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은폐가 부른 비극 '성범죄 전과자 단순도주 치부'

  • 노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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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5-28   |  발행일 2013-05-28 제6면   |  수정 2013-05-28
전자발찌 끊고도 잇단 몹쓸 짓
피해여성 보호 기회조차 잃어
[취재수첩] 은폐가 부른 비극

“이게 뭐야!” 지난 24일 기자는 법원 판결문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지난해 10월 대구에서 전자발찌를 끊고 도주했던 김윤경의 판결문이었다. 당시 경찰 발표나 언론을 통해 드러난 사건 내용은 성범죄 전과자의 단순 도주행각이 전부였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범죄는 충격적이었다. 김윤경은 도주 9시간 전, 벌건 대낮에 가정집에 침입해 30대 여인을 성폭행했다. 그것도 전자발찌를 찬 채. 전자발찌를 끊고 몇 시간 뒤엔 경산의 한 대학교 앞에서 여학생을 기절시켜 성추행했다.

그러나 김윤경의 성폭행·추행 사실은 경찰의 수배전단이나 검거 후 보도자료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당시 기자는 경찰에게 김윤경의 여죄를 진지하게 캐물었다. “별 것 없는 것 같다. 더 조사해봐야 한다”는 게 경찰의 답변이었다. 그리곤 진짜 ‘별 것 없는’ 것처럼 사건은 마무리됐고 경찰도 더 이상 공식발표를 하지 않았다.

언론은 잠잠해졌고 진실은 철저히 감춰졌다. 김윤경의 성폭행 범죄사실을 9시간이 넘도록 몰랐던 보호관찰소나, 김윤경을 조기에 검거하지 못한 경찰이나 사건이 묻히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전자발찌 부착자를 관리하는 대구보호관찰소는 사건 이후 공식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어쩌면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동생일 수 있는 무고한 여성이 연이어 화를 당했는데도 말이다.

만약 김윤경이 전자발찌를 찬 채 성폭행을 하고 도주 후 성추행을 한 사실이 지난해 검거 당시에 밝혀졌다면, 보호관찰소와 경찰은 거센 비난과 책임추궁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여론은 들끓었을 것이고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은 지금보다 더 높아졌을 것이다. 어쩌면 온 사회가 범죄로부터 여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김윤경의 죄책감도 더 컸을 것이다.

김윤경 사건이 단순 도주로 덮이고 7개월이 지난 지금, 현실은 어떠한가.

최근 의성에서는 50대 여성 수도검침원이 무참히 살해당했다. 지난 25일 실종됐던 대구의 한 여대생은 하루 만에 경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이 여대생이 성폭행 당한 뒤 살해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보호관찰소와 경찰의 뜻대로 김윤경 사건은 은폐됐지만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사건은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김윤경 사건을 취재할 때가 다시 떠오른다.

김윤경이 도주한 후 사흘 뒤 영남일보 첫 보도가 나가자, 경찰은 뒤늦게 수배 전단을 만들어 공개수배를 통한 수사로 전환했다. 당시 경찰과 보호관찰소는 ‘수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도주사실이 밖으로 새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러나 기자의 한 지인(여성)은 “왜 좀더 일찍 기사를 못 썼나. 그런 사건이 있는 줄 진작 알았다면 당직 근무 때 문을 꼭 잠그고 딸아이도 조심시켰을 텐데…”라며 오히려 기자를 나무랐다. 강력사건일수록 국민이 알아야 조심할 수 있고, 여론이 들끓어야 범죄자가 위축된다는 얘기였다.

감추고, 덮고, 눈 감고… 그러는 동안 우리는 피해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조차 잃었을지 모른다. 이 모든 게 바로 ‘은폐가 부른 비극’이 아닐까.

1사회부 노진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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