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45)는 오토바이를 타고 각종 물건을 신속하게 전달하는 퀵서비스 배달원이었다. 그리고 아내와 대학생 아들을 둔 평범한 가장이기도 했다. 셋방살이였지만 가족은 A씨가 벌어오는 돈으로 어렵사리 생활을 이어갔다.
A씨는 우연히 대구시내 한 백화점에 물건을 배달하러 갔다가 독특한 상황을 경험했다. 두꺼운 배달복을 입고 헬멧을 쓴 채 매장을 돌아다녀도 매장 직원은 A씨에 대해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던 것. 값비싼 의류 등이 상자째 쌓여있는 직원 전용 출입공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A씨는 배달 때문에 헬멧을 쓰고 있어 CC(폐쇄회로)TV 감시망도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범죄에 안성맞춤인 경우가 또 있을까. 결국 A씨는 절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는 지난해 11월1일, B백화점 5층 직원전용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헬멧을 쓰긴 했지만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긴 힘들었다. A씨는 운동화가 담겨 있던 상자 한 귀퉁이를 오토바이 열쇠를 이용해 찢고, 운동화 1켤레(시가 8만9천원 상당)를 빼냈다.
일단 물건만 확보하면 갖고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매장 직원이 퀵서비스 배달원과 물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 절도에 성공한 A씨는 이후 값비싼 등산용품을 절도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직원의 왕래가 잦아 어수선한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 사이를 범행 시간으로 삼아 한 벌에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유명 브랜드의 등산의류와 신발, 가방 등을 훔쳐냈다.
장물 처리도 문제 없었다. A씨는 훔친 등산용품을 등산객에게 팔기로 작정하고 팔공산과 앞산 등을 찾았다. 이곳에서 그가 판 훔친 물건의 값은 시중의 30%선. 그는 올해 9월11일까지 27차례에 걸쳐 등산의류 등 무려 194점(시가 2천960만원 상당)을 빼돌렸고, 이 중 100여점을 등산객에게 팔았다.
한편, 사건 해결에 난항을 겪던 경찰은 지난 9월초 범인의 모습을 확보하기 위해 해당 백화점에 CCTV를 추가로 설치했다. 감시카메라 위치를 미리 알고 등진 채 물건을 훔치던 그를 붙잡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10여일 후, 헬멧을 벗은 채 범행을 저지르던 A씨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고, 결국 경찰에 꼬리를 붙잡혔다.
경찰조사 결과, 그는 올 2월 퀵서비스 일을 그만둔 후에도 범죄를 일삼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가족에게는 퀵서비스 일을 계속하는 것처럼 속이고 7개월여간 배달복을 입고 헬멧을 쓴 채 백화점으로 출근한 셈이다.
대구 중부경찰서는 1일 A씨를 절도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은 “A씨가 붙잡힐 당시 아내와 아들에게 상당히 미안해했다. 가장으로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백경열기자 bk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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