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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 왼쪽부터 이철희(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고성국(정치학 박사), 박상병(정치학 박사), 유창선(사회학 박사), 신율(명지대 교수), 김종배(정치평론가), 홍성걸(국민대 교수), 이봉규(정치평론가). |
축구 A매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대한민국은 뜨겁다. 특히 ‘군대스리가’를 거친 예비역 남성들은 저마다 축구 해설가가 되어 대표팀의 경기력을 예상하고 성적을 전망한다. 일부에서는 월드컵 기간에 전 국민이 축구 전문가가 된다는 말을 할 정도다.
대한민국에서 축구에 못지 않게 국민의 관심을 받는 분야가 또 하나 있다. ‘정치’가 그것이다. 우리 국민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고 비판하고 분석하고 지적하는 전문가적 시각을 나타내는 모습은 어디서든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축구와 정치라는 분야에 대한 관심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 축구에 대한 관심이 ‘애정’이라면, 정치에 대한 관심은 ‘애증’이다. 축구와 달리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는 냉소적이며 비판적이다. 어떤 사람은 정치를 ‘뻔뻔한 비호감’에 ‘왕재수’라는 선입견을 거침없이 표현하기도 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정치에 대한 이런 비호감이 정치와 현실의 괴리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이승만 독재와 군사쿠데타, 그리고 연이은 군사정권이라는 불행한 한국 현대사는 국민들이 정치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토양이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생활’이라는 인식 하에 일반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확산되면서 이제 정치는 특정집단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문화의 한 트렌드가 되는 분위기다. 정치의 대중화라는 환경에 편승해 새롭게 부각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정치평론가다.
◆정치평론가란 직업
야구나 축구 경기에서 전문가들의 분석이 경기의 재미를 높여주듯이 복잡한 정치현상에 대한 분석과 해석, 전망을 곁들이는 정치평론가들은 국민의 정치에 대한 친숙감을 높여주는 존재다. 정치평론이란 어떤 분야인가. 경희대 이동수 교수에 따르면 정치세계에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정치행동가와 정치사상가, 그리고 정치평론가가 바로 그들이다. 행동가는 정치현장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며 현실을 움직여 나가는 사람이다. 반면 사상가와 평론가는 행동보다는 말로 정치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물론 사상가와 평론가가 사용하는 말의 종류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보편적 개념과 이념, 타당한 사상을 탐구하는 사상가의 말은 논리추구적이며 진리추구적인 철학적 언어다. 이에 비해 평론가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을 알리고 소통하며, 사회적 공론을 불러오는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언어다.
따라서 일부에서 교수는 정치사상가의 역할을 하고, 정치평론은 평론가로서의 전문가가 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 정치평론가는 “평론은 분석하고 주장하는 것인데 정치학 교수들은 정치 현상을 사상에 대입해 설명한다”면서 “실전경험이 빈약한 교수들이 정치인의 행동과 말에서 복선과 함의를 드러내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대선, 총선 계기로 폭발적 성장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한 해에 치러진 2012년 이후 나타난 새로운 정치현상 중의 하나가 정치평론가의 대거 등장이다. 일부 지상파 TV의 토론 프로그램이나 시사 프로그램에서 곁반찬 역할에 그쳤던 정치평론가들이 종합편성방송이나 보도채널, 혹은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으로까지 활동 반경을 확대하면서 새로운 직업군으로 등장한 것이다.
지난해 한 시사주간지가 대선 전 두달 간 정치평론가들의 방송출연 횟수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이나 고성국 박사, 박상병 박사, 황태순 위즈덤센터 수석연구원, 유창선 박사, 박상헌 공간과미디어연구소장, 신율 명지대 교수 등은 하루에 1개 이상의 방송에 얼굴을 드러냈다. 신율 교수나 고성국 박사가 한때 정치평론계의 2강으로 불렸던 것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다. 실제 방송작가 사이에서 ‘잘나간다’는 평가를 받는 황태순 위즈덤센터 연구원이나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등의 경우 지난해에만 무려 500회 내외의 방송출연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1월엔 무려 50여명 맹활약
실전 감각 지닌 정치인도 합류
정치적 편향성 놓고는 논란
방송 출연이나 칼럼 기고 등의 활동 무대뿐만 아니라 정치평론가 자체의 수도 급증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10명 남짓에 불과하던 정치평론업계 종사자는 대선 직전인 지난해 11월에는 무려 50여명이 정치평론가라는 명함을 들고 활동할 정도였다. 한때 대학 교수 출신이나 인터넷상에서 이름을 얻은 논객들의 주무대였던 정치평론에 실전감각을 지난 현장 정치인 출신들이 대거 영입된 결과다.
