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對 신작] 위험한 관계·루퍼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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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10-12   |  발행일 2012-10-12 제40면   |  수정 2012-10-12
[신작 對 신작] 위험한 관계·루퍼

◆ 위험한 관계 : 치명적인 러브스토리에 절제된 멜로적 감성 ‘덧칠’

18세기 연애심리의 교본으로 평가 받고 있는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1782년 작 ‘위험한 관계’는 쾌락에 빠진 발몽 자작과 메르퇴이유 후작 부인 간의 은밀한 거래를 담아낸 소설이다. 1959년 로제 바딤 감독에 의해 처음 영화화된 이후 국내외 유명감독들(국내에선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 의해 여러 차례 영화화됐을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허진호 감독이 리메이크 작이라는 부담감을 감수하며 ‘위험한 관계’의 연출을 맡기로 한 건 그 역시 뿌리칠 수 없는 원작의 매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관건은 원작과의 차별성. 관객들이 흥미롭게 느끼는 부분도 파격적인 원작에 허진호 감독 특유의 멜로적 감수성이 더해지면 과연 어떤 결과물이 만들어질까다. 중국자본으로 기획과 제작이 이뤄진 이 영화의 특성상 프랑스 혁명 전의 문란하고 퇴폐적인 상류사회를 담은 원작의 무대는 1930년대 화려했던 상하이로 옮겨졌다.

사치와 쾌락에 사로잡힌 일제 점령기 상하이. 모든 여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지만, 사랑을 믿지 않는 상하이 최고의 플레이보이 셰이판(장동건)은 단 한 사람, 모지에위(장백지)만을 오래 전부터 흠모해 왔다. 모지에위는 지성과 미모, 재력을 모두 겸비한 실력자로 모든 남성을 손에 쥐고 흔드는 상하이 사교계의 여왕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셰이판에게 은밀한 게임을 제안한다. 자선사업에만 전념해온 정숙한 미망인 뚜펀위(장쯔이)의 마음을 훔쳐낸다면 셰이판이 그토록 원하던 자신의 몸을 허락하겠다는 것. ‘여자라면 결국 내게 넘어오게 돼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는 셰이판이지만, 그의 여성 편력을 익히 알고 있는 뚜펀위는 “전 소문을 믿지 않지만 제 눈으로 본 건 믿죠”라며 그를 극도로 경계한다. 하지만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부드럽게 다가오는 셰이판에게 뚜펀위는 차츰 마음의 문을 열어간다.

‘위험한 관계’는 1930년대 화려하면서도 퇴폐적이었던 상하이 사교계를 배경으로 사랑에 대한 진심을 상실해 가는 인물들의 성적 욕망과 질투, 복수에 대한 섬세한 심리묘사를 담고 있다. 셰이판과 모지에위는 관능적인 거래로 서로를 시험하고, 그런 그들이 쳐놓은 덫에 뛰어든 뚜펀위는 사랑의 순수성을 의심하게 된다. 그렇게 게임을 시작한 세 남녀가 정말 사랑일지도 모를 감정을 느끼며 혼란에 빠지게 되는 과정은 그런 점에서 치명적이지만 흥미롭다.

이는 분명 기존의 ‘허진호식 멜로’와도 차별된다. 허진호 감독은 원작의 강렬하면서도 치명적 스토리 위에 특유의 절제된 멜로 감성을 덧입혔다. 멜로적인 감성이 많이 삽입되면서 셰이판과 모지에위의 관계는 좀 더 멜로적으로 변화했고, 욕망과 쾌락으로 물들어 있는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와 감정의 파고는 한층 강렬하고 다이내믹하게 담겨졌다. 인물의 심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클로즈업과 과감하고 역동적인 핸드헬드 카메라 기법은 이 과정에서 주효하게 작용했다.

철저한 고증과 치밀한 프리 프로덕션으로 완성된 비주얼도 이야기 못지 않게 영화적 재미를 더한다. 서구의 새로운 문화와 동양의 전통을 혼합한 독특한 양식의 소비 행태를 보였던 상하이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한 만큼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공간들은 대부분 상류층 대저택이다. 특히 영화의 주 무대가 되고 있는 루이쉐 저택은 2천만위안(한화 35억원)을 들여 지어졌다. 말이 세트지 콘크리트 외관과 실내 인테리어, 정원, 실내 수영장 등 실제 대저택을 능가할 정도로 완벽한 건축물로 재연됐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위험한 관계’에 모아지는 초점은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남녀배우들이 등장한다는 점일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미남배우 장동건은 옴므파탈 셰이판 역을 소화해내며 나쁜 남자의 치명적인 향기를 유감없이 발산했다. 뚜펀위 역의 장쯔이 역시 이번 영화를 통해 데뷔 초기작인 ‘책상 서랍 속의 동화’에서와 같은 순수한 이미지로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방점은 팜므파탈 모지에위 역의 장백지다. 이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성적 욕망과 질투, 복수에 대한 모든 기운과 감정을 모지에위 캐릭터는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고 장백지는 그녀를 통해 농염하고 관능적인 매력을 한껏 드러냈다. 허진호 감독의 3년 만의 신작 ‘위험한 관계’는 이처럼 색다른 화법과 형식미로 관객에게 다가왔다.


