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朴重陽과 친일파 재산의 국가귀속

  • 입력 2007-08-15   |  발행일 2007-08-15 제23면   |  수정 2007-08-15

친일반민족행위자 10명의 후손이 보유하거나 친일파 본인명의로돼 있는 토지 102만㎡(시가 257억원)에 대해 국가귀속결정이 연이어 내려진 것은 참으로 환영할 일이다. 정부가 수립된 지 60년이 되는 지금에 와서 이를 처리하는 현실이 부끄럽지만, 시간이 걸린 만큼 난관이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이는 광복후 친일매국노의 재산을 환수해야 한다는 국민여론을 외면하고 오히려 이들의 재산을 보호해 온 국가의 책임이다.

친일파 후손 및 친일파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한다 해도, 이들의 친일행위와 비교하면 최소한의 응징적 성격조차 띠지 못할 것이다. 이들이 친일과 매국의 대가로 누려온 영화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2차 국가귀속 대상자들이 일제 강점기에 보유한 토지나 임야는 모두 1천660만㎡이지만, 자식들 이름으로 보유한 토지가 많은 민영휘(閔泳徽)의 경우 실제 보유토지가 7천600만㎡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귀속 대상자 가운데 박중양(朴重陽 1874~1955)이 포함된 것은 대구사람들에게 남다른 감회로 다가온다.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를 받으면서, 대구거주 일본인의 이권을 대변한 인물이다. 친일과 관련된 여러 행각은 제쳐두고, 대구의 성곽을 허물어뜨린 장본인이다. 박중양이 대구성곽을 파괴한 것은 대구 상권을 장악하려는 일본 상인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다.

국가귀속 대상이 된 박중양의 토지는 침산공원으로 알려진 대구시 북구 침산동 산16의 1 등 37필지 8만2천㎡다. 서거정(徐居正)이 대구10경의 마지막으로 장식한 '침산만조(砧山晩照)'를 노래한 곳이다. 이곳엔 한때 박중양의 호방함을 알리는 일소대(一笑臺)가 당당히 서 있었다. 철거된 것이 겨우 10년 전이다. 작대기를 짚고 이곳을 오르내리던 박중양이 조선사람을 괴롭히는 일본 관헌을 혼내곤했다는 '박작대기'의 일화가 최근까지 이곳 주변을 맴돌았다.

박중양은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구금되면서까지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개신(改新)'을 주장했으며, 심지어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다'라는 등 전혀 개전의 빛이 없었다.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시간이 흐르자, 언론에서조차 '뛰어난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탁월한 수완을 지녔던 희대의 걸물'로 박중양을 묘사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일제강점기 거물 친일파를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두 단면이자, 친일파를 단죄 못한데서 빚어진 일화다. 친일파의 매국행위에 대한 왜곡을 막기 위해서도 철저한 재산추적과 환수작업이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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