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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으로 불리는 서애종택(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사랑채 건물. |
지난 3월24일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이지스구축함 ‘서애류성룡함’ 진수식이 진행됐다. 우리나라 세번째 이지스함의 이름 ‘서애 류성룡함’ 선포와 관련, 국방부장관은 “우리 후손들이 다시는 전란의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징비록’이라는 역사적 저작을 남긴 조선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 선생이 그 위대한 이름과 함께 바다의 수호신으로 부활했다”고 말했다. 다른 두 이지스함 명칭은 ‘세종대왕함’과 ‘율곡 이이함’이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은 조선의 대표적 명재상으로,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특출한 지혜와 충성심으로 극복한 전략가·경세가(經世家)다. 또한 평생 학문을 닦으면서 걸출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낸 대학자다. 서애가 임란 후 고향 안동 하회에서 집필한 임란 회고록 ‘징비록(懲毖錄)’은 여러가지 면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 저서다. 국보 제132호로 지정돼 있다.
△1542년 의성 사촌리(외가)에서 출생 △1562년 퇴계 이황에게 ‘근사록’ 공부 △1566년 문과 급제, 승정원 권지부정자 △1580년 상주목사 △1590년 우의정 △1591년 좌의정 △1593년 영의정 △1598년 모든 관작 삭탈 △1599년 낙향 △1600년 직첩 회복 △1602년 청백리 △1607년 안동 하회에서 별세 △1614년 병산서원 배향 △1627년 시호 ‘문충(文忠)’
◆징비록에 담긴 서애의 절절한 애국심
징비록의 내용 일부를 통해 당시의 상황과 서애의 심정을 들여다보자.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군량 운반에 지친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힘이 있는 자들은 모두 도적이 되었으며, 전염병이 창궐하여 살아남은 사람도 별로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
서울 수복(4월 20일) 후의 일이다. ‘나도 중국 병사들과 함께 들어갔는데, 성 안의 백성들은 백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살아있는 사람조차 모두 굶주리고 병들어 있어 얼굴빛이 귀신 같았다. 날씨마저 더워서 성 안이 죽은 사람과 말이 썩는 냄새로 가득했는데, 코를 막지 않고는 한 걸음도 떼기가 힘들었다. 건물은 관청과 개인 집을 막론하고 모두 없어져버렸고, 왜적들이 거처하던 숭례문에서 남산 밑에 이르는 지역만 조금 남아 있었다. …나는 먼저 종묘를 찾아 엎드려 통곡했다.’
‘당시 적은 파죽지세로 몰아닥쳐 불과 10일만에 서울까지 들이닥쳤으니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손을 써볼 겨를이 없었으며, 용감한 장수라도 과감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민심 또한 흩어져 수습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방법이 서울을 함락시키는데 뛰어난 계략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적은 항상 이긴다고만 생각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갈래로 흩어져 마음대로 날뛰었다. 그러나 군사는 나누면 약해지기 마련이다. …왜적의 계략이 잘못된 것은 우리에게는 천우신조였다.’
서애는 이러한 왜적의 잘못된 전술을 잘 역이용해 하나도 살려보내지 않음으로써 수십년 수백년 후에도 우리 강토를 넘볼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약하고 명나라 장수들도 유능하지 못해 그저 적을 내쫓을 수는 있어도 응징하거나 두려운 마음을 갖도록 하지는 못했다고 한탄하면서 ‘지금 생각해보아도 이가 떨리고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고 표현했다.
징비록의 ‘징비’는 ‘시경’에 나오는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 자신의 잘못을 거울삼아 후환을 대비한다는 의미)’에서 유래한다. 서애는 이런 집필 목적에 따라 임진왜란의 전황은 물론, 자신의 잘못과 조정 내의 분란, 백성들의 원망 등을 가감없이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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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류성룡의 위패가 모셔진 병산서원(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와 병산 풍경. |
◆보기드물게 뛰어난 행정능력
서애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입암(立巖) 류중영의 아들로, 의성 외가에서 태어났다. 서애는 21세(1562년)에 안동 도산의 퇴계 이황 문하로 들어가 ‘근사록’ 등을 배우며 학문을 닦았다. 학봉 김성일과는 동문이다. 퇴계는 당시 서애에 대해 “이 젊은이는 하늘이 내려 낳은 사람이다. 훗날 반드시 국가에 큰 공을 세울 것이다(此人天所生也, 他日所樹立必大)”라고 말했다.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한 서애는 승정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한다. 1569년 사헌부 감찰이 된 서애는 서장관으로 명나라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에 가서 연경의 학자들과 당시 학계의 추세에 대해 문답하면서 ‘진사백(陳白沙:이름 獻章)은 도를 깨달은 것이 정밀하지 못하고, 왕양명(王陽明)은 선학(禪學)으로 얼굴만 바꾸었으니, 설문청(薛文淸: 이름 瑄) 학문의 순정(純正)함만 못하다’고 설파해 그들을 놀라게 했다. 세 사람은 모두 명나라의 대표적 유학자들이다.
