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遷位 기행 .25] 송설헌 장말손(1431~86)

  • 입력 2011-06-01   |  발행일 2011-06-01 제20면   |  수정 2011-06-01
文武 함께 갖춰 격문과 대화로 敵 물리치다
글씨 : 土民 전진원
'탁월한 학식과 충성심’ 성종도 극찬
이시애 난 평정후 예조참판 등 올라
낙향한 후 속세와 거리 둬 유유자적
[不遷位 기행 .25] 송설헌  장말손(1431~86)
송설헌 신주를 모시고 있는 사당(연복군종택 내) 전경. 다른 종택의 사당과 달리 담장이 둥글게 처리돼 있는데, 모나지 않게 살라는 선조의 유훈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조선 전기 문신인 송설헌(松雪軒) 장말손(1431~86).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송설헌은 세조 때 강순의 휘하에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움으로써 공신의 녹훈을 받고 연복군(延福君)에 봉해졌으며, 불천위에 오른 인물이다.

송설헌이 별세한 후 성종이 내린 사제문(賜祭文)에서 그에 대해 '타고난 성품은 순수하고 성실하며(性質純穀)/ 학식은 통달하였네(學識疏通)/ 충성스럽고 의로운 도리는(忠義之道)/ 실로 마음 깊이 새겨 잊지 않는 바였네(實所佩服)’라고 표현했다.


◆문무 겸비, 변방의 적 소탕에도 큰 역할

송설헌은 1453년 23세 때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 때 점필재 김종직도 함께 급제했다. 승문원 박사와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1465년에는 함길도 병마도사(兵馬都事)로 부임, 함길도 절제사(節制使) 강순의 막하에서 활약했다. 몇 달 후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돼 경성절도사(鏡城節度使) 허종의 막하에서 각지를 순찰하며 민정을 살폈다.

당시 과거 동기인 김종직이 시를 보냈다. '황금 갑옷 담비 갑옷 입은 나그네의 정이(金甲貂 遊子情)/ 쓸쓸히 낙엽 떨어지는 변방성에 울리네(蕭蕭落木響邊城)/ 시서를 벗삼아 온 글 잘하는 장군이니(詩書從事詩書將)/ 요망한 기운을 변방에서 싹 쓸어버릴 것을 기쁘게 보리라(喜見妖氣塞外淸).’

송설헌은 이처럼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송설헌이 1466년 회령(會寧)에 이르러 변방을 지키고 있을 때, 여진족 아지발(阿只拔)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송설헌은 성벽을 튼튼히 하고 격문(檄文)과 대화로 적을 달래 물리쳤다. 그리고 해안으로 쳐들어온 해적도 소탕했다.

당시 남다른 교분을 나누던 허백당(虛白堂) 홍귀달이 각별히 '듣거니 그대 담소로 적을 물리쳐(聞君談笑能却賊)/ 자잘한 무리 얼씬도 못했다지(魚樵不敢近城池)…’라 읊은 시를 보내왔다.

변방의 적들을 소탕하고 이해 겨울 조정에 돌아오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패도(佩刀·보물 제881호)와 옥피리(玉笛), 은잔(銀盃)을 하사했다. 은잔은 6·25 전쟁때 잃어버렸다 한다.



◆이시애 난 평정한 공로로 공신에 올라

1467년 2월에 예조좌랑에 올랐고, 5월에 이시애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다시 함경도로 떠났다. 송설헌은 강순 막하에서 전략 수립에 참여하면서 길주, 흥원, 북청 등지에서 이시애의 반군을 대파할 수 있었다. 이후로는 반군의 토벌이 순조로이 진행되었고, 이시애는 경성으로 퇴각했다. 그 후 이시애 등이 토벌군 진지에서 목이 잘림으로써 3개월 동안 함길도(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은 평정되었다.

