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성냥공장 의성 성광성냥의 '56년 불꽃인생'

  • 입력 2010-02-05 07:47  |  수정 2010-02-05 07:47  |  발행일 2010-02-05 제34면
'성광성냥 있으면 무사귀환' 뱃사람들이 부적처럼 여겼지
70년대엔 한달 6억 벌었는데 요즘은 공장 돌리기도 벅차
마지막 성냥공장 의성 성광성냥의

전성기땐 162명이나 근무했는데 80년대 후반 1회용 라이터 나오고 중국산까지 수입되면서 '사양길'
그나마 접객업소 광고용이나 사찰 촛불용 성냥 주문 있어서 겨우겨우 문 안닫고 버티고 있지

마지막 성냥공장 의성 성광성냥의 56년 불꽃인생

1986년 주윤발 주연의 홍콩 느와르 영화 '영웅본색'.

총격전 중에도 태연한 표정으로 씹어댔던 '고독한 영웅' 주윤발의 성냥개비. 화염을 토해냈던 쌍권총보다 더 빛났다. '말괄량이 삐삐' 같았던 여배우 최지우도 그걸 흉내내며 광고를 찍었다. 하지만 그 영화에서 빛났던 성냥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무렵 대다수 사람들은 성냥이 아니라 1회용 라이터를 신봉했다. 그 어름 '성냥 전성시대'는 쓸쓸하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예전 어른들은 성냥을 '다황'이라고 했다. 정확한 표기는 다황이 아니라 '당황'. '중국에서 전해진 황(黃)'이라는 의미로 '당황(唐黃)'이라 했다. 50만년전 인류가 불을 발견한다. 불씨 확보! 예전 농경사회의 '지상명령'이었다. 불씨는 '생명선'이었고 모두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1669년 독일의 과학자 브란트가 저절로 불이 붙는 인(燐)을 발견한다. 1680년 영국 과학자 보일이 성냥개비를 문질러 불내는 원리를 알아낸다. 1827년 원시적 딱성냥까지 나온다. 하지만 인의 강한 독성 때문에 턱뼈가 괴사하는 '인악(燐顎)'이라는 부작용이 생긴다. 안전한 성냥은 1910년 미국에서 개발된다.

1880년 개화승 이동인이 일본에 갔다가 수신사 김홍집과 동행 귀국할 때 처음으로 성냥을 가지고 들어왔단다. 하지만 한국인은 언감생심. 1917년 일본사람들이 인천 금곡동에 세운 '조선인촌(朝鮮燐寸)'이 성냥을 대량 생산한다. 최초의 한국 성냥공장은 광복 직후 인천의 대한성냥. 일제 때는 고가였다. 한 통에 쌀 한 되 가격.

한국 성냥의 역사는 인천에서 시작됐다. 인천이 성냥도시가 된 건 압록강 쪽에서 목재 조달이 원활했기 때문이다. 6·25를 전후해서 인천 금곡·송림·화수동 일대 주택가에 성냥공장이 즐비했다. 그 시절, 몰래 성냥을 훔쳐가는 손 검은 여공을 겨냥해 '인천 성냥공장 아가씨'란 풍자송까지 등장해 한때 군가 이상의 인기를 얻는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는 모양이다.

300곳이 넘었던 성냥공장이 이제 자취를 감췄다. 남은 건 딱 한 곳, 의성 성광성냥 뿐이다. 인천의 대한, 부산의 UN과 함께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지금은 가끔 기계를 돌리며 광고용 성냥만 만든다. '사형선고'를 받고도 대를 이어 성냥을 고수하는 성광성냥을 설밑에 돌아보고 왔다.

◇…한국직업사전에서 사라진 성냥갑제조원

의성향교와 이웃한 성광 성냥(사장 손진국·74).

너무 퇴락한 나머지 흡사 철거중인 공장 같았다. 오후 2시. 공장 마당을 오가는 직원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지는 9천570㎡, 모두 10개동의 작업장이 머리를 맞대고 이어져있다. 60년대 지어진 그 시설 그대로다.

한 작업장의 녹슨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봤다. 너무 썰렁하다. 난로가 있지만 훈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중년 여성 두명의 표정은 상대적으로 밝다. 마치 동굴 처럼 어두침침한 작업대에서 A3 복사지보다 조금 넓은 나무곽에 담긴 수만개의 성냥개비를 한 줌 집어내 벽돌 반 개 정도 크기의 성냥갑에 가지런하게 채워넣은 뒤 스테이플러 비슷한 봉합기로 뚜껑을 막고 있다. 성냥개비는 650개 남짓. 성냥 한 통 도매가라고 해봐야 부과세 포함, 고작 660원. 팥빵 한개 가격에도 못 미친다. 현재 성냥 신세가 어느 정도로 추락했는지를 가늠케해준다.

