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에는 십자가, 한 손에는 태극기… 민족교회 터를 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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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지 100년이 넘는 영천 자천교회. 1903년 권헌중 장로가 설립한 한옥구조의 교회로, 건축양식이 독특하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1
초가삼간으로 복음운동 시작
높은 고갯마루 턱에 올라선다. 노귀재다. 권헌중은 식솔을 챙기며 근처의 샘물부터 찾는다. 물이 달고 시원하다. 땀을 훔치며 지나온 청송 쪽을 바라보고, 반대편인 영천 쪽도 내려다본다. 첩첩 산들이 살아온 삶의 굴곡 같고, 앞으로 헤쳐 나갈 장애들처럼 만만치 않게 가로놓여 있다.
문득 사람들이 영천 쪽에서 올라오는 게 보인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들을 살핀다. 언제부턴가 버릇이 되다시피 한 조심성.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지금 감시를 받는 몸이다. 원래 경주에서 살았다. 서당 훈장이었다. 후학을 기르는 게 큰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년(1895년) 이후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그도 분연히 가담하여 싸웠다. 이 때문에 일제의 감시를 받는 이른바 요시찰 인물이 됐다. 감시를 피해 이리저리 떠돌았다. 안강을 거쳐 청송의 한 산골에 은거했다. 그러다 대구로 이주하기 위해 식솔을 거느리고 떠나는 길에 노귀재에 이른 것이다.
이윽고 사람들이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권헌중은 눈을 크게 뜬다. 그중 한 사람이 서양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권헌중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다. 얼굴에는 미소가 감돈다. 서양 사람을 가까이에서는 처음 보는지라 유심히 살핀다. 그가 다가와 인사를 한다. 권헌중도 고개를 숙인다.
“저는 안의와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서양인이 우리말을 하는 게 신기하고도 반갑다.
“아, 네. 권헌중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름이 서양이름이 아니군요.”
“원래 이름은 아담스(Adams)입니다. 안의와는 한국이름입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저는 선교사입니다. 청송과 안동 등지를 돌며 선교를 하기 위해 전도 여행 중이지요.”
“아, 야소교인이군요.”
둘은 이내 친한 사람처럼 마주 앉아 얘기를 주고받는다. 서로 경계할 일이 없어 마음을 놓는다. 안의와는 대구선교지부를 개척한 배위량(Willam. M. Baird) 선교사의 후임으로 한국에 왔다. 배위량의 처남이기도 하다. 지난해인 1897년 대구에 온 그는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한 다음 시간을 내어 내륙지방 선교를 위해 영천을 지나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안의와는 권헌중을 유심히 본다. 비범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지식인의 한 전형으로 학식이 높고, 비교적 열린 사고를 하는 이로 보인다. 그는 선교를 위한 자료를 내놓으며 권헌중에게 설명을 한다. 권헌중은 큰 관심을 보인다. 어느덧 안의와는 권헌중과의 만남을 하나님의 역사로 받아들이며 감격스러워한다. 첫 전도 여행이 비로소 기적적으로 한 결실을 보게 됨을 느낀다.
권헌중은 새롭게 거듭나는 느낌을 받는다. 대구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산을 내려가면 바로 정착하여 해야 할 일을 예감한다. 안의와와 함께 고개를 내려와 자천 마을을 둘러본 그는 그곳에 터를 잡기로 한다. 자천은 예로부터 영천에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로 꼽혀왔다. 집부터 구한다. 초가삼간 한 채를 산다. 낮에는 학동들을 모아 한문을 가르치고, 밤에는 안의와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면서 때를 기다린다.
유교적 가치관에 얽매인 세상이라 터놓고 종교활동을 할 수 없다. 시골 사람들도 이들의 낌새를 알아채고는 아주 마땅찮게 생각하는 듯하다. 권헌중이 교회를 지으려고 마을 사람들의 의중을 떠보자 마을 사람들은 발끈한다.
“우리 마을에 야소교가 웬 말이오. 절대 불가하오.”
