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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역에서 진해역 방향을 본다. 열차는 2009년부터 진해군항제 행사 기간에만 선다. |
플랫폼. 지구에 딱 붙어 부동인 이 긴 사각의 판은 헤어짐이 일반화된 장소다. 플랫폼에선 늘 서성였다. 어떤 굽어진 길을 달렸든, 어떤 굽어진 길로 향하든, 기차는 직선으로 왔고 직선으로 떠났다. 천천히, 단호하게. 기차가 서지 않는 플랫폼은, 그럼 무엇일까.
◆진해 경화역의 가을 플랫폼
이 기차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 역사도 없다. 단지 플랫폼만이 누워 있다. 역이라는 장소의 영향력이 닿는 공간은 800m 남짓. 그 공간의 가장자리에는 멋진 벚나무들이 녹색의 음영을 드리우며 서있고, 선로의 파석 속에서 코스모스가 피어올랐다. 진해의 경화역은 1926년 11월1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2000년 수요와 관리 문제로 역사가 철거되었고, 2006년 업무를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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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역에서 창원방향을 본다. 봄이면 경화역을 중심으로 경화 1건널목에서 세화여고 사이 800m 에 걸쳐 벚꽃 터널이 장관을 이룬다. |
봄날의 진해가 벚꽃으로 뒤덮이면 기차는 잠시 이 역에 선다. 기차가 대기를 흔들고, 꽃잎이 날리면, 기차는 잠시 서서 그 모습을 본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기 위해 경화역으로 간다. 역과 기차와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 꽃 피는 시간이다. 그 시간동안 경화역은 가장 아름다운 역이 된다. 그리고 떠난다. 꽃 지는 시간, 플랫폼만이 남는다.
역은 여름 내 뜨겁게 푸르다. 꽃 진 자리마다 버찌가 주렁주렁 달렸을 테고, 푸른 이파리들이 태양과 맞서 내달렸을 것이다. 지금은 코스모스의 시간, 잎들이 숨어서 빛깔을 바꾸는 시간이다. 플랫폼의 맞은편은 긴 산책로가 되어 있다. 나무그늘 아래 정물이 된 사람들이 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달리기를 한다. 레일의 직선 궤도와 나란히, 마치 기차를 쫓듯 달린다. 보이지 않는 기차는 종착역인 진해역으로 가고 아이들은 경화역을 달린다. 그리고 코스모스 향기를 맡는다. 나는 플랫폼에서 플랫폼처럼 본다. 정지해 있는 것들만이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플랫폼은 경화역보다 오래, 빠르게 변화하는 시간을 쌓고 있다.
◆진해 중원로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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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좌천의 벚나무 터널과 산책로. 가운데 로망스 다리가 보인다. |
경화역 다음은 진해역, 종착역이다. 해군사령부내에 통해역이 있지만 민간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진해역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해군부대 입구와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는 북원 로터리다. 로터리 가기 전 우회전해 들어가면 유명한 로망스 다리가 있는 여좌천 벚꽃길이다. 여좌천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일본식 도시 하천으로, 길옆의 주택가는 관사라 불렸다. 고동색 나무 데크로 만들어진 천변의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걸음을 멈추고 싶지 않은 길이다. 물길과 사람 길 모두가 벚나무의 양팔에 싸여 부르르 떨리게 아름답다.
여좌천은 철도가 지나가는 곳에서 복개되어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 바다로 흐른다는데, 해군사관학교 부근이라 한다. 진해역에서 정면으로 직진을 하든, 북원 로터리나 여좌천 들입구에서 비스듬히 직진하든, 길은 중원 로터리에서 합해진다.
100년 전, 이 일대는 평야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는 거대한 팽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전해진다. 1909년 일본은 팽나무를 중심으로 여덟 갈래의 길을 내고 도시를 만들었다. 팽나무가 있던 자리가 바로 중원 로터리다. 나무는 1960년 제 수령을 다했다. 지금 중원 로터리는 둥근 잔디밭으로 열려있고 이곳을 중심으로 진해군항제가 열린다.
군항제는 1952년에 처음 열렸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북원 로터리에 세우고 추모제를 거행한 것이 군항제의 시초였다. 그때 벚꽃은 군항제의 주요 인사가 아니었다. 일본이 도시를 만들면서 곳곳에 심었던 벚나무는 해방 이후 뽑히고 잘리고 땔감이 되었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서 진해의 벚꽃이 제주도의 왕벚나무로 밝혀진다. 진해에는 다시 벚나무가 심어졌다. 이제 진해에서는 산, 길, 공원 할 것 없이 어디서나 벚나무를 만난다. 무려 35만 그루의 벚나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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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291호인 진해우체국. 1912년 준공되어 2000년까지 우체국 청사로 사용해왔다(왼쪽).1955년부터 여덟 갈래 길 중 한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화 공간 흑백다방. |
여덟 개의 갈래 길 속에는 일본식 건물들이 꽤 많이 남아 있다. 그것들은 주택가의 넓은 도로와 인도가 따로 있는 모습과 합해져 일본의 소읍을 연상시킨다. 꽃이 피면 더욱 짙어질 것이다. 빨래방이나 ‘군복수선’ 간판이 많이 보이는 모습도 재미있다. 식당마다 자리를 차지한 군복 입은 사내들의 모습에서 군항도시 진해를 가깝고 직접적으로 본다. 나지막한 건물의 도열 속에 자리한 은행들, 문화원, 우체국이 이 거리가 진해의 중심부였음을 시사한다.
로터리 동쪽에 서있는 진해 우체국은 1912년에 세워진 러시아풍의 건물로 2000년까지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물에 싸여 보수 중인 문화재다. 얼핏 올려다보면 다락방이 있을 것 같은 높이지만 단층 건물이다. 목조 건물이지만 사람의 숨결을 오래 받아선지 지금까지 말끔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우체국 옆길은 여덟 갈래 중 정동쪽 길이다. 이 길은 곧장 제황산 진해탑으로 오른다. 모노레일을 탈 수도 있고 365개 계단을 걸어서 오를 수도 있다. “공무원들은 공휴일 다음 날이 쉬는 날이라요.” 이런 얄궂은 날만 아니면 탑에 올라 진해의 360도를 관망할 수 있다. 나는 탑에 오를 수 없었지만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면서 점점 동그랗게 펼쳐지는 중원 로터리와 바다와 민간인 출입 금지인 군사 영역을 슬쩍 볼 수 있었다. 진해, 지금은 진해구라 불리는 창원의 한 조각이지만, 아직 진해시 지도를 가진 내게 진해는 하나의 도시로 각인되어 있다. ‘진해구’라는 호명이 어색해지지 않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할까.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갈 것이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찾아가는 길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창원방향으로 간다. 칠원 톨게이트 지나 내서분기점에서 부산, 서마산 방향으로 간 후 서마산 IC로 나간다. 진해, 시청 방면으로 달리다 장복 터널을 지나 첫 번째 우회전 길로 나가면 여좌천변을 따라 진해역, 중원로터리까지 간다. 우회전하지 않고 계속 직진하면 경화역에 바로 닿고, 중원 로터리에서는 시청방면으로 가다 경화역 이정표를 따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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