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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고가 남긴 유묵을 정리한 탁암문집을 가슴에 품고 앉은 아버지, 그 아버지를 위해 만든 가족문집을 가슴에 안은 장남 홍승우 시인 내외의 홀가분한 미소가 효자가 사라진 이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의 울림이 자못 크다. |
지난해 말 주말섹션팀 앞으로 의미심장한 문집 하나가 우송돼 왔다. 표지만으로는 감동스러운 내용을 다 감지할 수 없었다. 전체 분량은 224쪽. 34쪽은 화보였다. 집안을 빛낸 선조들의 온갖 비석, 재실의 기문, 아버지의 일생을 알려주는 각종 기념사진과 가족사진 등을 엮었다. 문집에는 한 집안의 우여곡절사가 옥수수 알처럼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조선조에서 발원한 삼강오륜 가득한 유교식 삶을 몸으로 증언해왔던 아버지, 그와 180도 달라진 초스피드 첨단세상을 사는 아들 세대의 반유교적 정서가 고기압과 저기압처럼 부딪치고 있었다. 가족애가 남달랐다. 세대간의 간극이 ‘불협화음’이 아니었다. ‘외경심’으로 작용했다. 부모에 대한 지극한 맘이 봄꽃처럼 피었다. 자식과 며느리, 손자와 사위의 맘까지 편지에 담았다. 여느 집안에선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구한말 증조부(홍종린)의 빛바랜 사진은 물론 남양홍씨 통정공파(휘 종린)의 가승(家乘·시조에서부터 중시조를 거쳐 현재까지 자기 집안을 중심으로 만든 세부 족보), 각종 재실 현판 및 중수기, 묘갈명(망자를 위해 그를 잘 아는 고매한 학자를 찾아가 부탁해서 받는 글인데, 망자의 생애를 유가식으로 풀어낸 평전 같은 비문이다. 묘갈명은 유족 측에서 쓸 만한 분에게 부탁을 해서 받는다)을 평소 챙겨뒀던 분이 바로 침산동 335번지에서 한영의원(한영산부인과)을 운영, 지난해 11월 지역 의학계에서 완전히 물러난 일암 홍군식(81). 장남 홍승우 시인 내외를 비롯해 20명의 수하 식구가 몸져 누운 어머니 때문에 더욱 고독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 궐기하듯 문집을 만든 것이다. 요즘은 무조건 편리를 좇는 세상이 아닌가. 부모를 위해 대다수가 외국효도여행을 보내거나 집안 식구 불러 뷔페식으로 만찬을 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 가족은 문집을 안겼다. 무늬만 가족인 이 삭막한 세상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치매·대퇴부 질환 앓던
노모가 요양원 입원 후
아버지 기력 쇠잔해져…
자식들 “기쁨 드리자”
팔순기념 사랑의 이벤트
총 224쪽에 재실 기문 외
아버지와 가족 사진 등
집안 우여곡절사 엮어
며느리·사위·손자 등은
가족애 넘친 편지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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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기족문집 형식의 ‘일암문집 출판기념회’때 일암 내외와 4남매 가족이 기념촬영을 했다. |
◆ 유교식 삶으로 점철된 일암 홍군식
“이 기자 혹시 ‘배종(陪從)’이란 말을 알아요? 아마 모를 거요. 배종은 집안 어른이 먼 길을 떠날 때 수하 사람이 옆에 붙어 수발하며 불편함을 없애주는 행위를 말해요. 저는 조부 때는 물론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도 3년상을 치렀어요. 3년간 살아 있을 때처럼 조석간에 상식을 올렸어요. 대구로 이사왔을 때도 다른 집안에서는 가정의례준칙에 따라 현대식 범절을 따랐어도 저는 오직 우리 가풍만 섬겼어요. 밤과 새벽에 아버지 잠자리를 돌봤어요. 겨울엔 요를 따뜻하게 덥혀놓아야죠. 그리고 조석간에 사랑방 앞에 가서 안부 인사를 드렸어요. 한마디로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목숨처럼 지켰어요. ‘밤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이른 아침에는 밤새 안부를 묻는다’는 뜻으로, 그 시절에는 내가 성공하는 것보다 부모 잘 섬겨 조상에 욕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게 장부의 삶이었어요.”
일암은 원래 정치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6·25 전쟁 때문에 그 길이 막혀 대구서 경북대 의대에 입학, 의사의 삶을 걷는다. 그가 문집에 적힌 자신의 연보를 보여준다. 문중에 헌신한 삶이었다.
