 강원도 영월군수로 재임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최석현 외에도 이 지역에는 친일 경찰이 많았다. 출세를 위해 초등학교 제자를 서슴없이 고문하며 '오니게이부(鬼警部)' 즉 '귀신잡는 경부'로 불렸던 서영출(徐永出), 의성경찰서 고등계 형사였던 배만수(裵萬壽), 최석현과 함께 장진홍 열사를 취조하는 등 20여년간 고등계 형사로 이름을 날린 김성범(金成範), 그리고 김성범과 함께 왜관 독서회 사건, 건국 동맹 사건을 취조하며 10여년간 고등경찰 노릇을 해온 문구호(文龜祜) 등이 있었다. 이들 외에도 안동농림학교의 조선회복연구단 단원들을 체포한 이대우(李大雨), 손대용(孫大龍)을 비롯해 김진탁(金晋卓), 이성옥(李成玉), 이정희(李貞熙), 김희택(金熙澤) 등도 악명을 떨친 친일 경찰이었다.


친일파 청산 지지부진 안된다!..명쾌한 과거 정리돼야 발전적 사회

광복 후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는 자주적인 민족 국가의 수립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친일파를 비롯한 일제 잔재의 청산이 중요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친일파를 보호·육성하고 권력의 요직에 기용함으로써, 친일파 청산은 무산되었다. 친일파 청산은 제헌국회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어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도 '반민특위 경상북도 조사부'가 설치되어 최석현의 체포에 나섰다. 당시 대구는 물론 서울의 주요 신문도 최석현을 '독립투사의 흡혈귀'로 묘사하며 체포 여부를 대서특필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그러나 최석현은 도피하여 끝내 체포하지 못했으며,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친일파 청산은 좌절되고 말았다.

친일파는 이후 권력은 물론 사회 모든 분야의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 반면, 독립운동가는 친일파에 의해 민족 반역자로 몰려 처단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야말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형국이었다. 이 때문에 세간에는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속설이 널리 퍼졌다. 최근 조사에서 독립유공자의 후손 10명 중 6명이 고졸 이하에다 직업도 없이 사회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와, 속설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국회가 친일 인명사전 편찬에 필요한 예산을 전액 삭감시키자, 국민의 힘으로 필요한 재원을 마련한 최근의 사태에서 보듯 친일파 처리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뜨겁다. 하지만 국회는 어떠한가. 지난 3월2일 우여곡절 끝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을 통과시켰지만, 누더기 법안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통과된 법대로라면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규명하기보다는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줄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발전적이고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나간 과거에 대한 명쾌한 정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오욕과 굴종의 시대였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독립유공자를 예우하고,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규명하지 않는 한, 그리고 가치 판단의 기준이 옳고 그름이 아닌 이해 득실 여부라는 믿음이 계속되는 한, 국가가 또다시 위기에 처했을 때 제2, 제3의 친일파가 나오지 않을 것인가. 그런 상황에서 그 누가 독립 운동을 하겠는가.

#다음 연재 인물은 이차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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