[신작 對 신작] 위험한 관계·루퍼

◆ 루퍼 : 스토리 돋보이는‘현재의 나’-‘미래의 나’ 시간전쟁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것이 가능해진 2074년. 하지만 시간여행은 법으로 금지돼 있고, 범죄 조직 사이에서만 암암리에 사용될 뿐이다. 캔자스 시티에 사는 조(조셉 고든 레빗)는 그런 범죄 조직에 고용돼 그들이 정해준 시간과 장소에 맞춰 제거 대상을 암살하는 일을 맡고 있는 통칭 루퍼다. 미래에선 할 수 없는 요인 제거와 시체 처리를 담당해야 하는 만큼 조직에게 루퍼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 루퍼들은 그 대가로 안락한 미래를 보장받는다. 단 쓸모가 없어져 조직으로부터 계약 해지 통보를 받기 전까지다.

‘루퍼’는 ‘어떠한 타깃이든 즉각 사살해야 한다’는 룰을 지키지 못한 조의 행보를 숨가쁘게 따라간다. 그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아내를 되살리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온 30년 후의 자신(브루스 윌리스)과 마주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때문에 최고의 킬러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미래의 자신을 죽여야하는 현재의 조와 미래세계를 장악한 레인메이커를 미리 제거해 자신의 운명을 바꿔버리려는 미래의 조 간의 미묘한 감정과 아이러니함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루퍼’는 그 과정에서 새로운 국면을 거듭 야기시키며 관객으로 하여금 호기심과 함께 그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켜 나간다. 자칫 복잡할 수 있는 설정을 설명적이지 않게 깔끔하고 단순하게 처리해나가는 연출도 꽤나 효과적이다.

‘브릭’(2005)을 통해 개성넘치는 작품세계를 열었던 라이언 존슨 감독은 시간여행이라는 SF적 장르를 소재로 가까운 미래지만 무조건적인 화려함과 세련된 모습이 아닌, 실제로 몇 년 뒤 존재할 것만 같은 세기말의 우울한 미래상에 천착했다. 이는 인간의 자기 파멸이라는 인식에 기초해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해 경고한 ‘블레이드 러너’(1993)나 인간의 폭력성과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담아낸 ‘12몽키즈’(1995) 등과 견줄 만한 철학적인 SF 액션물로서의 그것이다. 이 영화의 미덕 역시 시간여행을 소재로 삼은 영화들의 흔적들을 굳이 숨기지 않고 익숙한 모습들로 재해석해 냈다는 점이다. 라이언 존슨 감독은 이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동일 인물이 한 공간에서 만나는 기발하고 참신한 설정으로 승화시켰다. 달리 말해 ‘루퍼’는 규모의 미학을 앞세운 볼거리 위주의 SF물이 아닌, 새롭고 신선한 이야기를 창조하는 데 더 공을 들인 영리한 작품이라는 얘기다.

물론 ‘루퍼’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스타일리시한 비주얼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방점은 현실과 SF가 매끄럽게 엮이는 미래의 모습이다. 특히 기술보다는 사회, 정치적 변화로 인한 미래를 보여주고자 했던 라이언 존슨 감독은 수많은 후반작업을 통해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실제 촬영현장에서 느껴지고 보여지는 모든 것을 담아냈다.

여기에 힘을 보탠 건 조 역을 맡은 조셉 고든 레빗이다. “브루스 윌리스를 흉내낸다기보단 어릴 적 브루스 윌리스의 느낌을 주는 연기를 요구했고, 결국 조셉은 목소리도 그렇고 그의 사소한 버릇까지 완벽하게 묘사했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그는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 숙명을 지닌 킬러의 모습으로 영화 팬들을 또 한번 유혹한다.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 혼을 발휘한 브루스 윌리스 역시 최근작 중 그의 인상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루퍼’는 지난 37회 토론토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소개됐다. 이는 매회 자국 영화 또는 다큐멘터리를 개막작으로 선정해왔던 토론토국제영화제의 혁신적인 변화의 첫걸음으로도 읽혀진다. 그만큼 상업과 예술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영화임을 입증한 셈이다. 화려한 비주얼과 오락적인 요소만 가지고 있는 SF액션을 뛰어 넘어 촘촘히 짜여진 스토리라인까지 갖춘 ‘루퍼’는 장르 팬을 넘어 모두가 만족할 만한 영리한 SF액션스릴러다. 세련되고 깔끔한 결말도 인상적이다.

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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