이에 권헌중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제안을 한다. “이 마을이 큰 데다 나날이 번성하여 주재소와 면사무소가 들어설 만큼 되었는데도 번듯한 건물 하나 없소. 마을의 발전을 위해 내가 주재소와 면사무소 건물을 지어줄 터이니 교회도 짓게 해 주시오.”
몇 번이나 설득한 끝에 겨우 마을 사람들의 허락을 받는다. 초가집 한 채를 구입, 서당을 겸한 교회로 첫발을 내디딘다. 1898년, 자천교회의 첫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신도들이라고는 자신이 데려온 노비와 머슴, 그리고 서당공부를 하던 학동들이 전부다. 그는 노비들의 문서를 태워버리고 자유의 몸으로 풀어준다. 교회 활동이 활기를 띠면서 교인이 늘어난다. 안의와는 권헌중의 열정에 감동하여 자주 교회를 방문, 성경 토론을 벌이면서 교세를 넓혀간다. 그리하여 1904년 권헌중은 자신의 사재를 들여 16칸의 목조 와가로 ‘예배당’을 짓는다. 전국에서 유일한 일(一)자형 한옥 교회다.
#2
민족교회의 상징인 한옥교회
암울한 시기였다. 일제 강점의 그 엄혹한 시기를 권헌중은 교회 일을 하면서 버텨 나갔다. 그가 교회를 짓게 된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의병에 참가하는 등 누구보다도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다. 신앙을 발판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교육을 펼칠 구상을 했던 것이다.
차차 구체적인 사업을 펼쳐나갔다. 교회 안에 2년제 소학교를 설립했다. 신성학교라 했다. 서당 외에는 공교육 기관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권헌중은 이 학교에서 아이들 교육은 물론, 문맹 퇴치와 주민 계몽 사업을 펼치고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여러 가지 활동을 병행했다. 학교운영은 사재를 팔아 충당했다. 신성학교는 곧 영천 인근 지역에서 유명해졌다.
어느 날 밤, 누가 담을 넘어왔다. 권헌중에게 독립군 자금을 호소하러 온 것이다. 권헌중은 기꺼이 그를 맞아 독립군과 선을 연결, 군자금을 내놓았다. 그에게 있어 교회는 신앙으로서도 중요한 곳이었지만, 민족의 해방 운동을 위한 거점으로서도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한 손에는 십자가, 한 손에는 태극기’라는 민족 신앙의 한 표본으로 그는 종교 활동을 기꺼이 수용했던 것이다.
교회 안은 일요일이면 많은 신도가 모여들어 열정적으로 복음을 나누었다. 당시는 남녀구별이 뚜렷해서 교회 안에서도 남녀를 구분하여 따로 앉아서 예배를 보도록 했다. 교회의 중간에 벽을 만들어 구분지었다. 또한 당시에는 반상의 구별도 뚜렷했다. 양반은 상놈과 한자리에서 예배를 보는 것을 꺼려하기도 했다. 그것이 권헌중에게는 못마땅했다.
“하나님의 나라에 양반과 상놈의 구별은 없습니다.”
그는 자주 신도들에게 반상의 철폐를 주장했다. 애초 예배당이 지어졌을 때 그 교회를 채운 게 머슴과 노비들이었던 것을 그는 늘 고마워했다. 이런 그의 생각이 먹혀들었는지 교회에는 ‘상놈’ 신자가 늘어났다. 어느 날은 거리에서 갓을 팔며 살아온 한 앉은뱅이가 찾아왔다.
“저같이 천한 놈도 신도가 될 수 있는지요?”
“물론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천하고 귀한 사람의 구별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는 평등합니다.”
그는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면서 교회 일에도 솔선수범했다. 어느 날 권헌중은 교회 신도가 모인 자리에서 그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우리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사람들은 놀랐다. 양반과 선비들이 주도하던 교회에 천한 상놈이 지도자 반열에 오르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상것들을 하나님의 자식으로 섬기는 그의 태도는 참으로 놀라웠지만, 이를 통해 반상의 구별을 철폐해 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성심과 더불어 계몽과 교육사업, 그리고 종교 활동으로 당시의 여러 문화적인 충돌을 완화하고 절충해 나갔다.
