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육개장 <상>-개장·육개장·장국밥의 차이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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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11-25   |  발행일 2011-11-25 제36면   |  수정 2011-11-25
육당 최남선‘조선상식’서 “대구는 육개장의 본고장”…金 시장도 지시했다는데…'육개장 도시'로 과연 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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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따로국밥 1번지인 ‘국일식당’ 부엌을 지키고 있는 가마솥. 숭숭 썬 대파가 먹음직스럽게 끓고 있다.

김범일 대구시장이 최근 대구를 ‘육개장의 도시’로 만들어 보라고 관계부서에 지시했다.

대구를 대표하는 10가지 음식인 ‘대구십미’ 중 동인동찜갈비와 막·곱창은 ‘1박2일’과 ‘KBS 다큐멘터리 3일’ 등에 힘입어 전국적 인지도와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보고 이제부터 따로국밥의 도시인 대구를 육개장의 메카로 각인시키기 위한 마케팅에 주력할 뜻을 피력한 것이다.

그 일환으로 지난 11일 대구시 보건위생과 식품위생 담당계에서 관계 전문가를 불러 육개장 관련 간담회를 가졌다. 대구가 과연 육개장의 메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식품사학적 근거와 타당성 등에 대해 폭넓은 의사를 개진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린 아직 따로국밥과 육개장의 복잡다단한 함수관계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육개장·따로국밥·장국밥·선지해장국·쇠고기국의 차이점은 뭘까.

식품사학자들도 육개장을 단순히 쇠고기국 정도로 이해할 뿐 그게 어떤 절차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전국적으로 얼마나 다양한 육개장이 존재하는 지도 감을 못잡는 게 현실이다. 분명한 건 1929년 종합잡지 ‘별건곤’은 물론 육당 최남선이 지은 ‘조선상식문답’ 등에서도 ‘대구가 육개장의 본고장’이란 걸 알려줬다는 것이다. 현재 국일식당·옛집·벙글벙글·온천골·대덕식당·진골목식당 등에서 다양한 육개장 버전을 갖고 있는 곳이 대구다. 전국 어느 곳에서도 이런 걸 찾아 볼 수 없다. 대구가 육개장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이참에 대구를 따로국밥의 도시에서 육개장 메카로 키울 수도 있다. 이제부터 한국 육개장의 유래와 그게 대구에서 따로국밥으로 자리잡은 과정을 2회에 걸쳐 해부해 본다.

◆ 국과 밥이 한 세트로 붙어 다녔던 장국밥

예전 사람들은 고기 육수가 많이 가미된 국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채소가 들어간 ‘갱(羹)’, 곰탕 같이 채소가 안 들어간 ‘확’, 그리고 약 성분이 강한 ‘탕(湯)’으로 분류했다.

육개장은 갱의 한 종류. 물론 쇠고기가 주재료다. 쇠고기를 갖고 만드는 국물 많은 요리는 크게 설렁탕, 갈비탕, 곰탕, 주막과 장터에서 유행한 장국밥 등이 있다.

장국밥에는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는다. 우거지 혹은 시래기국 같다. 일명 ‘장국(된장을 베이스로 한 맑은 국의 통칭)’이라고 불리는데 이게 조선 때 가장 보편적인 국이었다. 쌀뜨물을 베이스로 해서 들깻가루와 토장 정도만 풀어서 만든다.

한말 장국밥 문화가 경기도 파주 공릉장국밥에도 남아 있다.

밥 위에 나물과 선지 등을 얹고 뜨거운 사골국물을 부어 먹는 것이다. 삶은 내장과 선지, 데쳐서 양념한 무, 콩나물, 시금치, 숙주나물, 고사리 등의 나물류와 지진 두부, 북어찜을 밥 위에 고명으로 얹는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파주로 몰려 든 개성과 오산 등 전국 각지 상인들이 즐긴 장터국밥이다.

충남 공주의 장국밥을 보자. 쇠고기와 무를 넣고 끓인 육수에 건져 썰어서 양념한 고기와 무를 넣고 끓이다가 그릇에 밥을 담고 국물을 부은 뒤 시금치, 고사리, 도라지를 올리고 어슷하게 썬 대파, 황백지단과 실고추를 얹는다. 꼭 삼색나물을 축으로 한 안동 헛제사밥을 연상시킨다. 사극에 등장하는 나그네들이 주막의 주모에게 ‘국밥 한 그릇 끓여주라’고 했을 때의 그 국밥은 육개장 스타일이 아니다. 장국밥 스타일이다. 이때 주모들이 돼지국밥처럼 찬밥을 뜨거운 국물로 여러 번 데우게 되는데 이걸 ‘토렴’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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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일 대구시장이 최근 시청 지하 구내식당에서 대구 따로국밥을 맛있게 먹고 있다.

국에 밥을 만 형태를 예전에는 ‘탕반(湯飯)’이라고 했다.