70년대 전성기엔 월 6억원 매출을 올렸는데 지금은 2천만원도 버겁단다. CD 때문에 비닐로 만든 LP 음반이 붕괴했듯 1회용 라이터의 등장으로 성냥은 더 이상 일반인에게 철저하게 버림을 받은 것이다.

◇…성광의 전성기 '한집 건너 성냥갑 부업'

1954년 2월8일 문을 열었다.

초창기에는 대구에서 의성 들어오는 초입인 후죽동에 있었다. 최고 전성기는 70년대다. 그때는 전국에 300여개의 성냥공장이 경쟁을 벌였다. 성광이 잘 벌 때는 월 6천만환(6억원) 매출을 올렸다. 매일 3만여통의 성냥이 쉴새없이 쏟아져나왔다. 지금은 직원이 채 10명도 안 되지만 그때는 162명이 성냥 때문에 밥을 먹고 살았다.

농한기 땐 의성읍민들에게 부업거리도 주었다. 한집 건너 한집이 성냥갑 만드는 부업에 뛰어든 것이다. 교통망과 택배망 미비로 서울 등지는 화물차에 의존했지만 나머지 지역은 직접 트럭을 몰고 영업하러다녔다. 한번 나가면 3~4일만에 돌아왔다.

특히 성광은 습기에 매우 강해 해안가 뱃사람들에겐 절대적 인기를 얻었다.

"내륙 지방은 물론 특히 부산, 영덕, 울진, 고성 등 경남북·강원도 동해안 사람들은 우리 성냥에 광분했구마. 해안가는 염분이나 습기가 많아서 성냥이 금방 눅눅해지는데, 불을 댕기는 두약(頭藥) 알맹이가 까만 우리 성냥은 그런 일이 전혀 없거든요."

성광이 자체에서 기획생산 중인 것은 두 종류. 한 종류는 가장 오래 된 버전인 성광, 또 하나는 '향로'. 상표등록번호 15544인 이 상표는 당초 향로였는데 상표권 분쟁 때문에 상징물이 오리로 변경된다. 불을 등에 이고 업고 있는 오리 그림은 유달리 뱃사람들이 좋아했다. 오리는 물에 가라앉지 않기 때문에 선원들이 무사귀환을 보장받을 수 있고, 해풍 속에서도 성냥불이 잘 붙기 때문에 향로를 부적처럼 여기며 이른바 '묻지마 구매'를 한 것이다.

80년대중반부터 자동화시스템을 구축한다. 당시 8천만원이나 하던 윤전기(반자동 성냥 제조기)를 두대씩이나 공장에 들였다.

◇…1회용 라이터가 성냥을 죽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1회용 라이터가 대중화 되고, 가스레인지 등이 일반 가정에 들어오면서 성냥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든다.

특히 1회용 라이터의 등장은 광고용 포켓성냥의 판매에 큰 타격을 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중국산 성냥까지 수입되면서 사면초가에 빠진다.

성광은 변화하는 성냥시장을 제대로 읽지 못한채 과잉투자를 한 것이다. 그것은 성광 뿐만이 아니었다. 천안의 아리랑 성냥은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아 종이성냥도 만들며 돌파구를 찾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무리하게 투자한 성냥 만드는 1천t짜리 윤전기 한 대도 얼마전 방글라데시에 팔았다. 문 닫으면 다 고철 값이니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넘기고 말았다. 그나마 공장을 간헐적으로 돌리는 건 광고용 성냥과 일부 사찰의 촛불용 성냥 수요 때문이다. 모텔, 야식촌, 다방 등 접객업소에서 광고용으로 성냥을 구입한다. 일종의 OEM방식의 성냥인 것이다. 아직 성직자와 무속인 등 종교계에서는 아직 라이터보다 성냥을 선호한다. 011-505-7442

◇ 성냥 어떻게 만드나…

성냥 나무재료는 포플러…자르고 벗겨내고 말리고 10여단계는 거쳐야 완성

모든 나무로 성냥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무젓가락 원료이기도 한 이태리 포플러만한 게 없다. 이 나무는 무르면서도 질기다. 마르면 잘 부러진다. 화약을 올리기 전에 파라핀을 먹여야 되는 데 너무 단단하면 목질속으로 잘 파고들지 못해 불이 잘 켜지지 않는다. 요즘은 포플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그 시절에는 강둑, 논두렁밭두렁, 신작로변 등에 포플러가 지천으로 늘려 있었다. 1960~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그 나무의 생산성을 염두에 두고 전국 각처에 심어라고 지시했다. 주문이 폭주하는 바람에 나무를 구하러 다닐 겨를이 없었다. 나무 중간유통상을 통해 대량 매입했다.

