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人牲劇場 .4] 모델가수 신광우편 - 지방에서 딴따라로 산다는 것은…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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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8-09   |  발행일 2013-08-09 제34면   |  수정 2014-01-17
나 한때 ‘대구의 현철’…요새 조용필을 보면 괜히 속이 거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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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우씨가 가족사진을 비롯해 예전 한창 시절 활동하던 모습을 담아놓은 사진벽 앞에서 기타를 치고 있다.


전부 살고나면 모든 게 다 이해된다.

하지만 다들 자기 삶을 못났다고 마구 두들겨 패기 일쑤다. 임종 직전이면 천리(天理)를 알곤 엉망진창인 제 삶을 수긍하고 한없이 긍정하게 된다.

Hello, Bounce 등이 수록된 19집 음반으로 대박행진을 하고 있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가왕(歌王) 조용필을 보면 괜히 거북하다. 그를 보면 인생행로라는 게 신이 이미 정한 대로 굴러가는 것 같다. 요즘은 자꾸 이런 독백이 잦다.

‘외모로만 본다면 조용필은 나와 대적할 상대가 못 되지. 부리부리한 눈매, 장수눈썹, 백두대간의 능선 같은 콧날, 갓 구워낸 식빵 같은 가슴…. 그런데 나는 언감생심, 조용필의 경지를 도저히 엿볼 수 없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당신은 내가 누군지 궁금할 것이다. 그래, 사람들은 나를 ‘모델가수 신광우(본명 신상태)’라고 부른다. 한때는 대구에서 가장 잘 나가던 향토연예인이었다. ‘오빠부대’도 있었다. 가끔 짓궂은 사람이 ‘도대체 당신은 모델이냐 가수냐’면서 무안을 주기도 한다. ‘모델이면 모델이고 가수면 가수이지 모델가수가 뭐냐’는 핀잔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모델 영역이 위축되면 가수로 활동하고 가수가 역부족이면 모델 타령 하면서 궁지에서 벗어났다. 내겐 항상 배수진과 정면승부가 절실했다.

향토에서 인기를 먹고 살려면 한없이 고달프다. 지방연예인의 비애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에서 유명해져야 돈방석에 앉을 수 있었다. 연예인은 모두 ‘한방’을 꿈꾸지. 40여년 지난 시절을 돌아본다. 이젠 내맘이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에 등장하는 ‘내 누님’ 같은 심정이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밤무대 악사, 가수, 모델, 작곡작사가, 보디빌더, 연극배우, 화공약품사 사장….

노경에 가족 곁으로 온 혈기방장했던 가장의 후줄근한 추억담. 그런 게 내 심장 한쪽에 고여 있다. 갑자기 고복수의 노래 ‘애수의 소야곡’의 첫 소절이 생각난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 내당동 부잣집 장남이었다

대구시 서구 내당동 67번지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주소가 달서구 두류동 670번지로 돼 있다. 우리 집은 두류3동 주민자치센터 앞 현재 대구대 운동장에 있었다. 인근에서는 가장 부유했던 것 같다. 7남매의 장남이었다. 나는 당시 내 또래 중에서는 선택받은 아주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꽤 큰 규모의 양계장, 아버지(신학명)는 감삼못(현 광장코아 자리) 맞은편 부근에서 성서정미소(낙원장 목욕탕 자리)를 꾸려갔어. 또 큼지막한 과수원까지 꾸려가고 있었다. 인생이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양지가 음지가 돌변한다.

아버지와 조부는 권력 때문에 부를 이루었지만 그 권력 때문에 부를 다 날렸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경찰관을 했고 대구 10·1사건에 연루돼 고생을 많이 한다. 조부(신혁선)는 광복 직후 민주당 경북도의원이었다. 하지만 5·16쿠데타에 휘말리면서 실각하고 만다. 정치적으로 희생을 당하자 평소 도움을 많이 받았던 동네사람들까지 등을 돌렸다. 사상이 의심스러운 친일파 집안으로 밀고도 당한다. 인심(人心)이란 그런 것이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줬는데 결국 배은망덕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그 많던 전답을 다 뺏기듯 처분하고 급히 남산동 대한극장 옆으로 이사갔다. 세상사, 자기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도 뼈저리게 절감한다. 아버지는 입을 닫았다. 한숨으로 잠을 청했다. 결국 화병 탓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아버지는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수성구 상동에서 신광화학이란 화공약품 가게를 연다. 나는 공부는 별로라서 경북공고에 들어갔다. 졸업 직후 아버지가 무조건 가업을 이어받으라고 애원했다. 내 나이 갓 스물이었다.

