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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관기자pajika@yeongnam.com |
세상 모든 냄새는 역시 익숙한 냄새다. 아니 다른 냄새란 건 맡아본 적이 없다. 그러한 사실이 나를 절벽이 되게 하지 않았을까. 절벽은 새로운 냄새가 없다. 냄새가 없는 것들은 사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허상이다. 나는 지금 허상을 쫓아 이곳에 왔다.
후각신경이 예민한 자들이 간혹 있다. 그런 자들은 비루하고 천박한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코를 잘라버리는 자들도 있다. 그 길이 모든 이를 위한 최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몸 냄새를 맡아본다. 엄마의 젖내에서부터 친구들 선생들 어른들 집에서부터 유치원 학교 군대 각종 모임 누구에게서나 어느 곳에서나 지극히 흔하디 흔한 냄새. 어울림의 냄새. 상투적인 냄새. 어울림은 소수를 지배하고 배제한다.
나의 냄새 또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냄새를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랬다. 그래야 조화로운 사회가 완성된다. 학교 운동장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아름다운 냄새다. 아름다운 냄새가 아이들을 아름답게 조작한다. 아름다운 냄새는 교육적이다. 교육은 경쟁적이고 경쟁은 선의적이라 불린다. 나는 선의적 경쟁에서 패배했고 최선을 다한 결과 패배했으므로 희망을 잃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패배하는 사실을 교육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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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사람
-2008년‘리토피아’등단
-리비도 동인
걷는다. 또 걷는다.
생각 없이 걷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멈칫 걸음을 멈춘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무엇을 하러 가는지 조차 잊어버린다. 나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무표정하고 급하게 내 몸을 관통해버린다. 나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돈다. 멈출 수가 없다.
그때마다 생각이란 것들이 주체할 수 없이 떠오른다. 그 생각이란 것들에서는 절벽 냄새가 난다. 가만히 냄새에 집중하다 보면 그것이 나에게서 나는 냄새라는 생각에 이른다. 그렇다 나는 절벽이다. 내리 깎이는 힘과 솟아오르는 힘 때문에 어디로도 움직이지 못하는 냄새만 풍기는 절벽이다. 절벽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절벽이 될 수밖에 없다. 절벽은 생각의 흔적들을 단단히 품고 있다.
나의 위에서는 까마귀 한마리가 원을 그리고 있다. 검은 피를 꿀꺽꿀꺽 삼키며 더욱더 짙은 검정을 만들어 내며 날고 있다. 날갯짓에 부딪히는 빛과 바람, 비와 눈이 검게 변한다. 사람들이 저주하며 침을 뱉는다. 까마귀 깃털이 추락한다. 바닥으로 추락한다. 까마귀는 변함없이 돈다. 큰 원, 작은 원, 갖가지 원을 그리며 돈다. 원의 안과 밖 그 무엇도 선택할 기회가 없이 원을 만들 뿐인 까마귀의 마음을 아는가.
원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자들과 원 밖으로 들어가고 싶은 자들 사이에서 까마귀는 울고 있다. 검은 눈물을 허공에 덕지덕지 묻히며 울고 있다. 나의 바닥에서 썩는 냄새가 벚꽃향기에 실려 피어오른다. 까마귀는 벚꽃향기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는 등에 문신을 하고 싶다. 흐드러지게 하얀 벚꽃에 앉아 향기를 음미하고 있는 까마귀 문신.
썩은 냄새는 늘 꽃냄새를 동반한다. 꽃냄새는 늘 썩은 내를 동반한다. 남자에게서 여자냄새가 나고 여자에게서 남자냄새가 난다. 어둠에는 빛 냄새가 나고 빛에는 어둠냄새가 난다. 순수한 냄새는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 냄새.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냄새를 맡기 위해 얼마나 울어야 했던가. 어느 순간 더는 눈물이 나지 않을 무렵이 되어서야 속울음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던가. 하지만 그것들 또한 순수한 냄새는 아니라는 것.