성냥 하나의 굵기는 가로 2.2㎜ 세로 2.2㎜ 길이 4.2㎝.

10여 단계를 거쳐야 완성품이 나온다. 포플러 겉껍질을 벗긴뒤 전기톱으로 1자 2치 길이로 자른뒤 롤러에 걸어 두루마기처럼 생긴 피를 만든다. 이 목피가 절단기에 들어가면 성냥개비 모양으로 잘려져 나온다. 축축한 성냥개비는 80℃ 건조기에서 말려야 된다. 건조후부터 1시간30분 가량 지나면 갑에 넣는 작업대로 이송돼 온다.

성냥개비는 워낙 가볍기 때문에 공정과 공정 사이는 공기흡입기로 빨아들여 이동시킨다.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절차는 성냥개비 끄트머리에 화약을 바르고, 성냥갑 옆면에 마찰판을 부착시키는 일이다.

성냥개비 끝에 바르는'두약(頭藥)'. 주요 성분은 유황, 유리가루, 아연, 염소산가리, 아교, 규조토 등인데 잘 배합해야 된다. 특히 염소산가리 성분이 좋아야 불이 붙을 때 좋은 소리가 난다. 예전에는 스웨덴산을 사용했는데 요즘은 질감이 좋지않은 중국산이라서 불붙는 소리가 요란하고 불길도 차분하지 못하고 너울거린다.

성냥곽 옆면에 띠처럼 부착되는 '적인(赤燐)'. 여기에 두약이 마찰되어야 불이 난다. 적인의 주성분은 유리가루, 산화철, 프리졸 등이다.

현재 생산되는 성냥은 대갑이 2종(향로와 성광), 그밖에 크고 작은 미닫이 성냥은 광고용으로 주문생산된다.

>>> 성광성냥 손진국사장 현장인터뷰

요즘엔 손님보다 기자들이 더 많이 와…성냥공장 체험관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어

손진국 사장은 1954년 북에서 피란온 양태훈·김하성 사장 밑에 들어가 일을 배우고 몇년 안돼 공장장이 된다.

그런 손 사장의 호주머니에서 성냥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편리함 때문에 라이터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늘 작은 성냥 2통을 갖고 다녀야 안심이 된단다.

"요즘 나를 가장 많이 찾는 사람들이 누군 줄 아세요. 바로 신문·방송사 기자들이예요. 우리나라에서 하나 남은 성냥공장이라고 자꾸 취재하러 오는 데 취재하는 댁들은 좋을 지 모르지만 나는 얼마나 괴로운지 아능교? 일반인들은 이제 더 이상 성냥을 찾지 않아요. 다방, 모텔, 야식집 등에서 광고용으로 간혹 찾을 뿐이지."

손 사장은 7~8년전 공장을 접으려고 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적극적으로 공장을 살리려고 하기에 용기를 내서 계속 성냥을 생산하고 있다. 그가 좋았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성냥불을 켠다.

"성광의 두약 기술은 전국적으로 알아줬구마. 당시 성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습기에 취약하다는 사실입니다. 장마철엔 적인이 눅눅해져 몇십번 그어도 불이 잘붙지 않았지만 우리는 특수기술을 적용해서 이런 단점을 없앴기 때문에 특히 뱃사람들이 많이 찾았어요. 성냥 꼬다리 끝에 뭍힌 두약에 비밀이 있어요. 지금과 달리 검정색 두약을 붙였는데, 연통 안에서 수집한 그을음을 섞어 만들었고 그래서 두약이 물컹해지지 않고 불이 잘붙었어요."

요즘은 주문이 거의 없어 기계를 1주일씩 놀릴 때가 많다. 틈틈이 초등학교 등에서 견학을 오기도 한다. 성광 혼자서 버티기는 너무 힘들다. 하지만 그의 성냥사랑은 지극한 구석이 있다. 공장 곳곳을 보수하고 기계를 재정비해서 '성냥공장 체험관'을 개관하고 싶단다.

이참에 지자체에서 적극 나서 고사 직전인 성광에 관심을 쏟았으면 한다.

마지막 성냥공장 의성 성광성냥의
마지막 성냥공장 의성 성광성냥의
마지막 성냥공장 의성 성광성냥의
마지막 성냥공장 의성 성광성냥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사회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