자천교회는 점점 더 번창해갔다. 그리하여 권헌중은 1922년 2월26일 자천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권헌중은 이를 발판으로 헌신과 나눔의 활동 폭을 넓혀갔다. 그의 활동은 자천교회를 넘어 경북노회에 이르기까지 뻗쳤다. 그는 언변이 뛰어나 설교가 아주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 언변으로 신앙을 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시키면서, 아울러 교육 사업으로 민족의 밝은 미래를 여는 토대를 마련하려 애썼다.
때로 일제의 핍박이 교회에도 닥쳤다.
“권 장로, 교회도 우리 천황의 보살핌 아래 있는 것이오. 그러니 예배 시작 전에 천황폐하를 숭배하는 의식을 먼저 치르시오.”
그러나 권 장로는 종교의 자율성을 들어 이를 듣지 않았다. 어떤 유혹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온몸으로 교회의 위상을 지켜냈다. 그렇게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한 한 알의 밀알로 자신을 내놓았으며, 민족교회의 터전을 닦기 위해 헌신했던 권헌중은 1925년 열정적인 삶을 마감, 하나님의 부름에 응했다.
그가 개척했던 자천교회는 그 후 주변의 한옥과 고가를 기증한 후손과 신도들 덕분에 새롭게 정비되어 가장 한국적인 교회로서의 위상이 세워졌다. 광복이 되고 6·25 때에는 미군 비행기들의 폭격을 막기 위해 신도들이 지붕에 올라가 횟가루로 ‘CHUECH’라고 영어로 표시하여 폭격을 막기도 했다. 그렇게 지켜진 자천교회는 2004년 경북도 지방문화재 제452호로 지정됐다.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지만, 아주 소박하면서도 한국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유명해져서 요즘은 연간 1만여명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글=이하석(시인·영남일보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 도움말=영천문화원
공동 기획 : 영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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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천교회는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보도록 신자석 가운데 칸막이가 있다. 당시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박관영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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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 옆에 있는 신성학당. 권헌중 장로가 세운 신성학교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박관영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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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 앞에 있는 사철나무 아래에 권헌중 장로가 잠들어 있다. 박관영기자 |
Story Tip 자천교회는…
100년 넘는 세월에도 설립때 모습 온전히 간직
유일한 一자형 한옥 교회… 건축사 중요 유산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773번지에 있는 자천교회는 지은 지 100년이 넘는 목조 한옥구조의 교회당이다. 이 교회는 1903년 선교사 안의와로부터 전도를 받은 권헌중 장로가 설립한 교회로, 초기 한국 교회 형태인 ‘ㄱ’ 자형이 아닌 국내 유일의 겹집구조인 ‘일(一)자’ 형태로 지어졌다. 국내에서 지은 지 100년을 넘긴 교회가 400여곳 있지만, 옛 모습을 온전히 지키고 있는 교회는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특히 건물구조가 독특하다. 예배당 지붕을 넓고 평평한 ‘우진각’ 형태로 얹었는데, 이러한 형태는 전통 한옥의 대문에 흔하지만 독립건물에 쓰인 것은 흔치 않다. 기와지붕을 인 목조 예배당에 들어서면 일(一)자형 공간이 완연하다.
아치형 공간을 만들어 선교사석과 설교자석을 두고 바로 앞에 강대를 놓았는데,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보도록 신자석 가운데 칸막이를 쳤다. 당시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출입문도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 신도가 따로 드나들도록 각각 냈다.
교회 옆에 세운 한옥건물인 신성학당은 과거 권 장로가 교회 내 설립한 신성학교의 정신을 이어 세운 전국 유일의 전통한옥 교회당으로, ‘ㅁ’ 자 구조의 전형적인 한옥이다. 이 때문에 자천교회는 개신교와 국내 건축사 연구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52호이면서 한국기독교 사적 제2호로 지정됐다. 예배당 앞에 있는 사철나무 아래에 권헌중 장로가 잠들어 있다.
이창남기자 argus61@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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