1591년 좌의정에 오르고 이조판서를 겸하게 된 서애는 그해 2월 조정의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왜국의 침공 조짐을 명나라에 통고하도록 하고, 7월에는 왜란에 대비해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도좌수사로, 형조정랑이던 권율을 의주목사로 임명하도록 했다. 이 파격적인 인사에 대해 반대가 엄청났으나 그는 끝까지 밀고나가 성사시켰다.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특히 이순신에 대해서는 조정 중신은 물론 국왕까지 의심의 눈길을 보냈음에도, 언제나 간곡하게 그렇지 않다는 점을 설명해 구국의 재목이 되도록 했다.
다른 조정 관료나 정승과 달리 서애는 행정능력도 탁월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서애에 대해 ‘경연(經筵)에 출입한 지 25년 만에 상신(相臣: 재상)이 되었으며, 계사년에 수상으로서 홀로 경외(京外)의 기무(機務)를 담당했다.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과 게첩(揭帖: 문서)이 주야로 폭주하고, 여러 도의 보고서들이 이곳저곳으로부터 몰려들었는데도 성룡은 좌우로 수응(酬應)함에 그 민첩하고 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았다’고 적었다.
◆임란 때 영의정으로 탁월한 역량 발휘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서애는 좌의정으로서 특명에 따라 병조판서를 겸임하게 된다. 그리고 도체찰사로 임명돼 군무도 총괄하게 된다. 5월에는 국왕을 모시고 개성으로 피란했다. 당시 선조 임금이 동파역에서 국난 타개책을 신하들에게 묻자 “의주로 피란했다가 사태가 위급할 경우에는 즉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서 명나라에 내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서애는 이에 대해 “임금의 수레가 우리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大駕離東土一步地, 朝鮮非我有矣). …지금 동북(東北)의 여러 도는 그 전과 변함이 없고, 호남 지역의 충신의사(忠臣義士)들이 며칠 안에 벌떼처럼 일어날 것이온데, 어찌 경솔하게 나라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너간다는 일을 의논해야 하겠습니까”하면서 강력하게 제지하면서 국란 타개책을 세웠다.
한편 서애는 개성에서 영의정에 임명됐으나 일부의 모함으로 그날로 파직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애는 얼마 후 1593년 10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고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무하면서 군무, 외교, 민정 등의 업무를 수행하며 전란의 국가를 이끌어갔다. 그는 1598년 10월까지 영의정으로서 모든 분야를 종횡무진하며 탁월한 역량을 발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애는 정유재란 이듬해인 1598년 10월 북인(北人)들의 탄핵으로 파직당하고, 12월에는 모든 관작을 삭탈당한다. 1599년 2월 고향 안동의 하회로 돌아간 그는 조용히 제자를 가르치며, 학문과 저술에 몰두한다. 청백리였던 그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마땅한 거처도 마련되지 않았고, 타고 다닐 나귀조차 없었다. 1600년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다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징비록 저술은 1604년 7월에 완료했다.
서애는 1607년 5월 고향의 농환재(弄丸齋)에서 별세한다. 그 부음이 서울에 전해지자 서애의 옛집터에 1천여명의 조문객이 몰려가 통곡했고, 조정은 사흘간 조정의 회의와 시장을 정지했다.
그는 평생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학문을 닦는데 최선을 다했음에도 만년에 ‘세 가지 회한(三恨)’이라는 글을 남겼다. ‘나의 한 평생에 세 가지의 회한이 있으니, 군주와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것이 그 첫째 한이요, 관작과 위계가 너무나 지나쳤는데도 일찍이 물러나지 못한 것이 그 둘째의 한이요, 도(道)를 배울 뜻을 가졌음에도 이를 성취하지 못한 것이 셋째 한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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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불천위 제사상에 오르는 중개떡. |
■‘서애 불천위’이야기
큼직한 건빵 모양 중개떡 즐겨 먹어
대부분의 다른 불천위 인물과 마찬가지로 서애 불천위에 대한 기록도 없어 어떤 과정을 거쳐 불천위가 결정됐는지, 언제부터 불천위로 모시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류영하 종손(85)도 잘 모른다고 했다.
서애 불천위 신주는 종택(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내 사당에 단독으로 모셔져 있다. 류영하 종손은 “6·25때 피란하면서 사당에 봉안하고 있던 신주 중 4대조 신주는 조매해버리고, 불천위인 서애 부부 신주만 모시고 피란했다. 복귀해서도 불천위 신주만 다시 봉안하고 4대조 선조는 신주 없이 지방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들려줬다.
불천위 제사(음력 5월6일)는 기일 자시에 종택 안채 대청에 제상을 차리고 지낸다. 요즘 참석 제관은 50여명이며, 제관들은 마루와 안마당에 자리를 잡는다. 종택은 ‘충효당(忠孝堂)’이라 부르는데, 이 당호는 서애가 평소에는 물론 유언으로 충(忠)과 효(孝)를 강조한 점을 받들어 정한 이름이다.
제수 중 타 종가와 다른 것으로 중개(仲介)떡이라는 것이 있다. 밀가루와 술, 꿀 등으로 만드는 중개떡은 서애가 생전에 즐기던 음식이라고 종부가 설명했다. 큼직한 건빵 같은 모양새다.
제주는 다른 대부분의 종가와는 달리, 아직까지 집에서 직접 담가 사용한다. 제사 한달 전에 찹쌀과 누룩을 담그는데, 그 맛이 일품이어서 모두가 맛보고 싶어한다. 타지의 친척들 사이에 충효당에 가면 제주를 반드시 맛보라고 말할 정도라고 한다.
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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