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 100돌 맞는 대구 수창초등

  • 입력 2007-07-07 07:22  |  수정 2007-07-07 07:22  |  발행일 2007-07-07 제6면
온갖 풍상 다 견뎌온 '100년', 다시 그리는 '교육 백년대계'
졸업생수만 4만여명…수많은 인재 배출
90년대 이후 도심空洞化로 학생수 급감
13∼14일 기념비 제막 등 다채로운 행사
개교 100돌 맞는 대구 수창초등
수창초등 학생들이 본관앞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1958년 건립된 옛 본관 건물(수창초등 총동창회 제공).

1909년 1월7일.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한성 이남 지역 시찰이 있었다. 대구역과 달성공원 사이에는 환영아치가 세워졌고, 행재소(현 경상감영공원) 앞에는 송영문이 세워졌다. 황제가 지나는 길에는 60만말의 흰모래도 깔렸다. 백리 밖 출입을 제지 당하고 있던 순종의 생뚱맞은 시찰을 두고 항간에서는 남쪽지방 시찰이 끝나면 부산에서 군함을 타고 일본에 볼모로 끌려갈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수창학교 학생 30여명은 경부선 철로에 누워 함께 죽어버리자면서 대구역으로 출발했다. "임금이 볼모로 잡혀가는 것은 절대 볼 수 없다"는 어린 학생들의 충정심이었다. 그 중에는 서른을 넘은 중년의 초등학생도 끼어 있었다. 교사들의 만류로 불발되긴 했지만, 이 때문에 대구부사 박중양의 요청으로 학교가 폐쇄될 뻔하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그 해 7월16일부터 33일간 대구는 임시수도가 되었다. 헌병학교에 건물을 내어주고 전쟁통의 학생들은 달성공원, 전매청 등을 전전하며 수업을 했다. 비를 겨우 가릴 정도의 허름한 가교사에서, 나무로 된 바닥이 아니라 흙바닥에서 나무판자에 끈을 달아 목에 걸고 그 위에 책을 얹어 공부를 했다. 낡은 가교사도 부족해 학년이나 학반별로 살림이 좀 넉넉한 학생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그 집 마루에서 교사들은 수업을 계속했다.

이렇게 이어져 온 수창초등의 역사가 13일로 100년을 맞았다. 한 세기 동안 수창의 교문을 드나든 동문수만 4만여명.

수창초등은 박준규·이만섭 두명의 국회의장을 비롯해 이용수 시인, 이인성·이쾌대·정치환 화가, 이성조 전 경북도교육감, 이맹희 전 제일비료회장, 서덕규 전 대구은행장, 지홍원 전 대구고법원장, 이재섭 조일알미늄공업 회장, 김달웅 경북대 총장, 조일환·황재홍·이종식·김윤환·박종근·강신성일 국회의원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수창초등 총동창회는 개교 100주년을 기념, 오는 13∼14일 이틀간 수창 100년사 발간, 기념비 제막, 역사관 설립, 장학기금 조성 등 다양한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13일 오전 10시 본교 강당에서 기념식을 갖고 재학생들의 학예발표회를 시작으로 기념비 제막식, 역사관 개관식을 갖는다. 14일 오후 5시에는 총동창회 주최로 인터불고 호텔 컨벤션홀에서 수창동문 기념축제를 개최한다.

도심 공동화 현상이 급속히 진행되고 시 외곽으로 아파트 밀집지역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면서 1990년대 이후 수창초등의 명성은 예전만 못하다. 학교 규모는 17학급 464명으로 크게 줄었고 정동진·강기웅·김용국·김성갑 등 유명출신을 배출했던 야구부도 한 팀을 채우기 힘든 상황.

이명규 총동창회장(한나라당 국회의원)은 "전국의 동문들이 참여하는 이번 행사를 계기로 다시 또 100년의 역사를 위한 동문과 학교의 발전을 위한 지속적인 사업을 계속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봄이 되자 플라타너스는 단단한 가슴을 열어서 많고 많은 씨앗의 군단을 바람에 날려 보낸다. 솜털 보송보송한 씨앗들은 산 넘고 개울 건너 우리가 상상도 못한 먼 곳까지 큰 뜻을 품고 날아가 뿌리를 박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세상의 숲이란 숲은 모두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 이 수풀 속에서 오늘도 어린싹은 자라고 숲을 거니는 사람들은 큰 나무 밑동을 두팔로 안아보며 감개무량한 얼굴로 세월을 더듬는다"(이동순 '숲의 정신-수창개교 100주년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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