팔순 넘어서까지 노인전문병원 진료원장으로 봉직했다. 하지만 자기 삶의 반 이상은 문중지키기에 헌신한다. 75년에는 일암의 16대조이며 영남 입향조인 승지공(휘 윤온)의 묘표(비문)를 비롯, 후에도 여러 묘표를 쓴다. 84년에는 아버지의 유고를 묶어 탁암문집을 발간한다. 89년에는 남양홍씨 대종중 대전 세덕사 학사공 향사 때 아헌관, 90~92년 남양홍씨 대구화수회장, 91년 남양홍씨 대종중 군위 양천서원 초헌관, 95년은 남양홍씨 대종중 부회장, 2005년 남양홍씨 통정공파 가승을 만들고, 2007년 고향에 있는 관수정 중수기, 2011년에는 경주 입향조 농와공 묘갈명까지 번역한다. 조선조에 태어났다면 일암은 문중종사를 책임지고 관혼상제를 진두지휘하는 선비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 일암 문집 간행위원회 만들어지고
슬하의 4남매는 모두 결혼해 분가했다.
일암 내외는 서변동의 한 아파트에 살았다. 3형제는 옛날식으로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하루에 한번 문안 전화는 드리자고 다짐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문제였다. 초기 치매 증상을 보이고 대퇴부까지 탈이 났다. 결국 지난해 달성군 하빈면의 한 보훈요양원에 입원한다. 가족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갔다. 하지만 홀로 남은 일암의 기력은 하루가 다르게 쇠진해갔다.
고모는 물론 장녀 성애(60)·장남 홍승우 시인(59)·차남 성철(55)·삼남 승범(50) 내외가 의기투합을 한다.
일암의 팔순잔치, 부모 결혼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가족문집을 만들기로 한다. 지난해 2월쯤이었다. 84년 일암이 선고를 위해 한문전용 탁암문집을 냈지만 이는 후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일암의 묘표 및 각종 글들은 국한문 혼용키로 했다. 가족사진과 편지도 함께 수록해 ‘현대판 문집’으로 편집방향을 잡았다.
일암의 일처리는 종부의 바느질 솜씨를 방불케 했다. 지난 시절 문중사 관련 글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컴퓨터에 입력해 두었다. 파일이 무려 100개나 됐다. 파일부터 분류했다. 살릴 것을 골라냈다. 선택한 파일에 대해서는 일암의 감수가 병기됐다. 일암은 문중 관련 일은 비용까지 모두 기록해 두었다. 그 자체로 축약된 가족역사였다.
빛바랜 사진은 스캔작업을 했다.
1936년에 찍은 증조부 사진, 할아버지 내외 사진, 아버지의 4세 때 사진 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들어온 식구들과 손자들로부터 편지를 받는 절차가 남았다. 외국에 유학 가 있는 손자들도 있어 일이 늦어졌다. 모두 참석할 수 있는 8월에 출판기념회를 하기로 한다.
사진 설명 다는 일도 정말 어려웠다. 다들 기억이 정확지 않고 촬영지에 대한 기억도 제각각이어서 검증하는 데 기력을 소진한다. 문제는 표지였다. 삼형제는 “아버지 문집이라서 아버지의 사진 한 장 정도는 들어가야 된다”고 고집했다. 그런데 일암은 생각이 달랐다. “생전에 문집 내는 것도 남세스러운데 자기 얼굴까지 표지에 내건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니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해서 결국 사진은 못 싣고만다.
◆ 짠한 편지글 다시 읽어보니
일암은 보내온 편지를 가슴으로 읽어내려 가면서 감동을 주는 대목에 밑줄을 쳤다.
중국에 교환학생으로 가 있는 손자 정수는 가풍을 이어받은 듯 ‘할아버지 수비남산(壽比南山) 하십시오’라는 말을 보내왔다. 수비남산이라, 일암도 평소 잘 접해보지 못한 말이라서 장남을 통해 무슨 뜻인지를 알아냈다. 중국에선 ‘만수무강(萬壽無疆)’이란 말로 사용되고 있는데, 손자가 어느새 일암의 뒤를 잇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손녀 장현지는 ‘세월이 시간보다 더 많이 안다’라는 말처럼 하루하루를 보낼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외할아버지께서 쌓아 오신 세월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외할아버지는 제가 무슨 질문을 하거나, 제게 무엇인가를 알려주시려 할 때 늘 객관적 자료와 책, 데이터를 찾아오셔서 안경을 올려 쓰시며 팩트의 중요함을 알려주었습니다’면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미국에서 교수로 있는 외손자 장승훈은 일암을 ‘과학자 할아버지’로 존경했고, ‘외할아버지의 유교적 전통 때문에 미국에서 가장 균형잡힌 경영학을 가르칠 수 있다’고 일암을 인정했다.