내 몸에는 예인(藝人)의 피가 숨어 있었다.

사업 수완도 없었다. 아는 사람한테 툭하면 속임을 당했다. 빚도 받아오지 못했다. 보기와 달리 난 돈에 태평이었고 너무 선비적이었다. 장사에선 그게 흉이었다. 업자들이 그런 날 다 이용해 먹었다. 자금력도 없고 장사가 안돼 문을 닫고 말았다. 장부 앞에 앉아 있어도 자꾸 ‘콩나물 대가리(음표)’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업자들이 측은하게 여겼다.

“신사장, 당신은 사업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여리고 고와. 다른 길을 찾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사업보다 노래가 더 좋아

날 가수로 만든 건 미국산 라디오 ‘제니스(ZENITH)’였다.

당시 난 대구에선 유일한 노래 프로그램이었던 대구KBS 낮12시 ‘직장음악 시간’에 매료돼 버렸다. 노래가 물귀신처럼 날 잡아먹은 것이다. 지금은 뉴스부터 시작하지만 당시에는 뉴스보다 오락에 굶주린 민심이라 추억의 가요를 더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전생에 가수였는지 무슨 노래든 한두 번 들으면 가사를 다 외울 수 있었다. 경산 출신의 가수 방운아의 ‘마음의 자유천지’와 ‘인생은 나그네’ ‘나 하나의 사랑’과 ‘고향초’를 잘 부른 송민도, ‘과거를 묻지마세요’의 나애심, ‘청포도 사랑’의 도미한테 필이 꽂혀버렸다. 내당국민학교 시절, 난 교단을 무대삼아 툭하면 리사이틀을 벌였다. 교실은 핑크빛으로 뒤집어졌다. 여자아이들은 능청스럽게 가수 흉내를 내는 내게 러브콜을 보냈다. 난 음색이 허스키했다. 당시 저음으로 유명했던 남일해와 비교되기도 했다. 특하면 두류산에 올라 노래를 불렀고 동네노래잔치 때는 송민도의 ‘행복의 일요일’을 불러 어른들을 흥겹게 했다.

결국 밤무대에 턱걸이할 수밖에 없었다. 23살이었다. 조경제(아코디언)와 함께 5인조 밴드를 향촌동 왕중왕 바에 들어간다. 그때만 해도 가수는 아니고 리더기타였다. 중학교부터 고교때까지 대구음악학원에서 기타 개인교습을 받았다. 폴 앵카의 ‘Diana’, 브라더스 포의 ‘Try to remember’ 등 60년대 유행하던 팝송을 꿰차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가 밤무대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일부 업자가 눈치챈다. 주변에서 나를 ‘딴따라 사장’이라고 쑥덕거렸지만 난 성격이 양순해서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죽고 싶은 생각도 들고, 훌쩍 무인도 같은 데로 떠나버리고 싶었지만 아침이 되면 생계 때문에 다시 가게로 갔다.

속으로 ‘우리 땅 안 밟으면 못 지나간다고 하는 부자 집안의 종손인데 이게 무슨 꼴인가. 그 많던 돈은 다 어디갔나’하면서 장탄식을 했다. 기제사 때가 되면 아버지를 한없이 원망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내 노래는 더 구성져 갔다.

20대 초중반은 사업과 음악을 병행했다.

하지만 사업에 영향을 줄까 업자에겐 쉬쉬했다. 갈수록 사업은 ‘죽음의 길’ 같았다. 서른 즈음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업을 접는다. 아버지가 없어 집안을 혼자서 꾸려가야만 했다. 사업을 그만두려고 하자 어머니는 말렸다. ‘종손이 딴따라라니…’

그러나 음악은 숙명적이라서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샌님이 사업판에 들어온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 바로 밑의 동생(상오)은 나와 달리 사업가 기질이 남달랐다. 차라리 그한테 가업을 넘겼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무명 악사 생활도 ‘장난이 아니었다’. 실력이 없으면 밀린다. 당시 나는 지역의 클럽, 카바레, 회관, 주점 등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무명 시절이었다.