이시애 난은 회령부사를 지내다가 상을 당해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가 길주에서 중앙집권적 정책에 대한 지역 사람들의 불만에 편승해 일으킨 반란이다. 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저항했으나 세조가 왕족인 귀성군(龜城君) 이준을 병마도총사로 삼고 허종,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이 대장을 맡은 토벌군을 출동시켜 난을 평정케 했다.

이 난으로 길주는 길성현으로 강등되고, 함길도는 남·북 2도로 분리되었다.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도 폐지되었다. 그리고 이준, 허종, 강순, 어유소 등 40여명은 정충적개공신(精忠敵慨功臣)으로 녹훈되었다.

이 난 평정 공로로 송설헌도 2등 공신에 올랐고, 적개공신상훈교서(敵慨功臣賞勳敎書: 보물 제604호)와 함께 땅 100결과 은 50량, 말 한 필, 노비 10명 등을 받았다. 그리고 내섬시 첨정(內贍寺 僉正)에 특진되었다. 2년 후인 1469년에는 공신회맹록(功臣會盟錄: 보물 제881호)이 내려졌다.

그 후 공조참의, 예조참의, 예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의 벼슬에 올랐다.



◆관직 사임 후 화장(문경)으로 이거

47세가 된 해인 1477년에는 낙향해 살 곳으로 당시의 예천 화장(花庄), 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를 찾아보고 점지해 두었다. 5년 뒤인 1482년 봄에 벼슬을 사임하고 화장으로 물러나 송설헌(松雪軒)을 짓고, 한운야학(閑雲野鶴)을 벗삼아 유유자적하게 보내게 된다. 이 해 가을 연복군에 봉(封)해졌다.

1486년 6월(음력)에 별세하니 왕(성종)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제사를 치르게 했다. 또한 나라의 지사(地師)로 하여금 산소 자리를 예천군 호명촌 뒷산에 정하고 장사를 지내게 했다. 가을에는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등으로 증직(贈職)하고, 3대를 추증(追贈)했다. 그리고 시호 '안양(安襄: 화목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 것이 安이고, 일로 말미암아 공이 있는 것을 襄이라 한다)’을 내렸다.

1489년에는 나라(충훈부)에서 그려놓았던 송설헌 영정이 하사되고, 신주를 사당에 영원히 모시도록 허락하는 '부조(不 )’의 명이 내려졌다.


■'송설헌 불천위’이야기

“후손이 모나지 않게 살아가길…" 사당의 담장을 둥글게 쌓아

송설헌 불천위 신주를 모시고 있는 연복군종택(영주시 장수면 화기리)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송설헌의 손자 장응신이 31세 나이에 아버지 장맹우(46세 별세)에 이어 요절하면서 죽기 전 “어지러운 정국에 휘말리지 않고 자손이 번성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조용히 은둔하며 살고, 남 앞에 나서지 마라"고 유언을 남겼고, 후손이 그런 곳을 찾아내 자리잡은 곳이다. 지금은 물론 주변에 안내표지까지 있다. 현재 송설헌 16세 종손 장덕필씨 부부가 살고 있다.

종손은 “선조의 유훈에 따라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덕분에 집안의 소중한 유물들을 잘 보존해올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연복군종택의 불천위사당은 다른 종가와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우선 보통 종택의 우측(동편) 뒤쪽에 사당을 두는 데 비해, 연복군종택 사당은 종택(동향) 좌측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불천위 사당의 담장을 둥글게 쌓은 점이다. 통상 담장은 사각으로 각지게 만들어져 있다. 연복군종택 사당 담장을 둥글게 한 것은 후손들이 모나지 않게 살아가라는 선조의 가르침을 표현한 하나의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400여년 된 사당은 초가였다가 기와집으로 바뀌었고, 불천위 내외 신주만 봉안하고 있다. 4대조 신주는 종택의 다른 방에 모셔왔다고 한다. 종손은 4대조 신주를 함께 모시면 그 조상들 기제사 때마다 들락날락해야 하는 만큼, 불천위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겨 처음부터 사당에는 불천위 신주만 봉안했다고 들려줬다.