손녀 유정은 ‘병상의 할머니를 위해 관련 의학 서적을 탐독하고 계신 할아버지의 향학열과 할머니에 대한 사랑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면서 일암을 ‘하나에서 열까지 다 본받을 수 있는 분’으로 치켜세웠다.
‘진지 드시다 말고 조그마한 땅콩버터의 성분과 보관방법을 무려 13분간이나 읽으시는 진정한 강자 할아버지’로 묘사한 손자 혁수의 글에선 “그래, 그래!”라면서 일암이 빙그레 웃는다.
‘남양홍씨 내력과 제사 지내는 법을 현장에서 공부할 수 있어 잊을 수 없다’고 한 손자 석준의 글에서는 ‘녀석이 좀 더 가보 공부를 해야 될텐데”라며 안쓰러움을 보인다.
장손 정익은 ‘부모보다 더 꼼꼼하게 유치원 준비물을 챙겨주셨던 할아버지의 배려를 밑천으로 빛나는 미래를 그려내겠다’고 장담하자, 일암도 파이팅을 외치며 주먹을 불끈 거머쥔다.
사위 장병준에게는 경북의대 17년 대선배가 바로 일암이다. 전공분야도 같은 산부인과. 그는 장인어른을 지역 의료계의 큰별로 인정했다. 그러자 일암은 ‘그건 아니다’면서 손사래를 친다.
셋째 며느리 김성미는 ‘유일무이 우리 아버님’으로, 대학교수인 삼남 승범은 ‘이제는 보통사람 아버지 홍 반장’으로 일암을 부둥켜안는다. 일암의 눈시울이 불그레해진다.
옥상에 올라와 함께 빨래를 찝어주었고 운전연수까지 시켜주신 친절한 아버지로 일암을 기억한 둘째 며느리 정명주. ‘대소사 아버님을 통하면 만사형통할 것만 같았는데, 요즘 아버님의 쓸쓸한 뒷모습에 울컥할 때가 많네요’란 대목에서 일암도 한손을 포갠다.
아버지와 같이 의사의 길을 걷는 둘째 성철, ‘어릴 때는 와이셔츠 칼 같이 다려 입고 다녀셨는데 요즘은 같은 옷만 입고 있는 걸 보면서 세월 이기는 장사가 없음을 절감한다’고 하자 일암이 옷매무새를 다시 고친다.
가장 문학성 있는 편지를 올린 맏며느리 박인자는 ‘문집이 나오기 전에는 가족을 위한 역지사지하는 힘이 부족했지만 이 문집을 통해 서로의 맘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게 진짜 가족이구나 하는 가족애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때 매사에 너무 적극적이고 세밀한 아버님의 행동이 참 힘들기도 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게 수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란 걸 깨달았다’고 하자 갑자기 젊었을 때 가장 자기 속을 썩였던 장남한테 눈시울을 옮긴다.
장남은 의사의 길 대신, 돈이 되지 않는 시인의 길로 갔다. 일암은 화가 나서 문학서적을 모두 다락에 감금해두기도 했다. 이제 장남은 우편공무원으로 활동하면서 2007년 ‘식빵 위에 내리는 눈보라’란 처녀시집으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일암이 스크랩해둔 아들의 신문 글을 보여준다.
아내는 요양원에 있고 일암은 장남 댁에 있다.
그 전에 셋째 집에 묵었다. 이제 봄이 되면 포항으로 가서 둘째 집에 묵을 모양이다. 일암이 눈내리는 아파트 창 앞에 선다. 한 세월이 저무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하빈 요양원에 누워 있는 아내의 낮달 같은 얼굴이 잠시 얼비치다 사라진다. 저절로 독백을 한다.
‘그래도 난 복노인인기라….’
오전 7시·낮 12시·오후 5시, 하루 세끼를 다 챙겨주는 며느리가 만만한 거리에 있으니.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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