장국밥, 돼지국밥, 설렁탕 등이 모두 탕반에 속한다. 조선조 양반들은 절대 국에 밥을 말아 먹지 않았다. 천민들이 국밥을 즐긴다고 봤다. 양반은 밥을 한 술 떠먹은 뒤 국을 떠먹었다. 그들은 이미 따로국밥 문화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막과 장터에서는 그럴 처지가 못 된다. 국그릇과 밥그릇을 따로 움직이려면 여간 번거러운 게 아니었다. 요즘처럼 테이블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대충 한 끼 요기하는 스타일이었다. 손님이 올 때마다 밥을 할 수가 없었다. 전기밥통도 없었다. 그러니 새벽에 가마솥으로 푸짐하게 밥을 해놓아 오후까지 사용해야 된다. 특히 한말까지만 해도 꽁보리밥이 대세. 국과 밥을 따로 먹는 것보다 국밥 형태가 훨씬 편리하고 식감도 좋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길거리에서는 국과 밥이 항상 붙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서울 해장국에서는 국과 밥이 떨어진다. 수준이 높아진 것이다. 서울 종로 피맛골은 한국 장국밥을 해장국으로 정착하게 만든 촉매 공간. 예전 서울의 양반들은 남한산성 갱촌(羹村)에서 만든 해장국을 주문해 먹기도 했지만 주문할 처지가 못 되는 양반들은 어쩔 수 없이 여기서 한 끼를 해결했다. 그런 영향인지 청진옥은 국과 밥이 따로 나온다.

서울의 경우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간 매운 육개장 문화는 60년대까지만 해도 등장하지 않았다. 개성음식의 영향 때문이다. 서울 가정식 쇠고기국에도 고춧가루가 안 들어간다. 서울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해장국은 설렁탕이었다. 물론 피맛골 해장국도 두터운 단골층을 유지한다. 청진옥 해장국의 레시피를 보자. 사골 등 온갖 잡뼈와 소양을 갖고 육수를 만든다. 거기에 콩나물, 우거지, 선지와 소양을 넣고 간은 된장으로 맞춘다.

종로3가 낙원상가 옆 뒷골목에 가면 소문난추어탕집이 나온다. 51년 피란온 시어머니가 차린 가계를 며느리인 권영희씨(65)가 이어받았다. 여기는 얼큰하게 먹을 사람을 위해 밥그릇에 고춧가루를 마련해둔다. 밥은 따로 나온다. 어떤 이들은 이런 우거지 해장국 스타일을 육개장으로 잘못 알기도 한다. 이 스타일은 조선조 서민들의 패스트푸드였던 장국밥의 퓨전 스타일이다. 이런 버전이 나중에 호텔 한식당에까지 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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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3가 낙원상가 옆 ‘소문난 추어탕’ 집의 얼큰한 우거지 해장국.

◆ 육개장의 선조격인 개장

육개장이 어떻게 대구에서 따로국밥으로 변형돼 오늘에 이르렀는 지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대한민국 육식의 역사를 더듬어 봐야 한다.

대한민국은 원래 채식국가였다. 한국의 육식은 13세기 고려를 침공한 몽골의 육식문화에서 비롯된다. 물론 소, 돼지, 닭, 염소, 꿩 등 가축이 있었지만 매일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일상은 채식이었다. 조선 시대 때는 소를 엄격하게 관리하기 위해 도살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툭 하면 조정에서 소 도살금지령이 내려진다. 일본도 메이지유신 전까지는 육식이 금지됐다.

우린 쉽게 쇠고기라고 하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서민에게 쇠고기는 ‘불가능의 식재료’였다. 60년대초 일부 언론에서는 ‘청와대 된장국에는 쇠고기가 들어있겠지’라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쇠고기는 귀하고도 귀했다. 평생 쇠고기국 한번 못 먹고 죽는 서민들도 있었다. 소는 ‘농우(農牛)’로 농사 짓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함부로 잡아먹을 수 없었다. 고작 제사·잔치 때 정도만 구경할 수 있었다.

60년대로 접어들면서 농촌과 달리 도시에서는 쇠고기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곳곳에 정육점이 있어서 형편이 되는 주부들이 간단하게 쇠고기국을 끓여먹을 수 있었다. 결혼식 때 쇠고기를 부조금 대신으로 내기도 했다. 이미 60년대초부터 불고기와 쇠갈비 붐이 대구 중구 계산동의 땅집, 대신동의 진갈비 등에서 벌어졌다.

대한민국에서 소가 구이용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한 건 70년 새마을운동 일환으로 경운기가 등장하면서부터. 푸짐하게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 건 80년대 컬러TV가 보급되면서 부터. 88년 서울올림픽 직후부터 전국에 걸쳐 쇠고기 로스구이 문화가 대중화된다.

육개장은 개장(狗醬)에서 비롯됐다.

오랫동안 선조들은 삼복 때 보양식으로 개장, 즉 보신탕을 즐겼다. 육개장보다 개장의 역사가 더 오래됐다. 북한과 중국 조선족은 보신탕을 ‘단고기’로 부른다. 그들이 손님에게 가장 많이 접대하는 게 바로 보신탕이다. 한민족의 숨결이 살아 있는 탕이 바로 개장이다. 삼국시대 유적지에서 개뼈가 발견될 정도로 우리민족의 개장 사랑은 각별했다.

특히 경상도가 개장을 유별나게 좋아했다. 30년전 안동의 의성김씨 한 파종손의 환갑잔치 때조차 소 대신 개를 잡아 개장국을 끓였먹었을 정도다. 개장 철에는 당연히 개가 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을 어른들이 병들거나 나이 든 소를 공동 도축해 국을 끓였는데 이게 육개장이다. 육개장은 개를 대신한 쇠고기국이란 뜻으로 일명 ‘대구탕(代狗湯)’. 닭을 대신 사용했다면 ‘닭개장’이 된다.

매웠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고춧가루가 문헌에 등장한 게 1601년, 그 전에는 추어탕처럼 산초·초피가루 정도를 넣고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매운 스타일의 육개장은 대구에서 생겨난다.


이춘호기자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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