4대조 신주도 현 종손의 부친이 후손들에게 부담을 덜어주고자 근래 조매(땅 속에 묻음)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씨가 20여년 전 부친 신주(사후 3년 뒤에 마련)를 만들기 위해 밤나무를 잘라 준비해뒀는데 신주용으로는 쓸 일이 없어져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것을 보관하고 있으며, 최근 모 서원에서 위패를 만들기 위해 밤나무를 원했으나 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당은 설·추석과 기제사, 그리고 종부가 들어올 때만 연다.

불천위 제사는 합설로 양위 기일(고위 6월7일, 비위 5월7일)에 지낸다. 종택 사랑채인 화계정사(花溪精舍)에서 지내며, 제관은 20~30명. 편은 두 틀을 올린다. 제주는 가양주를 담가 사용하다 지금은 종부 건강도 안좋고 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제수는 '조동율서 이시재중(棗東栗西 梨枾在中)’, 즉 대추는 동쪽 끝에 놓고 밤을 서쪽 끝에 놓으며, 배와 감은 중앙에 놓는다.

종손의 조상에 대한 정성과 예의는 각별했다. 사당과 유물각을 둘러볼 때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 등 의관을 정제한 뒤 안내했고, 유물각에 들어서서는 자리를 펴고 연복군 영정 앞에서 재배를 한 뒤 안내했다. 김봉규기자

■장말손 약력

△1453년 사마양시 합격 △1459년 문과 급제 △1463년 사헌부감찰, 사간원정언 △1476년 공조참의, 예조참의 △1482년 가선대부 연복군 △1486년 별세, 시호 '안양(安襄)’ △1862년 예천 송계서원에 위패봉안 제향


■송설헌의 '패도’에 얽힌 일화

6·25때 인민군이 탐내 땅속에 묻어뒀다   
27년후 당시 종손의 꿈에 송설헌이 현몽
묻혀진 위치 알려줘 기적적으로 되찾아

여진족 아지발 무리를 물리친 공으로 임금에게 받은 패도가 지금까지 보존돼 올 수 있었던 것과 관련, 후손의 정성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엿보게 하는 일화가 있다.

6·25 전쟁 당시 연복군종택은 여러 종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민군 본부로 사용됐다. 한 인민군이 종가의 유물 중 패도를 탐내 가져가려고 땅 속에 묻어 감춰두었다. 그러나 갑자기 후퇴하는 바람에 미처 그 패도를 챙기지 못하고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없어진 패도가 어떻게 됐는지, 어디에 묻혀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종손(현 종손 부친)은 집안의 귀중한 보물을 잃어버린 점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종가에서 처분한 게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까지 받기도 했다.

그러나 패도는 27년 후에 찾게 된다. 당시 종손은 추원사(追遠祠) 건립 문제로 고민이 많았는데, 꿈에 연복군이 현몽해서 패도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패도를 찾을 수 있었고, 종손에게 쏠렸던 의심도 사라지게 되었다. 기적이라고 할 만한 일이다. 종손의 간절한 마음에 하늘이, 조상이 감동한 것일까.

패도를 다시 찾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탓에 칼집의 일부가 부식됐고, 당초의 원형이 다소 훼손돼 후손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같은 사연이 있는 패도는 1986년 10월 보물 제881호로 지정됐다. 손잡이가 금으로 장식돼 있고, 칼집이 상아와 은사(銀絲) 등으로 된 이 패도는 길이 13.8㎝.

[不遷位 기행 .25] 송설헌  장말손(1431~86)
사당의 신주 감실 등을 깨끗이 청소하는 데 사용했던 도구.
[不遷位 기행 .25] 송설헌  장말손(1431~86)
변방의 적들을 소탕한 송설헌에게 세조가 하사한 패도(보물 제8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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