황태순 수석연구원은 박철언 전 의원·김중권 민주당 전 상임고문과 함
께 정치활동을 했고, 이철희 소장 역시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보좌진으로 일한 바 있다. 유창선 박사나 박상헌 소장 역시 정치인의 보좌관이나 특보를 하면서 살아있는 정치감각을 키운 케이스이며, 홍성걸 교수는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연구소 출신이다.
◆절묘한 한국정치의 그랜드크로스 결과
정치평론시장의 급격한 팽창의 원인은 무엇일까. 일부 정치권에서는 이를 정치환경의 ‘그랜드크로스’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랜드크로스란 원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나오는 말로 행성들의 십자배열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정치적 환경 변화 요인들의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국내에서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일반 국민의 욕구가 급증했다. 이같은 욕구가 정치적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안철수 현상’”이라면서 “외부에서도 북아프리카 오렌지 혁명,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 운동, 미국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 등도 대중의 정치에 대한 자각을 높이는 요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미디어 환경의 다변화도 한몫했다. 앞서 밝힌 것처럼 17대 대선까지만 해도 정치학과 교수나 전공 박사들이 시사평론가라는 명함을 가지고 일부 한정된 지상파 프로그램 위주로 활동했다. 하지만 4개 종합편성채널 출범과 보도채널의 확대, 그리고 인터넷TV 등 온라인 영역의 확대도 정치평론가 증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또다른 정치평론가는 “지난해에는 20년 만에 대선과 총선이라는 빅 이벤트가 한 해에 열리면서 정치에 대한 수요가 팽창했다”면서 “이런 가운데 종합편성채널이나 보도채널 등 미디어시장의 확장은 국민의 정치적 욕구를 수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정치권 ‘제5열’ 역할 경계해야
정치평론가들의 역할 증대는 정치적 동물인 인간에게 정치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높이고,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데 있어 바람직한 현상으로 평가받는다. 즉 이들이 정치 현안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정치적 냉소주의자에게까지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촉진시킨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기여를 한다는 것이다.
정치평론가들이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을 밝혀야 하는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한다. 정치권에선 공정하면서 중립적인 스포츠 경기 해설가와 달리 정치평론가가 자신의 정치성향에 대해 가치중립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대표적 보수 정치평론가인 전원책 교수는 한 라디오 방송에서 “정치평론을 한다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밝히지 않고 활동한다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치평론이 논란에 휩싸이는 것은 정치평론가가 자신의 말을 절대적 진리라고 강요하거나 정치인의 도구적인 말로 왜곡할 때다. 즉 현상과 사실에 대해 객관적이어야 할 정치평론이 자신의 입장에 투영된 논리를 여과없이 표출하는 것은 스스로의 생명줄을 갉아먹는 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표적 정치평론가 중 한명으로 손꼽히던 고성국 박사는 지난해 대선후보의 지지모임에 참석해 해당 후보의 대선승리를 희망하는 발언을 하고, 해당 정당의 초청강연회에 자주 참석하면서 중립성 시비에 휘말렸다. 또한 정치 지향성이 정치 권력에 대한 지향성으로 변질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도 정치권에서 일하다 정치평론으로 바로 자리를 옮기거나 반대로 정치평론을 지렛대 삼아 정치권으로 몸을 기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정치평론이라는 객관성을 담보한 옷을 입고 자기의 지지정당이나 정치적 목표를 위해 일하는 이른바 ‘제5열’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미 언급했던 고성국 박사와 함께 문재인 캠프의 이정우 경제민주화위원장과 안철수 캠프의 김민전 교수 역시 한때 정치평론가로 유명세를 얻은 바 있다.
한 고참급 국회의원 보좌관은 “토론프로그램이나 시사프로그램에서 심판의 역할을 해야 하는 정치평론가가 정치적 편향성을 지녔다면 이는 축구경기에서 심판이 한쪽 편을 들어 12대 11로 싸우는 불공정한 경기와 다를 바 없다”면서 “이런 사람들은 국민이 먼저 인식하고 정치평론의 세계에서 퇴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홍석천기자 hongsc@yeongnam.com
그래픽=최은지기자 jji1224@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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