냄새가 나를 기어오른다. 냄새는 사람이고 사람은 냄새에 다름 아니다. 결국 살아 있다는 사람들이 나를 오른다. 사람이 사람을 밟고 오르며 손을 흔들면 밑에서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들린다. 나는 그저 절벽이다. 살아 있고 살고 싶은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살아 있기 전의 나는 무엇이었을까. 살아 있기 전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죽음. 나는 죽음이었고 죽음이 세계였다면 어머니는 죽음이셨고 아버지는 죽음이셨다. 나는 평생 죽음을 그리며 살아야 할 운명을 지녔다. 하지만, 죽음을 살다간 자들은 삶을 기억하지 않는다.
죽음과 죽음이 사랑을 하면 현실을 낳는다. 죽음의 산통은 고통스러우나 현실이 태어난다. 나는 바로 그 세계를 산다. 그 세계의 근원은 죽음이기에 현실은 죽음이다. 하지만 나는 현실을 거부하기 위해 절벽처럼 솟아 올라야했다. 눈은 태양을 응시했다. 응시하고 응시하자 눈이 어두워져갔다. 태양은 도전하는 것들을 어둠으로 만들어 버린다.
비가 어울리는 배경이다. 빗소리가 절벽으로 떨어진다. 빗소리는 사람들의 꿈속으로 잘 떨어지지만 사람들은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한다. 꿈속에서 비에 젖는 사람은 죽음 가까이 있다. 그래서 구별을 못하는 거다. 현실의 비가 꿈속으로 내리는 사실을 믿으려는 사람은 없다. 언제부턴가 나는 매일 꿈을 꾸고 매일 비에 젖는다.
지금은 꿈속의 비가 현실의 내 눈을 때리고 흘러내린다. 사람들의 야유가 들린다. 나는 절벽이어야 한다. 귀를 막을 손이 없다. 물을 닦을 손이 없다. 누가 내 손을 잘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팠던 기억도 없는데 이상하다. 나는 그저 기다리기로 한다. 저 무서운 소리들로부터 내 귀를 포근히 감싸주고, 젖어가는 뺨과 눈에 고여 있는 물을 닦아줄 손을 기다리기로 한다. 문득 두 절벽 사이에서 내가 솟아오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무엇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왜 여기 지금 이곳에 있는가. 너는 무엇일까. 너는 누구일까. 너는 왜 여기 지금 이곳에 있는가.
사람들은 어둠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거친 것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위태로운 것을 두려워한다. 두려움은 관습이 된다. 두렵지 않아도 관습이기에 두려워해야 한다.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두려워하게 압박한다. 두려움이 없는 자는 정신병자 낙인이 찍힌다. 그것이 두려운 자들은 각자 알아서 긴다. 과잉 충성은 기본이다. 오버하는 자들은 오버를 열정과 정열이라 부른다.
혁명은 안 되고 머리카락만 길러버린 적이 있으나 무모함과 자괴감에 결국 머리를 잘라버렸다. 잘려나간 내 머리는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봄이 와도 기침이 멈추질 않는다. 가슴이 아파 기침도 맘대로 못하겠다. 담배도 맘껏 피우지 못한다. 나는 무엇에 의지하고 생을 버텨야하나. 몸과 정신이 자꾸만 가파르게 깎인다. 점점 높아진다. 점점 어두워진다. 점점 깊어진다. 날이 갈수록 어둠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진다.
딸아이와 대화를 한다.
“아빠의 엄마, 아빠의 아빠는 지금 하늘나라에 계셔. 그분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야. 지금 인사드리러 가는 길이란다.”
“아빠, 아빠는 아빠의 아빠 엄마 많이 보고 싶겠다.”
“……”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머니 무덤 위에 올라서서 해맑게 웃는 딸아이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조만간 저 아이의 자식들이 내 무덤을 밟고 웃으며 노는 날이 올 것이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웃음이 난다. 무덤 위에서 작은 절벽 하나가 자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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