업소에서는 내 이름도 없었다. ‘신광우 선생님, 이리와서 술 한 잔 하시죠’라고 살갑게 나를 부르는 손님은 없었다. ‘어이, 기타. 이리 와서 내 술 한 잔 받아봐.’

심지어 호스티스도 자기와 악사를 동급으로 취급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하면서 스스로를 꾸짖었다. 실력과 유명세는 무명이 밀어내기 정말 힘들었다. ‘유명한 가수가 되어서 이 수모를 반드시 되갚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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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코리아·모델로도 활동…

메들리테이프 등 반응 좋았지만

전성기는 노루꼬리보다 짧더라

거리의 여자에 걸려 스캔들까지


다시 ‘무명’으로 추락했을 때

내 삶의 그림자 말끔히 씻어준 건

458회에 걸친 자선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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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우씨는 한때 미스터코리아에 입상할 정도로 신체가 건장해서 ‘모델가수’ 활동에 적잖은 도움이 됐다

◆ 미스터코리아에 도전하다

추억의 역기가 생각난다.

그 시절에는 현대식 헬스기구가 없었다. 마을마다 공터에 운동할 기구를 직접 만들었다. ‘사제역기’였다. 벽돌담장을 만들 때 사용하던 콘크리트를 사용해 ‘짝퉁역기’를 만들었다. 당시 ‘감빵(앞 가슴 대흉근) ’큰 아이가 짱이었다. 나도 10살 때부터 대흉근을 키워 또래 중에서 스타가 되고 싶었다. 죽기살기로 덤벼들었다. 하지만 지도자도 없었다. 무조건 무거운 걸 들면 되는 줄 알고 무리하다가 늑막염을 앓는다.

어느 날 대구에 살고 있는 미스터코리아 서동욱을 반월당 모퉁이 현대헬스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내게 한 수 가르쳤다. ‘더 정교하게 근육을 다듬어야 한다’고 권유했다. 헬스는 권투처럼 시합을 해서 상대를 제압하는 스포츠가 아니고 홀로 자기 자신과 싸워서 이겨야만 하는 고독한 운동이다. 정신력이 있어야 성공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3시간 이상 운동을 했다. 복잡다단하게 얽힌 다양한 근육을 하나씩 정복해나갔다. 복근, 대흉근, 활배근, 광배근, 비단근(발 뒤꿈치 근육) 등을 고루 단련시켜나갔다. 복근을 만들기가 가장 힘들었다.

미스터대한, 미스터영남 등 지역 대회에 나가서 입상했다. 86년에는 미스터코리아 대구 대표로 출전을 해서 입상을 한다. 그때가 서른여섯이었다. 난 다른 선수에 비해 대흉근이 가장 발달했다. 요즘은 구릿빛 피부색을 만들기 위해 콩기름 원료의 로션을 사용하는데 그때는 원시적 방법으로 피부를 태웠다. 야외 낚시터 등지에서 베이비로션만 바르고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몇 시간씩 여러 차례 무식하게 태웠다. 해수욕장 수상안전요원의 피부처럼 가무잡잡해졌다. 이렇게 나는 밤무대와 보디빌더를 겸했다. 역시 돈은 안됐다.



◆ CF모델에 도전하다

건장한 체구에 용모까지 빛을 발하자 이런저런 곳으로부터 모델제의를 받는다.

대구모델협회 이명복 회장이 자기 협회에 가입해서 모델로 활동하라고 부탁한다. 나는 일반 패션모델이 아니라 CF모델이 된다. 내 나이 37세였다. 교통캠페인과 음주운전예방캠페인 제작 때문에 각 방송국을 들락거렸다. 가든하와이, 대구투자금융, 우방주택, 동아백화점, 대구백화점, 조선호텔, 금복주, TBC방송주제캠페인 등 90년대부터 10년간 100여차례 출연했다. 출연료도 짭짤했다. 한창 때는 200여만원을 받았다. 지금 같으면 천만원대다. 영화 쪽에서도 손을 내밀었다. 대웅프로덕션에서 제작했던 ‘앉은뱅이꽃’에도 출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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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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